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최초의 인플레이션이 미친 충격 (下)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스페인 사람들은 1550년대에 15만 명에 달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대량 유출이었다. 동시에 식료품 가격이 급등했다. 당대의 스페인 농학자 알론소 데헤레라는 “양고기 1파운드 가격이 예전 양 한 마리 가격에 육박하고, 빵 한 덩이가 밀 1파네가(17.21킬로그램)와 가격이 같다”며 “기름 1파운드(0.4535킬로그램) 가격이 예전 기름 1아로바(12.5킬로그램) 가격 수준”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이웃 프랑스 국왕인 샤를 9세도 1560년에 “선대에는 매일 먹을 고기가 넘쳐났고 와인이 물처럼 흘렀지만 지금은 값이 올라 구하기 힘들다”고 푸념했다. 동유럽 폴란드에서도 비슷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이런 배경 아래 미셸 모리노 같은 학자는 17세기에 16세기보다 귀금속이 유럽에 더 들어왔는데도 17세기에 인플레이션이 완화됐고, 18세기에는 브라질의 금과 멕시코의 은 등 다량의 귀금속이 들어왔는데도 물가 상승이 심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귀금속 대량 유입에 따른 물가인상설에 이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아무튼 갑작스럽게 유입된 부(富), 그것도 인디오 노예 노동이라는 남의 손을 빌려 값싸게 얻은 재화라는 외부 환경 변화는 잠재돼 있던 인간의 욕망을 건드렸다. ‘게으름’이라는 존재를 당당하게 수면 위로 부각시킨 것이다. 포토시 은광에서 전대미문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규모로 은이 계속해서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낙관에 빠졌다. “오늘 돈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일 남미에서 돌아온 함대가 세비아에 정박하기만 하면 다시 엄청나게 풍족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계획을 세우고, 저축하고, 힘들여 일할 까닭이 없었다. 모두 생산성 향상에 힘쓰기보다는 수입으로 손쉽게 문제를 해결했다. 사람들은 근면과 인내라는 덕목을 잃어버렸다.
투기도 심심찮게 목격됐다. 곡물 가격이 오르는 것은 종종 농업 생산의 매출이 늘어나는 것으로 인식됐다. 이는 일부 지역에서 농업을 매력적인 산업으로 만들기도 했다. 수익을 늘리기 위해 경작지를 확대했고, 농부들은 돈을 빌려서 토지를 늘렸다. 농장 구입을 위한 모기지 대출에 이자를 부담하면서 토지는 투기의 대상으로 변했다. 때론 농부들의 토지 매입에 빌려주는 자금의 이자가 연 50%에 달하면서 부자와 성직자, 귀족 등이 농민 대부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곡물 가격이 오를 동안에는 농부들도 견딜 만했지만 곡물가가 급락하거나 하락하면 이자도 갚기 힘든 상황에 빠지곤 했다. 그 결과 토지를 빼앗겨 대농장(라티푼디아)으로 귀결되고는 했다.
농업 환경 변화는 정부에도 부담이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작물은 밀이었다. 주식이 빵이었기 때문이다. 카스티야 지역은 풍년이 들 경우 잉여 곡물을 수출할 정도의 생산력을 지녔지만 16세기 들어선 풍년의 빈도는 계속 줄었다.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등으로부터 들여오는 식량의 외부 의존성은 커져만 갔다.
대책으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는 밀의 가격통제에 나섰다. 밀의 최고가격은 정부에 의해 고정됐다. 1502년 이후로는 흉작의 시대였고 최고가격제도 유지됐다. 1512~1539년은 상대적으로 농업 생산이 양호했다. 하지만 1539년 흉년이 연속되면서 가격통제 정책에 변화가 왔다. 1500년대 후반부는 지속적으로 곡물 가격이 오르고 사람들이 이에 불평하는 시대가 됐다. 1550년 이후에는 양모 가격도 급등하면서 양모 판매가 크게 줄었다. 1552년부터 1563년 사이에 사육하는 양의 숫자가 20%나 감소했다.
당시 유럽 대륙의 물가 상승을 모두 신대륙 귀금속 유입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합리적이지 않다. 기술 발전에 따른 효과도 분명히 있었다. 예를 들어 장보댕이 기록한 것처럼 비단은 16세기에 대중화하면서 가치가 떨어졌다.
전반적으로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서 스페인 사람들에게 저축한 돈은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힘들여 키운 곡물 가격은 예측하기 힘들었다.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합리적인 경제행위였다. 비록 오늘 굶더라도 내일은 풍족하게 먹고 앞으로 힘들여 노동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 일종의 생활 수칙처럼 됐다.
결론은 비극이었다.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간다고 했던가. 남미 포토시 은광의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스페인에 남은 것은 산업의 공동화와 무기력이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패배한 것은 이 같은 분위기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최초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그렇게 반짝이는 귀금속의 광채 속에 허우적거리다가 스러져갔다. NIE 포인트 1. 재화를 값싸게 얻으면서 유럽의 경제주체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본문에서 찾아보자.
2. 정부가 재화의 가격을 통제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
3. 산업공동화 현상의 발생 원인과 파급효과에 대해 학습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