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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중세 유럽에서 맥주 제조를 권장한 이유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뮌헨에서는 해마다 9월 말~10월 초에 2주간 옥토버페스트가 열린다. 옥토버페스트는 독일어로 ‘10월의 축제’라는 의미다. 1810년에 시작된 세계 최대의 민속 축제이자 맥주 축제로 유명하다. 맥주 종주국답게 독일의 옥토버페스트를 즐기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한 해에 600만~700만 명이 몰려든다.옥토버페스트는 독일 연방에 속하는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왕자와 작센 공국의 테레제 공주가 1810년 10월 12일 뮌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주일간 축하연을 연 것이 그 유래다. 나폴레옹전쟁 시기에 띄엄띄엄 열리다 1819년부터 뮌헨시 주최로 연례행사가 됐다. 200년 동안 1·2차 세계대전 등 전쟁과 전염병 확산 등으로 24차례 열리지 못했고, 1980년에는 폭탄테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독일의 관광 명물로 자리잡았다. ‘즐거움 그것은 맥주, 괴로움 그것은 원정’맥주는 영어로 beer다. 독일어 Bier, 프랑스어 biere, 이탈리아어 birra와 비슷하다. 맥주의 어원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문명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 언어로 빵죽을 뜻하는 바피르(bappir). 둘째, 고대 게르만족 언어로 보리 곡물을 가리키는 베레(bere). 셋째, 라틴어로 마신다는 의미의 비베레(bibere)가 그것이다. 라틴어로 맥주는 ‘케르비시아’이다. 케르비시아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곡물, 대지의 여신 케레스에서 온 명칭이다. 중세에 갈리아인이 집집마다 만든 곡주인 세르부아즈, 스페인어로 맥주를 뜻하는 ‘세르베사’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맥주를 보리로 만들었고 고대부터 즐겨 마셨으니 어원이 이해가 되지만 수메르어로 빵죽이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기원전 3세기 한민족 이주로 '한민족 체제'였던 대마국

    고대에 우리 민족사의 영역에는 복잡한 성격의 해양소국이 있었다. 대마국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대마도는 누구의 영토였는가?” “누구의 역사였는가?” 한·일 관계는 시작할 때부터 복잡했고, 역사가 진행될수록 숙명적으로 변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상대방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短刀)’(K. W. J. Mekel 주장), 연결하는 ‘다리’라는 상반된 역할을 한 곳이 대마도다. 부산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대마도대마도는 남북이 72㎞, 동서가 16㎞, 면적이 714㎢인 비스듬히 누운 고구마꼴이다. 제주도의 3분의 2, 거제도의 2배, 울릉도의 10배에 달하는 큰 섬이다. 부산에서 약 53㎞, 거제도에서는 80여㎞ 거리로 날씨가 맑으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에서 이키섬까지 약 53㎞, 다시 규슈까지는 20여㎞다. 따라서 대마도를 징검다리처럼 이용하면 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다. 1노트 내외로 북동진하는 대한난류(쓰시마해류)와 낙조(썰물)의 영향으로 유속은 3노트 이상이 된다. 거기다가 계절풍까지 활용한다면 상호 간 교류는 어렵지 않다. 나는 1983년 8월 ‘해모수’라는 뗏목을 만들어 거제도를 출항했는데, 대마도 북쪽 사고(佐護)까지 불과 4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광의의 ‘한민족 체제’에 속해대마도의 고시다카(越高) 유적지에서는 약 6500년 전의 융기문 토기들이 발견됐다. 가토(加藤) 해상유적지에서도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됐다. 한편 부산의 동삼동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죠오몽 토기와 흑요석제 도구들이 나왔고, 근래 여수의 안도 패총에선 규슈산 흑요석이 발견됐다. 이렇게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대마도를 중간기지로 삼아 수천 년 동안 자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보험과 주식거래가 이루어진 곳, 커피하우스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북동부 에티오피아이고 인공재배를 시작한 곳은 아라비아반도 남서부 예멘이다. 예멘과 에티오피아는 홍해를 사이에 둔 경쟁 관계였다. 6세기에 에티오피아가 예멘을 지배해 자연스레 커피가 전파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쯤 커피가 아라비아반도의 메카, 제다 등지로 전파됐지만 이슬람권 전역에서 유행한 것은 15세기 들어서다. 아랍어로 커피를 가리키는 ‘까흐와’는 술을 뜻하기도 한다. 술이 금지된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는 일종의 비약(秘藥)이자 와인 대체재로 여겨졌다.처음에는 커피를 으깨서 환약 형태나 빵에 발라 먹었다. 생두를 볶아 따뜻한 물에 넣어 마신 것은 13세기 들어서다. 커피는 수도자의 졸음방지제, 의사의 치료제에서 점차 부유한 이들의 사치품으로 변했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지금처럼 로스팅한 원두를 갈아 물에 타 마셨다. 커피는 이슬람권에서 고수익 상품으로 거래됐는데, 이슬람식 커피하우스 ‘카베 카네스’가 생겨나 일반인도 쉽게 커피를 즐기게 된 것이다. 교황의 세례를 받은 커피 ‘기독교도 음료’가 되다오스만제국은 1536년 예멘을 점령한 뒤 모카항을 통해 커피콩 수출에 나섰다. 커피를 모카에서 이집트의 수에즈까지 배로 보내면 낙타에 실어 알렉산드리아로 가져간 뒤, 베네치아나 프랑스 상인들에게 팔았다. 모카가 커피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배경이다.유럽에서는 커피를 이교도나 마시는 ‘사탄의 음료’ ‘악마의 유혹’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중동, 이집트를 여행하며 커피를 맛본 유럽인이 차츰 늘고, 의사와 식물학자가 커피의 효능을 인식하면서 거부감은 옅어졌다. 일설에는 가톨릭 사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탐라, 유구국 등 아시아 남방지역과 활발한 교류…당나라 거주 신라인들의 경유지 역할 했을 수도

    해양 소국 탐라(耽羅)는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탐라는 고구려와도 연관을 맺었다. 《위서(魏書)》에는 문자왕 때 북위에 파견된 사신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珂·진주라는 설)는 섭라(제주도)에서 생산됐는데, ‘가’는 백제가 점령해 못 보낸다”고 변명하는 내용이 있다. 또 제주의 삼성신화(三姓神話)를 수록한 《영주지(瀛洲志)》에는 시원신화를 소개하면서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솟았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실린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는 고씨가 고구려에서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주도와 고구려는 경제적인 교류는 물론 주민들 이동도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에 항복…801년 이후 국가 관련 기록 없어탐라는 신라와는 비교적 늦게 관계를 맺었다. 《영주지》에는 고을나의 15대 손인 고(高)씨 3형제가 신라에 입조해 왕에게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662년에 탐라국주가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신라와 교섭을 벌였지만, 801년을 끝으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장보고를 비롯해 당나라에 거주했던 ‘재당 신라인’들은 일본을 오고갈 때 제주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키나와와 교류해 주목탐라는 일본 열도와도 교섭이 활발했다. 《영주지》에 따르면 3성혈에서 나온 ‘고·양·부’ 3인과 결혼한 삼신녀는 일본으로 알려진 동해 벽랑국에서 왔다. 661년 5월에는 왕자인 아파기 등이 왜국에 공물을 바쳤고, 665년부터 693년까지 빈번하게 사신단을 파견했다. 또 저장성 해안을 출항한 4차 일본 견당선이 표류 끝에 일부

  • 역사 기타

    '퍼스트 펭귄'이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까닭

    새로운 분야에 최초로 진출한 기업은 시장을 선점하고, 후속 경쟁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독점적인 이익을 누리게 마련이다. 선발자는 경쟁자의 싹을 꺾기 위해 공급 확대, 가격 인하 등으로 진입 장벽을 높일 수도 있다. 경영학에서는 이를 ‘선발자의 이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발자가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다. 선발자는 문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선발자가 독점 이익을 누리기도 전에 후발자가 진입하면 오히려 그동안 투입한 비용을 제대로 못 건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선발자의 불이익’이라고 한다.선발자가 겪게 되는 이익과 불이익의 양면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퍼스트 펭귄’이다. 남극에 떼 지어 사는 무리가 먹이를 구하려면 무조건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 바닷속에는 바다표범, 범고래 등 천적들이 즐비하다. 이때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펭귄이 ‘퍼스트 펭귄’이다. 이런 개념을 주창한 랜디 포시 미국 카네기멜론대 교수는 퍼스트 펭귄을 불이익과 고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보상이 따르는 도전정신으로 설정했다. 영국이 겪은 ‘선두주자의 벌금’대항해시대에 앞장서 먼바다로 나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향신료 무역에서 오래도록 선발자의 이익을 누렸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지중해 바깥세상을 알지 못할 때, 두 나라는 세계를 양분했을 만큼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두 나라는 식민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은과 향신료에 취해 현실에 안주하며 서서히 쇠퇴했다.뒤이어 18세기 후반에 영국이 세계의 선두 주자로 올라섰다. 방적기,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 산업혁명을 통해 유럽 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탐라, 대륙과 해양 연결하는 물류망 거점 역할

    우리 역사에서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국제적인 나라가 있었다. 독특한 가치를 지녔던 해양 소국 탐라(耽羅)다. 고려 후기 삼별초 세력이 최후의 항전을 펼쳤으며, 뒤따라 들어온 몽골인들이 말을 사육하면서 속지로 삼았다. 바다를 소외시킨 조선에서는 유배지로 사용되면서 기피의 땅이 됐다. 현대에 들어와 발생한 비극들은 아직 치유가 덜 됐다.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지 않더라도 해륙적인 관점에서 제주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인터체인지에 있다. 몽골과 북만주, 랴오둥반도, 산둥반도에서 육지와 해안, 짧은 서해를 이용해 한반도에 닿은 후, 추자군도를 중간에 두고 100㎞ 정도 건너면 상륙할 수 있다. 중국의 저장성, 푸젠성에서 해류와 서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하고, 또 동남아시아에서는 흑조(구로시오)에 올라타고, 봄철에 부는 남서계절풍을 이용해 오키나와를 거쳐 동북상하면 제주도에 닿는다. 물론 고려나 조선시대의 표류 기록들에 나타나듯 반대의 현상도 있었다. 中·日·삼한과 활발하게 무역제주도에서 대마도(쓰시마섬)까지는 대략 255㎞로 멀지만, 항해 조건은 좋은 편이다. 북부의 사고 마을에 보존된 ‘오카리부네’는 제주도의 ‘테우’와 같은 종류의 뗏목이다(정공흔 설). 규슈 서쪽의 고토열도는 근대에도 뗏목을 타고 오갔을 정도로 밀접했다. 2003년 대포항을 출항한 뗏목 장보고호는 폭풍 속에서 표류했는데도 13일 만에 나루시마에 안착했다. 해발 1995m인 한라산은 시인거리가 약 160여㎞이므로, 원양 항해하는 선박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동서 73㎞, 남북 41㎞에 면적이 1845㎢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주하면서 교류하기에 좋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 대마국과 해양·무역권 다퉜던 우산국…신라, 우산국 확보 힘입어 북진정책 '성공'

    신라가 우산국을 복속시킬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우산국은 작지만 바다에서는 힘이 셌고,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우산국을 노략질하자 우해왕은 수군으로 원정을 감행했다. 겁먹은 대마국왕은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셋째 딸인 풍미녀를 바쳤다. 우해왕은 왕비로 삼은 풍미녀의 변덕과 사치를 위해 신라까지 노략질했으며, 정치를 게을리했다. 심지어는 신라가 공격한다는 정보를 보고한 신하까지 바다에 처넣었다. 섬사람들은 풍미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근심에 빠졌다. 결국 몇 해 뒤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울릉문화》).비록 설화지만, 우산국이 단순한 어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동해의 해양소국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권과 무역권을 놓고 동해와 남해에서 대마국과 충돌한 상황도 추측하게 한다. 실제로 그 무렵인 544년에는 연해주 해안에 살던 숙신인(여진 계통)들이 봄과 여름에 사도섬(니가타현)에서 어업을 했고, 이후에도 대화 없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침묵교역’도 벌였다(《일본서기》). 동해에서도 원양항해가 활발했던 것이다. 해양전략적 가치 큰 요충지그 뒤 신라는 동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우산국은 해양전략적인 가치가 컸다. 항복한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지만 해양문화의 메커니즘과 국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인 힘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6세기 중엽부터 만든 100여 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경상도의 영향을

  • 역사 기타

    양념이 어떻게 금보다 비쌀 수 있을까

    인류가 향신료를 이용한 것은 BC 3000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메르의 기록에 향신료와 허브에 관한 내용이 있다. 고대 이집트는 미라의 방부 처리에 여러 가지 향신료를 사용했다. BC 1224년 사망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미라의 코에서 후추 열매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 영생과 부활을 기원한 것이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라는 점에서 당시에도 인도와 이집트 간에 교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향신료는 적은 양으로도 고기의 풍미를 확 바꿔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부패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향신료를 약재로 이용했다. ‘향신료의 왕’으로 불린 후추는 화폐로도 통용되어 세금 납부나 뇌물 수수에 이용되었다. 현금처럼 다 되는 후추향신료는 매우 다양하다. 고추 생강 마늘 겨자 파 부추처럼 향이 나고 매운 식물은 모두 향신료로 분류된다. 식물의 잎, 꽃, 열매, 줄기 등 다양한 부위에서 얻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주목받은 열대식물인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를 이르러 ‘4대 향신료’라고 한다. 후추와 계피는 지금도 흔하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다. 정향은 향신료 중 유일하게 꽃봉오리에서 얻는데 꽃봉오리의 생김새가 한자 ‘丁(정)’자를 연상시켜 붙여진 이름이다. 치약이 없던 시절에 주로 구취 제거, 치통 완화, 감기약 등으로 쓰였다. 육두구는 20m까지 자라는 육두구나무 열매의 씨앗이다. 영어로 ‘nutmeg’는 ‘사향냄새가 나는 호두’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장을 보호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어 중국에서는 BC 2000년께부터 쓰였다.4대 향신료는 원산지와 주된 수요처 간 거리가 멀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