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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해리 포터와 연금술, 미신일까 과학일까?
조앤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는 1997년 출간된 이후 20년간 세계 67개의 언어로 총 4억5000만 부가 팔렸다. 시리즈물 사상 세계 최대의 베스트셀러다. 등장인물이나 에피소드, 상황 설정 등은 단순히 작가가 공상해서 만든 게 아니다. 영국에서 내려오는 전설, 북유럽 신화와 고대·중세의 연금술, 고딕소설, 모험담 등이 작품에 두루 녹아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이해하려면 연금술을 빼놓을 수 없다. 1편 부제인 ‘현자의 돌(마법사의 돌)’은 연금술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현자의 돌이란 용어는 4세기에 그리스 테베의 조시모스가 처음 언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대체 연금술은 무엇이고 현자의 돌은 또 뭘까?연금술은 근대과학이 정립되기 이전 단계의 과학과 철학적 시도를 총칭하는 것이다. BC 2000년께 고대 이집트에서 불과 금속을 다룬 ‘불의 사제’가 그 유래다. 이들의 솜씨는 파라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같은 화려한 이집트 장식물에서 보듯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 이집트의 연금술은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로 전파되었다. 고대 연금술사들은 기술의 신인 이집트의 토트와 그리스의 헤르메스를 숭배했다. 연금술은 6세기 동로마제국을 거쳐 8세기 이슬람권에 전해졌다. 이슬람의 오랜 지배를 받은 스페인과 시칠리아, 십자군원정 등을 통해 연금술은 중세 유럽에도 전파됐다.연금술은 특히 아랍에서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우마이야 왕조 때 이슬람권 최초의 연금술사로 꼽히는 칼리드 왕자는 연금술 연구를 위해 왕위조차 거부했을 만큼 아랍은 연금술에 관심이 많았다. 연금술은 화금석, 즉 현자의 돌을 찾는 과정이었다. 명칭은 돌이지만 실제로 돌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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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수 대체한 당, 주변국 복속하며 중화중심 체제 노려…내분 휩싸인 고구려, 당과 백제·신라 연결 차단 주력
말을 타고 고구려 영토를 질주하면서 고구려인이 돼가던 나는 요동으로 건너가 안시성을 찾았다. 산 위로 올라가 점장대 자리에서 성안의 골짜기와 멀리 산들을 바라보던 중 두 단어가 떠올랐다. ‘기적’ 그리고 ‘자유의지(free will)’였다. 둘레 4㎞에 불과한 이 산성에서 당 태종이 지휘하는 최강의 10여만 대군을 패퇴시켰다니…. 고립무원의 상황 속에서 패배할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은 싸움인데도 항복을 거부한 그들, 90일간 극도의 공포를 이겨내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인 고구려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지닌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주변국 무릎 꿇리는 당나라고·수(高·隋) 전쟁에서 대패한 수나라는 곧 자체 분열됐다. 수를 대체한 당나라는 종주권 회복, 중화중심의 체제 완결이라는 중국적인 숙명도 계승했다. 대운하를 이용해 남북을 하나의 상권과 경제권으로 발전시켰다. 수도인 장안에는 페르시아인들,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망을 확장했고, 남쪽에서는 인도, 아라비아까지 해양 실크로드가 활성화됐다. 당 태종은 외교술로 북방 초원의 강국인 돌궐제국을 동서로 분열시켰고, 약화된 동돌궐을 복속시켰다(630년). 이어 서남쪽의 강국인 토번(티베트 지방)을 공격했고(639년), 문성공주를 시집보냈다.서쪽에서는 비잔틴제국까지 이어진 무역망을 확보할 목적으로 고창국(신강성의 투루판 지역)을 멸망시켰다(640년).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 사마르칸트시)은 627년부터 조공사절을 보냈고, 바르후만왕은 ‘강거도독’이 됐다. 석국(타슈켄트) 안국(부하라) 등 소국들도 당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였다. 또 중간지역인 요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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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초고속 시대에 느리게 살기가 가능할까
1995년 9월, 미국에서 연쇄 폭발물 테러가 벌어진 뒤 언론사에 익명의 우편물이 날아들었다.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의 선언문이었다. 동시에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 주요 정치인 등도 테러 협박 편지를 받았다. 선언문의 서두는 이랬다.“산업혁명의 결과는 인류에게 재앙이었다. 그 덕에 선진국에 살고 있는 우리의 평균 수명은 크게 늘어났지만 사회는 불안정해졌고, 삶은 무의미해졌으며, 인간의 존재는 비천해졌다.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글의 요지는 무분별한 개발과 산업화에 반대하며 이를 막기 위한 세계적인 혁명이 실현된다면 자신의 테러 행위를 끝내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선언문이 17년간 오리무중이던 테러범의 꼬리를 잡는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 시민이 신문에 실린 글이 자기 형의 문체와 비슷하다고 제보해왔다. 이를 단서로 FBI는 1996년 4월, 북부 몬태나주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테러범을 체포했다.그가 ‘유나바머’로 알려진 전직 수학 교수 시어도어 존 카친스키였다. 그가 폭발물을 보낸 곳이 주로 대학교와 항공사여서 언론이 두 단어의 앞 글자(Un+A)에 폭파범(Bomber)을 붙여 지은 별명이다. 그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총 16회의 우편물 폭탄 테러로 사망 3명, 중경상 23명의 피해를 입혔다. 기술 문명을 거부하는 반문명카친스키의 악행도 놀랍지만,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그가 엄청난 인텔리라는 점이었다. 1942년 시카고의 폴란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카친스키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고등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하버드대와 미시간대에서 수학 박사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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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치밀한 준비로 수나라와 16년 전쟁 승리한 고구려…동아시아 종주권 확고히 하며 위상 한껏 드높여
서기 598년, 고구려가 요서지방을 공격하면서 수나라와 ‘고·수(高·隋)전쟁’의 신호탄이 올랐다. 이후 ‘고·당(高·唐)전쟁’을 거쳐 신라가 참여한 이른바 ‘삼국통일전쟁’까지 지속됐다. 전쟁의 목적과 진행 과정, 결과 등을 보면 몇 단계로 구성된 ‘70년 전쟁’이었다. 한륙도(한반도와 만주 포함)·중국·일본열도·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가 포함된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레이트 게임이었다.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그 주변에 백제·신라·왜·말갈·거란 등의 소핵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다원적인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6세기 말에 동아시아는 중국을 통일(589년)한 수나라와 튀르크제국, 고구려의 삼각구도로 재편됐다. 400년 만에 중국을 장악한 수나라는 정치·경제적 통일을 추진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해 중화 종주권 탈환에 나섰고 고구려도 신흥 강국들과 경쟁·대결이 불가피했다. 수나라 공격 막은 요동성 성주 강이식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모든 국가와 종족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국제대전이 본격 터졌다. 612년, 수양제가 이끄는 113만여 명의 다국적 군대가 북경 근처 탁군을 출발했고, 그 두 배에 달하는 보조 인력이 동원됐다. 총 24군 편제인데, 11군은 수군으로 작전범위가 압록강 하구, 평양, 한강유역까지였다. 출항한 배의 행렬이 수백 리에 걸쳐 늘어설 정도였다. 육군을 지휘한 수양제는 요하 도하작전을 어렵게 성공시킨 뒤 요하전선의 몇몇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부(副)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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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미래 노동시장,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까
영어권 사람들은 딱딱한 경제 용어를 색깔을 넣은 비유적 표현으로 바꿔 쓰는 경우가 흔하다. 이를테면 해고 통지서를 뜻하는 핑크슬립, 행정 편의주의를 비유한 레드테이프, 간단히 점심을 먹으며 하는 브라운백미팅 같은 것이 그런 예다. 이런 언어 습관은 노동 형태를 구분할 때도 널리 이용된다. 흰 셔츠를 입는 사무직을 화이트칼라, 푸른 계통의 작업복을 입는 생산직을 블루칼라로 구분하는 것은 기본이다.하지만 오늘날 기업에서는 이런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노동이 생겨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그레이칼라다. 공정이 자동화·첨단화되면서 생산직도 반복적인 노동이 아니라 전문 지식과 기술을 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높은 교육 수준과 고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관리와 생산을 동시에 수행하는 사람이 필요해졌다. 이들이 그레이칼라다. 보통 엔지니어를 말한다. ‘정글의 법칙’과 하루 8시간 근무TV 프로그램인 ‘정글의 법칙’을 보면 어디를 가나 출연자의 일과가 비슷하다. 하루 종일 먹거리를 찾아 헤매고, 불을 피우고, 잠잘 곳을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인류는 대부분 먹고 사는 데 하루를 바쳤다. 수렵·채집시대와 농경시대는 물론 18세기 근대까지도 생산의 원천은 ‘근육’이었다.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사람과 동물의 근육에 의존해 단순재생산을 되풀이했다.이런 쳇바퀴 도는 삶에서 벗어난 것은 19세기 이후 기술문명의 비약적인 발전 덕분이다. 생산의 원천이 인간의 근육에서 기계로 바뀌며 획기적인 확대 재생산이 일어났다. 기계를 통한 생산성 향상은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레저라는 말은 근대까지도 귀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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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신사의 나라' 영국, 젠트리는 진짜 신사일까
신사를 뜻하는 젠틀맨은 양복에 넥타이를 맨 점잖은 남자를 연상하게 하지만 본래 영국의 신분 계급 중 하나였다. 작위가 있는 귀족 바로 아래의 중간계급을 분류할 때 영지 규모가 가장 작은 사람이 젠틀맨이었다. 어원은 옛 프랑스어로 귀한 집안 출신을 뜻하는 ‘gentil’이다. 젠트리는 공작·백작 등의 귀족과 평민 사이에 위치했다. 젠트리는 귀족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가문의 휘장을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지주뿐 아니라 법률가, 성직자, 의사 등 전문직과 부유한 상인까지도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 실질적인 사회 엘리트였으며 역사적으로 영국의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시대가 흘러 젠트리의 계급적인 개념은 희석되고, 이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 젠틀맨이 귀족을 포함한 상류 계층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현대의 젠틀맨은 ‘교양 있고 예의 바른 남성’을 지칭하는 일상용어다. 농업국가에서 상공업국가로 성장한 영국젠트리는 16세기에 본격 등장했다. 중세가 끝나가던 당시 영국에서는 토지 소유와 신분 계급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권력층인 상층 귀족이 쇠퇴하고 농업과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중간 계층이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15~16세기에 일어난 1차 인클로저운동은 양모를 공급할 양을 사육하기 위해 지주들이 농지나 휴경지, 공동경작지 등 자신의 땅에서 농민을 내쫓고 울타리를 친 것이다. 농사지을 땅을 잃은 농민들은 실업자로 전락하고 도둑이나 거지가 되기도 했다.인클로저운동은 중세 장원경제의 붕괴와 새로운 사회·경제 주역의 탄생을 알린 변곡점이었다. 농업 위주였던 영국은 16세기 들어 해외 식민지 건설, 해상무역과 모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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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남·북 중국, 유연, 고구려 등 세력균형 이룬 동아시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청나라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은 조선의 개항과 멸망, 식민지화를 초래했다. 20세기 중반 미국과 소련이 치른 그레이트 게임은 한민족의 분단과 비극적인 6·25전쟁을 몰고왔다. 최근엔 미국과 중국 간에 ‘새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서기 598년,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병(또는 거란병) 1만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했다. 《수서(隋書)》의 또 다른 기사는 이 공격에서 고구려가 해양방어시설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곧 30만의 수륙군으로 반격했으나 육군은 역병이 창궐해 요하전선을 넘지 못했다. 한편 래호아가 지휘하는 6000명의 산동수군은 평양성을 향해 출항했지만 폭풍우를 만나 배들이 표몰됐고,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고 한다(《수서》). 하지만 기상조건들을 분석하면 장산군도 등에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에 막히고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70년 전쟁의 신호탄 ‘고·수전쟁’이렇게 ‘고·수(高·隋)전쟁’의 신호탄이 올랐고, ‘고·당(高·唐)전쟁’을 거쳐 신라가 참여한 이른바 ‘삼국통일전쟁’까지 지속됐다. 전쟁의 목적과 진행과정, 결과 등을 보면 몇 단계로 구성된 ‘70년 전쟁’이었다. 한륙도(한반도와 만주 포함)·중국·일본열도·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가 포함된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레이트 게임이었다.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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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신라의 화랑, 충성·용기·우애 갖춘 인재 양성제도…자유의지와 사명감으로 삼국통일 위업 달성 앞장
신라의 화랑은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화랑은 ‘풍월도’를 수행하는 젊은이 집단이다. ‘화랑도’는 일본 학자 미지나 아키히데가 만든 조어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576년) 봄에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미 풍월주가 있었다. 신채호나 최남선 등의 견해를 고려하면 원조선을 계승하면서 건국 초부터 비슷한 조직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5세기부터 고구려 문화와 ‘조의선인(고구려의 수행자 군사집단)’ 등의 영향을 받으며 구체화되고, 질적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강국의 기초 ‘화랑’최치원이 쓴 《난랑비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많은 생명과 만나 변화를 이룬다. 들어와서는 집안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 그들은 ‘하늘(天)에 대한 맹세’를 하고,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혼란하면 가히 맹세를 행한다’는 내용을 돌에 새겼다(임신서기석). 또 승려인 원광은 7세기 초, 위기 상황에서 화랑의 역할을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정의했다. ‘충과 효’라는 국가의 가치관과 ‘우애와 용기’라는 사회적 가치관, 그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인간상을 구현하는 ‘청년결사체’를 지향한 것이다.차세대 리더들인 화랑은 왕 또는 고승이 추천한 왕족이나 귀족 자제들이었다. 각각 수백 명에서 1000명 정도의 낭도를 거느렸다. 그들은 독특한 수행 방법을 지녔다. 《삼국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