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진짜 귀족의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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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역사에서 귀족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귀족의 어원이 된 라틴어 노빌리스(nobilis)는 ‘고귀한’이란 뜻의 형용사로 ‘사회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월함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노빌리스란 단어가 ‘고귀한’이라는 뜻 외에 ‘평판이 좋다’라는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귀족을 가름하는 기준은 자명해진다. 바로 평판이 좋은 집단을 가리켰던 것이다.

귀족이란 평판을 얻기 위해선 귀족의 혈통과 미덕은 물론 ‘귀족다운 삶’의 방식을 좇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귀족의 영지를 구입하고, 상업을 포기하고, 검을 차고, 방패와 투구에 문장을 사용하고, 이웃의 혈통 좋은 다른 귀족과 친교를 맺어야만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준 없이 말이 근거가 되는 평판을 통해 귀족과 귀족이 아닌 것이 구분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확실한 측면이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경계는 불명확했고 손쉽게 귀족을 참칭하는 게 가능해졌다. 귀족의 일원이 되면 다른 계층에겐 허락되지 않던 특권과 기회의 문이 적지 않았기에 귀족이 되고자 하는 수요는 끝이 없었다. 실제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귀족에 합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이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귀족을 자처하는 일은 반복해서 일어났다. 때로는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들이 최고 귀족의 지위를 차지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특권 누리기 위해 귀족 자처하는 경우 급증영국의 울지 추기경을 비롯해 토머스 모어, 크롬웰 등이 한미한 출신에서 귀족으로 탈바꿈한 케이스였다. 그레이셤 가문, 세이무어 가문, 더들리 가문, 세실 가문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별 볼 일 없었다. 프랑스에서도 로베스팽, 피나르, 빌레로아 등이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다. 푸케와 콜베를 등도 오리지널 명문가와는 거리가 먼 조상들을 두고 있었다. 귀족 대열에 슬그머니 끼는 사람이 늘면서 그에 대한 반발 움직임도 거세졌다. 영국에선 1569년 북부 지방 귀족들이 나서서 세실가를 비롯한 신흥귀족의 오염을 척결하자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스웨덴에서 칼 9세는 평민 출신 재상을 뒀다는 이유로 오래된 전통 귀족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와 함께 귀족의 범주를 규제하는 법적 조치들도 마련되기 시작했다. 1577년 프랑수아 드랄루에트는 저서 《귀족론》에서 ‘유구한 가문 출신으로 대대손손 귀족의 소명과 조상의 미덕과 충성심을 유지해온 자’로 규정을 한정했다. 한마디로 혈통과 전사로서의 용맹함으로 대표되는 미덕을 귀족의 자질로 꼽은 것이다. 하지만 “귀족 중 대단한 가치를 지닌 자는 용맹한 자”라고 한 몽테뉴나 “전쟁터에 가 공훈을 세우기를 학수고대한” 생시몽 공작의 바람과 달리 법복귀족이 신흥귀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17세기에는 귀족은 더 이상 ‘싸우는 자’와 동일시 될 수 없었다. 실제 프랑스에서 귀족이 되는 길은 봉쇄된 적이 없었고, 중세 말 이후 귀족 내부에선 세대마다 20% 정도씩 교체가 이뤄졌다고 한다. 왕이 귀족서임장 남발하며 신흥귀족 양산전통귀족 입장에선 귀족은 계속해서 몰락해갔다. 대신 어중이떠중이 신흥귀족은 늘어만 갔다. 여기서 재정수입을 늘리고자 했던 왕은 관직매매와 귀족서임장 매매 등을 통해 돈을 얻는 대신 귀족을 양산했다. 루이 13세 시대에 귀족서임장은 남발됐고, 루이 14세 때인 1696년에는 한 해에만 500건의 귀족서임장이 판매됐다고 한다. 결국 귀족 수가 급격히 늘면서 귀족을 가리키는 용어도 다양해졌다. 구귀족과 신귀족이라는 막연한 용어뿐 아니라 혈통귀족, 대검귀족, 법복귀족, 지방귀족 등의 새로운 용어들이 생겨났다.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단어가 영어 젠틀맨(gentleman)의 기원은 불어 장티옴(gentilhomme)이었다. 혈족이라는 뜻을 지닌 ‘gentilis’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단 한 번도 종속 신분에 놓이거나 평민에 속한 적이 없는 순수한 귀족 혈통의 후손을 의미한다고 한다. 중세 이래 실제 봉건귀족의 순수 혈통을 보존한 귀족은 흔하지 않았지만, 장티옴은 왕의 특허장이나 관직매매에 의한 귀족과 대비되는 혈통귀족의 의미로 사용됐다고 한다.

결국 출생과 혈통이 귀족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면서 17세기 이후 귀족들은 족보 경쟁에 몰두했다. 족보 외에 세계명부와 유언장, 결혼계약서 등 글로 작성된 문서가 귀족의 증명서 역할을 하게 됐다. 17세기 말이 되면 과거 귀족을 구분하는 기준인 미덕보다는 혈통을 증명하는 증서에 의해 귀족의 신분이 증명되게 됐다. 경제력을 갖춘 집단이 힘을 얻게 되면서 위기를 느낀 옛 지배층은 출신 성분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서양도 족보에 집착하는 사회로 접어들었다. NIE 포인트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대검귀족·법복귀족…신흥 귀족 늘어나자 대대손손 '귀족 혈통' 증명하는 족보 집착
1. 동양과 서양의 신분제도를 학습하고 비교해보자.

2. 서양의 귀족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강조한 이유는 뭘까.

3. 귀족 계급이 팽창하면 사회에는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