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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인간은 그가 먹는 것들의 총합 뼈 속에는 그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들이다.”먹고 마시는 내용은 허다한 역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은 분야지만 사실 ‘먹는다’는 것은 인간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식품이 단순한 일화에 불과한 것도 아니었다. 페르낭 브로델의 주장처럼 설탕과 커피, 차, 알코올 같은 먹거리는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이었다.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역사시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마셔왔는지는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과거 인간의 식문화를 파악해볼 수 있는 단서가 바로 뼈다. 인간의 뼈 속에는 삶의 이력이 담겨 있다. 자연스럽게 문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 삶의 모습을 유추하는 데 있어 고대인의 인골은 중요한 정보원이자 단서가 된다. 치아나 뼈에 나이테처럼 영양 공급 상태가 남아인골의 평균 신장을 통해 당시의 영양 섭취 수준을 추정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여러 방법을 통해 고대인의 생활상을 유추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치아로 판독한 나이에 비해 다른 뼈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거나 두께가 얇을 경우, 인골의 주인공은 살아서 단백질 성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 두개골의 두개관 부분의 밀도를 측정하거나 눈을 감싸는 부분의 다공성 여부를 통해 빈혈 여부를 알 수 있다. 비타민D 결핍은 구루병의 흔적으로 남게 되고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골막하 출혈 흔적이나 손실된 이빨 개수를 통해 괴혈병(비타민C 부족) 여부도 추론해 볼 수 있다.치아나 뼈에 남은 흔적을 통해 생애주기 중 언제 잘 먹었고 언제 고생했는지를 유추할 수도 있다. 치아나 뼈에 나이테처럼 영양 공급 상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당·신라와 전쟁·교류하며 동북아 강국이 된 발해, 요동반도에서 연해주 북부까지 영향력 뻗쳤다

    당나라의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2000여 리(里·800여㎞)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발해는 대부분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됐으며 온돌, 복식, 무덤과 축성 양식을 비롯해 제철 기술, 말 사육과 무역 등의 산업, 매사냥 등의 풍습 등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 연호를 사용하는 등 스스로 황제국임을 내세우기도 했다. 당나라 공격하며 강국으로 발돋움고왕(대조영)은 700년에 ‘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705년에는 당나라와 사신을 교환했다.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는 국제환경 속에서 당나라는 713년에 대조영에게 ‘발해군왕 홀한주도독(渤海郡王 忽汗州都督)’이란 지위를 줬다. 그런데 2대 무왕은 적극적으로 국제질서에 참여해 북으로는 흑수말갈, 서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732년 9월, 장문휴가 거느린 함대는 압록강 하구인 박작구를 출항했다. 요동반도 남쪽 해양과 묘도군도를 경유해 전광석화처럼 산둥반도 북부에 상륙한 군대는 자사(지방 감찰관)인 위준을 죽이고 등주성을 점령했다. 한편 무왕은 육군을 거느리고 거란의 도움을 받아가며 요서지방을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이때 당나라는 남쪽에서 발해를 공격하도록 신라를 압박했으나, 733년에 출동한 신라는 폭설을 핑계 삼아 도중에 철군했다. 이 승리로 발해는 강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당은 738년 등주에 발해관(渤海館: 발해 사신이 머물던 숙소)을 설치해 발해 사신단 및 승려들의 방문과 무역에 협조했다.발해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으므로, 신라는 동북 변경에 장성을 쌓았다. 발해가 신라도(新羅道)를 개통했음에도 불구하고 790년과 812년에만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인류 최초의 교역품은 비너스와 칼이었다

    2008년 9월 독일 슈바벤 지역 펠스 동굴에서 3만5000년 전의 매머드 이빨에 조각된 비너스 상이 발견됐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조각품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사실 비너스 상이라고 불리는 여인의 나체상은 문자가 없던 석기시대의 문명 교류와 인류의 장거리 이동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구대륙 각지에서 발견되면서 선사시대의 글로벌화한 문화교류의 흔적으로 꼽힌다. 19세기 말엽부터 서유럽과 동유럽, 시베리아의 여러 곳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여러 형태의 여인 나체상이 발굴됐다. 학자들은 이 여인상을 여성의 원형으로 간주해 ‘비너스’라고 이름 붙였다. 동서 문명 교류를 증명하는 비너스 상동서 문명 교류사 연구자인 정수일 박사에 따르면 1882년 프랑스 브라상푸이에서 처음 유물이 출토된 뒤 펠스의 비너스가 나오기 전까지 7개 지역 19개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의 비너스 상이 다수 발견됐다. 구체적으로 레스퓌그와 브라상푸이 등 프랑스 다섯 곳에서 비너스 상이 나왔다. 이탈리아 세 곳, 독일 남부 한 곳도 출토지다. 유명한 발렌도르프 비너스 상이 나온 오스트리아 발렌도르프를 비롯해 옛 유고연방 지역 두 곳과 우크라이나 다섯 곳, 동시베리아의 코스텐키와 아브데보 등에서도 비너스 상이 발견됐다. 프랑스에서 바이칼호 연안까지 북방 유라시아 광활한 영역에 출토지가 산재해 있고 제작 연대는 보통 2만5000년에서 2만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대부분 크기가 왜소해 가장 작은 이탈리아 트라시메노 출토 비너스 상은 높이가 3.5㎝ 정도이고 가장 큰 이탈리아 사비냐노 출토품도 22㎝에 불과하다. 펠스 비너스도 높이가 겨우 6㎝다.1979년 중국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 영토와 부여의 풍속 계승한 '황제국' 발해…중국·일본 옛 기록도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서술

    나라가 망해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복국(復國)의 희망을 안고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2000여 리(里·800여㎞) 길에 겪은 고생도 그렇지만, 그 마음과 꿈을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을 추진하면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변조하고, 발해를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모든 박물관, 전시관, 역사책, 교과서에서 ‘발해’를 지웠으며, 때때로 ‘발해도독부(都督府)’라고 서술한다. 첫 국호는 ‘고려’로 추정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 중국의 역사인가? 발해의 고구려 정통성과 한민족 계열성은 국호와 주민들 성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727년에 2대 무왕은 유민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국교를 수립할 목적으로 일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하이(아이누족) 땅에 표착한 24명 가운데 수령인 고제덕 등 8명만 생존했다. 갖고 간 국서(國書)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3대 문왕이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한다…’고 썼다. 일본 또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고 기록했으며(《속일본기》),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라고 불렀다. 초기에 파견한 사신단에는 유민으로 정착한 ‘고려씨’들이 포함됐고, 당시 목간이나 그릇, 파편 등에는 ‘고려’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중국과 신라 기록에는 ‘진(振·震)’ ‘발해’ ‘북국’ 등의 용어가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넘사벽' 인공지능이 사람처럼 할 수 없는 것은

    옛 소련의 프로 체스선수 가리 키모비치 카스파로프는 1985년 세계 챔피언에 올라 2000년까지 최강자로 군림했다. 그런 카스파로프에게 1989년 도전자가 나타났다. 도전자는 인간이 아니라 미국 IBM이 만든 슈퍼컴퓨터 ‘딥소트’였다. 그러나 카스파로프가 두 판을 모두 이겼다. 기계가 인간 영역인 체스에서 인간을 이기기 어렵다는 게 세상의 반응이었다. IBM은 7년이 흐른 1996년 ‘딥블루’로 다시 도전해왔다. 여섯 판을 겨뤄 3승2무1패로 카스파로프가 또 이겼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재대결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빚어졌다. 카스파로프가 1승3무2패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후 몇 차례 대결에서 기계가 계속 이기자 ‘인간 대 기계’의 체스 대결은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한동안 잊혔던 ‘생각하는 기계’가 2011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슈퍼컴퓨터 ‘왓슨’이 미국 퀴즈쇼 ‘제퍼디’에서 인간 챔피언 두 명과 겨룬 것이다. 왓슨은 사람이 말하는 자연어의 소리와 의미를 이해했고, 단어의 뉘앙스까지 정확히 파악해 여유 있게 우승했다.2016년 3월 또 한 번 세기의 대결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바둑이었다. 결과는 인공지능(AI)의 승리였다. 구글이 6억달러에 사들인 영국 벤처기업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4승1패로 압도했다. 이제 기계가 넘보지 못할 인간의 영역은 없고,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가 대체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쏟아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기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일자리가 사라진 미래의 삶은 어떨까? 온갖 비관적인 질문과 잿빛 전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의사가 된 왓슨, 암 진단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제 유민, 대한해협 건너 일본국 탄생에 큰 역할…일본 일왕가와 혈연관계 깊어지고 문화발전에 기여

    고당(高唐)전쟁에서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 유민들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신라로 망명해 대당(對唐)전쟁에 합류했던 부류는 신라인이 됐고, 북만주나 동만주 일대 오지로 탈출한 유민들은 거란·선비·말갈 등 방계종족들에 동화되고 말았다. 또 한 무리는 이미 진출해 교류했던 일본열도로 건너갔다.한편, 나라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고구려인들도 있었다. 이정기 일가는 청주, 서주 등 산둥반도와 장쑤성(江蘇省) 일대에 제나라를 세운 후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며 54년 동안 발전했다. 또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서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성장했다. ‘보트피플’ 백제 유민 일본으로 건너가그럼 백제 유민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까? 660년 8월, 실정과 오만으로 저항 한 번 못한 채 항복한 의자왕과 대신들 그리고 죄없는 병사들 1만2800명은 배에 실려 당(唐)으로 끌려갔다. 의자왕과 왕자들, 일부 대신은 당나라의 벼슬을 받았으나, 복국군의 임금으로 고구려로 망명했던 부여풍은 붙잡혀 영남(廣東·廣西지방)으로 귀양가서 죽었다. 산둥지역에 버려졌던 백성들은 다시 요동으로 이주당했다. 한편 주류성 전투와 백강(백촌강)해전에서 대패한 복국군은 “어찌할 수 없도다. 백제의 이름은 이제 끊어졌고, (조상)묘소에도 갈 수가 없구나…”(《일본서기》)라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과학에도 경제원리가 작용할까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출신 천문학자 겸 가톨릭 사제였는데 평생 지동설을 연구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에는 망원경이 변변찮아서 육안으로 천체를 관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지동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게 아니라 직관적인 철학에 가까웠고 허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지동설에 도달한 과정은 칸트가 훗날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 명명했듯이 근대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 의심을 품은 것은 지구를 우주 중심에 두면 금성 화성 등의 궤도가 찌그러지고 오락가락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행성이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는 원리에 위배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기본 전제를 180도 뒤집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즉 우주의 중심에 지구 대신 태양을 둔 것이었다.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도는 것으로 계산해본 결과 천동설의 모순이 명쾌하게 해소되었다.‘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14세기부터 서서히 형성된 합리적 의심과 논리적 사고의 연장선이다. 그 단초가 된 추론법이 ‘오컴의 면도날’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14세기 영국 논리학자인 윌리엄 오컴이 신학 논쟁에서 펼친 논리 전개 방식에서 유래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이 최선에 가깝다는 의미다.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한 것이 최선’이라는 점에서 ‘사고 절약의 원칙’ ‘경제성의 원칙’이라고도 부른다. 길을 구불구불 돌아가는 것보다 직선으로 가는 게 빠른 것처럼, 인류가 오랜 기간 축적한 경험 법칙을 논리 철학에 적용한 것이다.오컴의 면도날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티베트 등 아시아 각지로 흩어진 고구려 유민…불모지 개척, 접경세력과 전투에 이용당했다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군대가 전투에서 패하고, 정부가 괴멸하고, 지배계급이 파멸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단순히 삶이 비참해지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파멸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선조들처럼 명예를 간직한 채 역사에 남았고, 자의든 타의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유민(流民)’이라는 신분으로 살육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또 자발적으로 망명하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부활에 성공했다. 한민족의 슬픈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다. 요동지역 고구려인 2만명 이하로 줄어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