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밀이 자라지 못하게 된 메소포타미아…흙을 잘못 다스리면 문명이 사라졌다
흙은 동양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모두 농경이 경제생활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첫 인간인 ‘아담’은 히브리어로 땅 또는 흙을 뜻하는 ‘아다마(adama)’에서 나왔다. ‘이브(하와·하바)’는 히브리어로 생활을 뜻하는 ‘하바(hava)’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적 사고에서 최초 남자와 여자의 이름은 ‘흙’과 ‘삶’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라틴어에서 사람을 뜻하는 ‘호모(homo)’ 역시 ‘살아있는 흙’을 뜻하는 단어 ‘후무스(humus)’에서 나왔다. 농경지 유지하려면 소금 유입 차단해야하지만 그처럼 중요한 흙이었지만 관리가 쉽지는 않았다. 흙의 관리에 실패했을 때 문명권의 경제가 위축되는 것은 물론, 문명 자체가 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출발부터 인류는 흙 관리에서 삐걱거렸다. 인류는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지력 관리에 실패했다. 반건조 지대 지하수에 소금이 많이 녹아 있는 것을 몰랐던 탓이다. 메소포타미아 같은 반건조 지대에서 흙에 소금이 축적되는 것을 막으려면 적당한 수준에서 농경지에 물을 계속 대주거나 주기적으로 농경지를 묵혀야 했다. 하지만 강변의 경작 가능한 토지를 중심으로 생산량이 급증하고, 그에 따라 인구밀도가 갑작스럽게 높아지면서 이 같은 처방이 불가능해졌다. 배수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비옥한 농경지는 짧은 시간에 불모지가 돼버렸다.지역의 젖줄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연안 토지는 평평한 데다 돌도 적고, 정기적인 범람으로 신규 토사 유입도 원활해 비옥하긴 했다. 하지만 불리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발해, 풍부한 지하자원에다 어업·목축업도 발달…중국에 대규모 말 수출, 일본과 활발한 해양무역
우리는 발해의 역사 그리고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한 발해인의 생각과 능력을 잘 알지 못한다. 발해가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에 멸망했다는 ‘가십’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게 올바른 역사 인식일까. 고구려 유민이 주력인 소수의 독립군이 부활시킨 나라, 문명국인 고구려 변방에 터를 잡고 거친 자연 및 덜 세련된 주변 종족과 더불어 새 질서, 새 문화를 재창조한 나라, 그 발해를 중국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부르게 한 실질적인 원동력은 무엇일까? 고조선·부여·고구려 기술 물려받아발해 산업의 실상은 생태환경과 후발 국가들, 계승 민족들의 삶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성(백두산 근처)의 쌀이 유명하고, 책성(훈춘)의 된장은 수출품이었으며,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위성(함경북도 무산)의 철도 유명했는데 ‘철주’라고 부른 요동 안시성 일대는 동아시아 최고의 철 생산지였다.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으로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또 풍부한 금과 은(삼강평원 일대)으로 일본제 수은을 활용한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당나라에서 진귀한 것을 많이 보았으나, 이런 기괴한 것(공예품)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찬받았다(방학봉 《발해경제사연구》).흑룡강 중류 이하, 송화강 하류, 목단강 하류, 우수리강 유역은 대규모 침엽수림지대라서 약초를 비롯해 꿀·산삼·인삼·녹용 등의 수출품이 풍부하게 나왔고, 호랑이·표범·곰·사슴·늑대·토끼·여우·족제비·담비가 서식했다. 발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눈에는 눈, 이에는 이…원초적 법 권력의 근원…함무라비 법전, 공적 응징과 계약의 기초 세웠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의 6대 왕이었던 함무라비(기원전 1792~기원전 1750)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재통일한 군주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an eye for an eye, a tooth for a tooth·lex talionis)’란 문구로 널리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기원전 1772년께까지 작성 연대가 올라가는 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282개 법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거짓 증언과 절도, 은닉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고 노동, 재산, 상거래, 결혼, 이혼, 상속, 입양, 농업, 급여, 임대료에 관한 사법적인 문제도 다루고 있다. 바빌로니아와 외국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것도 주요한 주제다. 그중 32개 조항에서 사형을 규정하고 있고 귀나 팔, 다리 등 신체를 자르는 것을 언급한 곳도 수두룩하다. 역사학자들은 이 법전에서 형벌 조항이 두드러지게 많고, 이전까지 단순한 배상의 대상이던 경범죄에 대해 사형으로 벌한다는 데서 “치안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길 정도로 아직 안정되지 않은 사회였다”는 사회상을 추론하고 있다.법전에는 또 국내 상업과 국제 교역을 장려하기 위한 ‘카룸(karum)’이라는 곳을 두고 ‘상인들의 감독’인 와킬 탐카리(wakil tamkari)가 조직을 대표하도록 했다. 당시 상업 발달 수준이 만만치 않았다는 증좌다. 법전의 특징은 보복주의 형벌이 법전에 기록된 형벌의 특징은 보복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을 상하게 한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의 뼈를 부러뜨리면 그의 뼈를 부러뜨린다”라는 구절이 압권이다. “동등한 신분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릴 경우 부러뜨린 사람의 이를 부러뜨린다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인간은 그가 먹는 것들의 총합 뼈 속에는 그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들이다.”먹고 마시는 내용은 허다한 역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은 분야지만 사실 ‘먹는다’는 것은 인간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식품이 단순한 일화에 불과한 것도 아니었다. 페르낭 브로델의 주장처럼 설탕과 커피, 차, 알코올 같은 먹거리는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이었다.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역사시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마셔왔는지는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과거 인간의 식문화를 파악해볼 수 있는 단서가 바로 뼈다. 인간의 뼈 속에는 삶의 이력이 담겨 있다. 자연스럽게 문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 삶의 모습을 유추하는 데 있어 고대인의 인골은 중요한 정보원이자 단서가 된다. 치아나 뼈에 나이테처럼 영양 공급 상태가 남아인골의 평균 신장을 통해 당시의 영양 섭취 수준을 추정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여러 방법을 통해 고대인의 생활상을 유추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치아로 판독한 나이에 비해 다른 뼈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거나 두께가 얇을 경우, 인골의 주인공은 살아서 단백질 성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 두개골의 두개관 부분의 밀도를 측정하거나 눈을 감싸는 부분의 다공성 여부를 통해 빈혈 여부를 알 수 있다. 비타민D 결핍은 구루병의 흔적으로 남게 되고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골막하 출혈 흔적이나 손실된 이빨 개수를 통해 괴혈병(비타민C 부족) 여부도 추론해 볼 수 있다.치아나 뼈에 남은 흔적을 통해 생애주기 중 언제 잘 먹었고 언제 고생했는지를 유추할 수도 있다. 치아나 뼈에 나이테처럼 영양 공급 상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당·신라와 전쟁·교류하며 동북아 강국이 된 발해, 요동반도에서 연해주 북부까지 영향력 뻗쳤다
당나라의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2000여 리(里·800여㎞)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발해는 대부분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됐으며 온돌, 복식, 무덤과 축성 양식을 비롯해 제철 기술, 말 사육과 무역 등의 산업, 매사냥 등의 풍습 등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 연호를 사용하는 등 스스로 황제국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당나라 공격하며 강국으로 발돋움고왕(대조영)은 700년에 ‘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705년에는 당나라와 사신을 교환했다.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는 국제환경 속에서 당나라는 713년에 대조영에게 ‘발해군왕 홀한주도독(渤海郡王 忽汗州都督)’이란 지위를 줬다. 그런데 2대 무왕은 적극적으로 국제질서에 참여해 북으로는 흑수말갈, 서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732년 9월, 장문휴가 거느린 함대는 압록강 하구인 박작구를 출항했다. 요동반도 남쪽 해양과 묘도군도를 경유해 전광석화처럼 산둥반도 북부에 상륙한 군대는 자사(지방 감찰관)인 위준을 죽이고 등주성을 점령했다. 한편 무왕은 육군을 거느리고 거란의 도움을 받아가며 요서지방을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이때 당나라는 남쪽에서 발해를 공격하도록 신라를 압박했으나, 733년에 출동한 신라는 폭설을 핑계 삼아 도중에 철군했다. 이 승리로 발해는 강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당은 738년 등주에 발해관(渤海館: 발해 사신이 머물던 숙소)을 설치해 발해 사신단 및 승려들의 방문과 무역에 협조했다.발해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으므로, 신라는 동북 변경에 장성을 쌓았다. 발해가 신라도(新羅道)를 개통했음에도 불구하고 790년과 812년에만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인류 최초의 교역품은 비너스와 칼이었다
2008년 9월 독일 슈바벤 지역 펠스 동굴에서 3만5000년 전의 매머드 이빨에 조각된 비너스 상이 발견됐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조각품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사실 비너스 상이라고 불리는 여인의 나체상은 문자가 없던 석기시대의 문명 교류와 인류의 장거리 이동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구대륙 각지에서 발견되면서 선사시대의 글로벌화한 문화교류의 흔적으로 꼽힌다. 19세기 말엽부터 서유럽과 동유럽, 시베리아의 여러 곳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여러 형태의 여인 나체상이 발굴됐다. 학자들은 이 여인상을 여성의 원형으로 간주해 ‘비너스’라고 이름 붙였다. 동서 문명 교류를 증명하는 비너스 상동서 문명 교류사 연구자인 정수일 박사에 따르면 1882년 프랑스 브라상푸이에서 처음 유물이 출토된 뒤 펠스의 비너스가 나오기 전까지 7개 지역 19개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의 비너스 상이 다수 발견됐다. 구체적으로 레스퓌그와 브라상푸이 등 프랑스 다섯 곳에서 비너스 상이 나왔다. 이탈리아 세 곳, 독일 남부 한 곳도 출토지다. 유명한 발렌도르프 비너스 상이 나온 오스트리아 발렌도르프를 비롯해 옛 유고연방 지역 두 곳과 우크라이나 다섯 곳, 동시베리아의 코스텐키와 아브데보 등에서도 비너스 상이 발견됐다. 프랑스에서 바이칼호 연안까지 북방 유라시아 광활한 영역에 출토지가 산재해 있고 제작 연대는 보통 2만5000년에서 2만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대부분 크기가 왜소해 가장 작은 이탈리아 트라시메노 출토 비너스 상은 높이가 3.5㎝ 정도이고 가장 큰 이탈리아 사비냐노 출토품도 22㎝에 불과하다. 펠스 비너스도 높이가 겨우 6㎝다.1979년 중국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 영토와 부여의 풍속 계승한 '황제국' 발해…중국·일본 옛 기록도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서술
나라가 망해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복국(復國)의 희망을 안고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2000여 리(里·800여㎞) 길에 겪은 고생도 그렇지만, 그 마음과 꿈을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을 추진하면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변조하고, 발해를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모든 박물관, 전시관, 역사책, 교과서에서 ‘발해’를 지웠으며, 때때로 ‘발해도독부(都督府)’라고 서술한다. 첫 국호는 ‘고려’로 추정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 중국의 역사인가? 발해의 고구려 정통성과 한민족 계열성은 국호와 주민들 성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727년에 2대 무왕은 유민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국교를 수립할 목적으로 일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하이(아이누족) 땅에 표착한 24명 가운데 수령인 고제덕 등 8명만 생존했다. 갖고 간 국서(國書)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3대 문왕이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한다…’고 썼다. 일본 또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고 기록했으며(《속일본기》),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라고 불렀다. 초기에 파견한 사신단에는 유민으로 정착한 ‘고려씨’들이 포함됐고, 당시 목간이나 그릇, 파편 등에는 ‘고려’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중국과 신라 기록에는 ‘진(振·震)’ ‘발해’ ‘북국’ 등의 용어가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넘사벽' 인공지능이 사람처럼 할 수 없는 것은
옛 소련의 프로 체스선수 가리 키모비치 카스파로프는 1985년 세계 챔피언에 올라 2000년까지 최강자로 군림했다. 그런 카스파로프에게 1989년 도전자가 나타났다. 도전자는 인간이 아니라 미국 IBM이 만든 슈퍼컴퓨터 ‘딥소트’였다. 그러나 카스파로프가 두 판을 모두 이겼다. 기계가 인간 영역인 체스에서 인간을 이기기 어렵다는 게 세상의 반응이었다. IBM은 7년이 흐른 1996년 ‘딥블루’로 다시 도전해왔다. 여섯 판을 겨뤄 3승2무1패로 카스파로프가 또 이겼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재대결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빚어졌다. 카스파로프가 1승3무2패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후 몇 차례 대결에서 기계가 계속 이기자 ‘인간 대 기계’의 체스 대결은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한동안 잊혔던 ‘생각하는 기계’가 2011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슈퍼컴퓨터 ‘왓슨’이 미국 퀴즈쇼 ‘제퍼디’에서 인간 챔피언 두 명과 겨룬 것이다. 왓슨은 사람이 말하는 자연어의 소리와 의미를 이해했고, 단어의 뉘앙스까지 정확히 파악해 여유 있게 우승했다.2016년 3월 또 한 번 세기의 대결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바둑이었다. 결과는 인공지능(AI)의 승리였다. 구글이 6억달러에 사들인 영국 벤처기업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4승1패로 압도했다. 이제 기계가 넘보지 못할 인간의 영역은 없고,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가 대체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쏟아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기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일자리가 사라진 미래의 삶은 어떨까? 온갖 비관적인 질문과 잿빛 전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의사가 된 왓슨, 암 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