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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하이힐 굽 높이가 여성의 계급 드러내…프랑스 귀부인들은 16㎝ 킬힐 신기도
여성들의 지위가 하이힐 높이로 구분되던 시대가 있었다. 신발의 높이만 봐도 신을 신은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었고, ‘천한 것’들은 감히 높고 세련된 신발을 신을 수 없었다.하이힐은 16세기까진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17세기 초가 돼서야 서서히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하이힐의 등장은 우연이 아닌 단계적 발전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우선 스페인의 무어인 여성들이 신었던, 목재의 높은 굽이 붙은 신이 하이힐의 선구로 여겨진다. 이어 물림쇠로 채우게 된 신의 굽이 이탈리아에서 유행했고, 나무신이란 뜻의 ‘조콜리’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이 신은 인기가 좋았는데, 특히 높은 굽의 신발이 인기를 끈 것은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이 진흙과 쓰레기, 대변 등으로 지저분한 거리를 건너는 데도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신은 이 같은 실용적 목적 외의 다른 목적에서 더 주목을 받고, 그것이 사용 이유가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이힐을 신으면 키가 커 보여서 위엄 있는 인상을 풍긴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거리에 진흙탕이 없을 때도 여자들은 하이힐을 계속 신었고, 하이힐이라는 게 치마 밑에 교묘히 감출 수 있는 것인 만큼 키높이 구두처럼 애용됐다. 키 크게 보여서 위엄있는 인상 풍겨힐의 모양도 투박한 것에서 세련된 것으로 점차 변해갔고 여자들 간의 ‘구분 짓기’에 따라 힐의 모양도 세분됐다. 소시민이 신는 투박한 굽과 귀부인이 신는 신의 굽이 달랐고, 매춘부들이 신는 굽은 모양이 또 구분됐다. 특히 매춘부들은 결코 성큼성큼 걷는 법 없이 언제나 높은 하이힐을 신고 아장아장 걸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선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수도 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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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양강국 고려의 밑거름 된 뛰어난 조선기술…'거북선의 원조' 과선으로 여진 해적 물리져
해양의 나라 고려는 500년 역사에서 해군력과 조선술이 발달할 수 있는 다섯 번의 계기를 맞이했고, 잘 활용해 역사의 성공을 이뤘다. 건국자인 왕건은 ‘해군대장’·‘백선장군’의 칭호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제독이었다. 전형적인 해양세력이었다. 그가 초기에 사용하던 큰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 16보요, 위에 다락을 세우고, 말을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방이 16보라면 20m 정도로 대형 돛대를 몇 개 설치한 큰 함선이다. 여진 해적들의 바다로 변한 동해11세기에 들어오면서 동해는 여진 해적들의 발호로 혼란스러웠다. 고려는 국가정책으로 해적 대응책을 강구했다. 동해안의 원흥진(함경남도 정평)과 진명진(원산)에 ‘선병도부서(해군함대 기지에 해당함)’를 설치했고, 예하부대로서 진(鎭)과 수(戍)에 수군을 뒀다. 그리고 해군력의 핵심인 함선 건조에 돌입했다. 1008년에 처음으로 과선(戈船)이라는 신형군함을 75척 건조했는데, 선체의 곳곳에 창을 꽂아 근접전을 펼 때 적병들이 갑판 위로 뛰어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접근이 어렵게 만들었다. 선수에는 쇠로 뿔(충각)을 부착해 적선과 충돌시켜 선체를 깨뜨려 침몰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70여 명 정도가 승선하며, 적재용량은 1000석 정도라고 한다.고려는 1050년에 전함 23척을 이끌고 초자도의 여진 해적을 공격했다. 1107년에는 육군과 협동으로 해륙양면작전을 벌이면서 북쪽에 있는 여진 해적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동해에서 활용한 이 전투선들은 높고 거친 파도, 편북풍 계열의 바람, 원양항해구역 등 동해의 해양환경과 여진족의 배·무기·전투방식을 고려해 만든 전선이었다. 필시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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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대검귀족·법복귀족…신흥 귀족 늘어나자 대대손손 '귀족 혈통' 증명하는 족보 집착
서양 역사에서 귀족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귀족의 어원이 된 라틴어 노빌리스(nobilis)는 ‘고귀한’이란 뜻의 형용사로 ‘사회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월함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노빌리스란 단어가 ‘고귀한’이라는 뜻 외에 ‘평판이 좋다’라는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귀족을 가름하는 기준은 자명해진다. 바로 평판이 좋은 집단을 가리켰던 것이다.귀족이란 평판을 얻기 위해선 귀족의 혈통과 미덕은 물론 ‘귀족다운 삶’의 방식을 좇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귀족의 영지를 구입하고, 상업을 포기하고, 검을 차고, 방패와 투구에 문장을 사용하고, 이웃의 혈통 좋은 다른 귀족과 친교를 맺어야만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준 없이 말이 근거가 되는 평판을 통해 귀족과 귀족이 아닌 것이 구분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확실한 측면이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경계는 불명확했고 손쉽게 귀족을 참칭하는 게 가능해졌다. 귀족의 일원이 되면 다른 계층에겐 허락되지 않던 특권과 기회의 문이 적지 않았기에 귀족이 되고자 하는 수요는 끝이 없었다. 실제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귀족에 합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이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귀족을 자처하는 일은 반복해서 일어났다. 때로는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들이 최고 귀족의 지위를 차지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특권 누리기 위해 귀족 자처하는 경우 급증영국의 울지 추기경을 비롯해 토머스 모어, 크롬웰 등이 한미한 출신에서 귀족으로 탈바꿈한 케이스였다. 그레이셤 가문, 세이무어 가문, 더들리 가문, 세실 가문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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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요·송 갈등 속…줄다리기 외교·무역으로 성장
고려 50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는 요나라·송나라·서하·금나라·원나라(몽골)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 흥망을 거듭했다. 일본 또한 내부 갈등으로 혼란이 끝없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유동적이고, 전쟁으로 점철된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를 성공시킨 외교정책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현재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고려의 외교정책을 중국 지역의 상황과 연관 지어 단계별로 살펴보자. 후삼국 시대에 중국 지역은 남과 북에서 15개의 나라가 70여 년 동안 명멸하는 5대 10국이라는 대분열 시대(907~979년)였다. 만약 당나라가 존속했다면 통일신라의 내정에 간섭했고, 고려는 통일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천운인지, 이후에도 중국은 40년 동안 분열이 계속됐다. 만주에서는 거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고, 947년에는 요나라를 건국하면서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만리장성 남쪽의 북경 등 지역)를 차지했다.요나라는 배후가 되는 고려를 우호세력으로 만들 필요 때문에 사신을 계속 파견해 국교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국경선을 접한 요나라와는 불편한 관계였으나, 요나라를 배척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송나라는 문화와 경제, 무역을 중시하는 국가였고, 황해로 인해 군사적인 충돌의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요나라에 대항해 송나라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송나라는 고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려와 요의 관계를 의심해 외교의 중단이라는 파국 상태까지 이르렀다. 이때 특사 형식으로 바다를 건너가 송태조를 설득해서 7년 동안 단절된 외교관계를 복원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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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역사상 국제무역 가장 활발했던 고려…인삼·청자 찾아 마팔국·아라비아서 오기도
시대와 백성들이 선택한 고려는 출발부터 다양한 종류의 산업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사회였다.고려는 통일을 성취하기 전인 924년에도 7월에는 상선이, 10월에는 사신선이 황해를 건너가 산둥반도 북부의 등주(펑라이)에서 후당과 무역을 벌였다. 정국이 안정된 11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송나라는 운하도시인 동경(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상업과 무역을 추진했다. 거란을 의식하고 고려의 편의를 위해 국가항구를 산둥반도의 남단인 판교진(지금 산둥의 고현)으로 옮기고, 무역 업무를 도와주는 ‘시박사’라는 관청까지 설치했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하자 상업의 중심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1078년에는 명주(닝보우)에서 먼 바다로 나가는 주산군도로 들어가는 진해(칭하이)에 고려 사신과 상선들을 맞이하는 영빈관을 지었다. 1117년에는 닝보우에 고려사관을 설치했다.고려와 송나라는 보통 100명에서 300명이 승선한 선박을 이용해 상당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의복, 상아, 물소뿔, 옥제품, 술, 새(鳥), 차, 칠제품, 악기 등을 수출했다. 반면에 고려는 비단, 금제품, 은제품, 나전 세공품, 꽃방석(화문석), 자개박이 그릇, 인삼, 소나무, 부채, 종이, 붓, 먹, 가죽 등 수천 점을 수출했다. 1078년에는 송나라가 무려 100종이 넘는 품목과 6000건에 달하는 물건을 보냈고, 고려도 역시 그에 버금가는 물건을 보냈다.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는 민간무역이 발달했다. 기록을 보면 송나라 상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012년부터 북송이 멸망하는 1278년까지 266년 동안 무려 129회에 걸쳐 약 5000명이 왔다. 송 상인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산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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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4세기 유럽 떨게한 '죽음의 공포' 페스트…전대미문 전염병은 하층민 황금시대 열었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흑사병)는 그야말로 당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였다. 유럽 거의 전역이 추풍낙엽처럼, 유럽 민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이 휘두르는 낫에 쓸리듯 전염병의 희생양이 됐다. 네덜란드 일부와 벨기에, 피레네산맥 인근 프랑스 일부, 폴란드 등만이 간신히 페스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지역에 따라선 흑사병 탓에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 가까이가 사망한 곳도 있었다. 영국에선 1340년대 페스트가 처음 닥쳤을 때 인구의 20%가, 1360~1375년 창궐기엔 인구의 40%가 줄었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의 인구수를 18세기 초에야 간신히 회복했다. 스웨덴, 덴마크는 인구의 최대 절반이 감소했다. 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도 인구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 것으로 추산된다.하지만 이 전대미문의 대공포가 지나간 뒤 살아남은 사람에겐 흑사병이 일종의 축복이었다. 사람이 귀해지면서 몸값이 높아졌고, 일자리와 재산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족해졌기 때문이다. 흑사병으로 인구의 3분의 1 줄어부동산의 소유권 이전도 활발해졌다. 폴란드에서 잉글랜드까지, 노르웨이에서 시칠리아까지 전 유럽에서 대규모로 부동산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영국의 중세학자 서롤드 로저스가 “페스트의 의미는 토지에 완전한 혁명을 도입한 데 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11세기 이후 임금 지급이 없던 과거의 농노제는 효율성을 급격히 상실해갔다. 지주에 대한 농민의 반감은 오늘날 거대 기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것처럼 흔한 일이기도 했다. 지주들은 토지를 소작 주고자 했으며 과거 현물로 지급되던 지대는 점차 금납으로 대체됐다. 농노보다 신분적 예속이 적은 노동자가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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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3세기 佛프로방스선 법으로 귀족의 노동 금지, 천민과 구분하기 위해…중세엔 일을 벌로 생각
13세기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영주인 레이몽 베랑제 5세는 천생 ‘귀족’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육체적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일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레이몽은 이 같은 관습법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경멸해 마지않던 천한 농민과 건달들을 귀족과 구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나갔다. 자신의 영지에 사는 일반인과 고귀한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시시콜콜 구분하는 각종 법을 만든 것이다.이에 따라 프로방스의 기사들은 농사일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됐다. 기사들은 쟁기질하거나 땅을 파는 것은 물론 장작을 나르거나 각종 손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고귀한 귀족 여인은 ‘음식을 만들지 않고, 설거지도 하지 않으며, 방앗간에 들를 일도 없는 사람’으로 법적으로 정의됐다.중세에는 일을 원죄의 결과인 벌로 생각했다. 성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계율 속에 일을 집어넣어 철저하게 실천하도록 한 것도 모두 ‘에덴동산에서 추방됐을 때 인간에게 강제된 속죄’의 일환이었다고 한다.그리고 이 같은 풍습은 때마침 자리 잡아가던 3위계를 견고히 하는 데 한몫했다. 속죄의 의미로 스스로 쟁기질을 하던 11~12세기의 수도사와 달리 이 당시 수도원과 성당의 수장들은 자신의 부를 이용하는 최상의 방법으로 기도 장소를 충실히 꾸미고, 재건축하고, 제단과 성유물 주변을 휘황찬란하게 하는 데 큰 관심을 뒀다. ‘경제적 부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레토릭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기사들도 게을리 살면서 노동을 자신들의 고귀한 자유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부를 마구 소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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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상권 잡고 후삼국 통일전쟁 승리한 왕건, 끝까지 저항한 적 품은 포용의 리더십 빛나
역사 속에서 집단과 국가는 항상 생성과 붕괴, 분열과 통일의 변증법을 반복한다. 우리는 과거 민족국가라는 의식이 강했고, 항상 통일을 지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0여 년 만에 재발한 후삼국이라는 분열 상태를 해소하고 통일이라는 위업을 실현한 인물은 왕건이다. 무려 40여 년 가까이 벌어진 통일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어떻게 역사에 등장했을까. 후삼국 시대의 도래와 동아시아의 대분열통일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이르러 권력쟁탈전과 경제 실패, 지방 호족들의 반란 등으로 이미 붕괴 중이었다. 마침내 900년에 경상도 산골 출신인 견훤이 후백제를 선포했고, 901년에는 신라의 왕족이며 미륵불이라고 자처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웠다. 이렇게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고, 통일전쟁이 전 국토를 황폐하게 했다. 전쟁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국가 구조와 지역 갈등을 확대 재생산했다는 퇴행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왕족과 수도 중심의 질서를 벗어나 호족과 지방의 성장, 신불교의 등장이라는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측면도 있다.국제 환경은 왕건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후삼국이라는 분열 시대에 중국 지역과 북방 지역에 강력한 통일국가가 있었다면 대규모 침공이나 당나라처럼 민족 통일 과정에 외세로서 간섭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 ‘5대 10국’이라는 대분열 상황이었고, 북쪽은 발해와 거란이 운명을 걸고 충돌 중이었다. 따라서 후백제와 고려는 이러한 국제 환경을 통일의 승자가 되는 데 활용했다. 포용력과 협력을 아는 왕건의 성격 왕건은 군사 지도자로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지녔고, 이를 충분히 활용했다. 포용성 강한 성품과 거시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