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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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대검귀족·법복귀족…신흥 귀족 늘어나자 대대손손 '귀족 혈통' 증명하는 족보 집착
서양 역사에서 귀족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었다. 귀족의 어원이 된 라틴어 노빌리스(nobilis)는 ‘고귀한’이란 뜻의 형용사로 ‘사회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월함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노빌리스란 단어가 ‘고귀한’이라는 뜻 외에 ‘평판이 좋다’라는 의미를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귀족을 가름하는 기준은 자명해진다. 바로 평판이 좋은 집단을 가리켰던 것이다.귀족이란 평판을 얻기 위해선 귀족의 혈통과 미덕은 물론 ‘귀족다운 삶’의 방식을 좇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귀족의 영지를 구입하고, 상업을 포기하고, 검을 차고, 방패와 투구에 문장을 사용하고, 이웃의 혈통 좋은 다른 귀족과 친교를 맺어야만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준 없이 말이 근거가 되는 평판을 통해 귀족과 귀족이 아닌 것이 구분된다는 것은 언제나 불확실한 측면이 있었다. 귀족과 평민의 경계는 불명확했고 손쉽게 귀족을 참칭하는 게 가능해졌다. 귀족의 일원이 되면 다른 계층에겐 허락되지 않던 특권과 기회의 문이 적지 않았기에 귀족이 되고자 하는 수요는 끝이 없었다. 실제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귀족에 합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이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귀족을 자처하는 일은 반복해서 일어났다. 때로는 별 볼일 없는 가문 출신들이 최고 귀족의 지위를 차지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특권 누리기 위해 귀족 자처하는 경우 급증영국의 울지 추기경을 비롯해 토머스 모어, 크롬웰 등이 한미한 출신에서 귀족으로 탈바꿈한 케이스였다. 그레이셤 가문, 세이무어 가문, 더들리 가문, 세실 가문도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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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3세기 佛프로방스선 법으로 귀족의 노동 금지, 천민과 구분하기 위해…중세엔 일을 벌로 생각
13세기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영주인 레이몽 베랑제 5세는 천생 ‘귀족’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육체적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일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레이몽은 이 같은 관습법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경멸해 마지않던 천한 농민과 건달들을 귀족과 구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나갔다. 자신의 영지에 사는 일반인과 고귀한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시시콜콜 구분하는 각종 법을 만든 것이다.이에 따라 프로방스의 기사들은 농사일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됐다. 기사들은 쟁기질하거나 땅을 파는 것은 물론 장작을 나르거나 각종 손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고귀한 귀족 여인은 ‘음식을 만들지 않고, 설거지도 하지 않으며, 방앗간에 들를 일도 없는 사람’으로 법적으로 정의됐다.중세에는 일을 원죄의 결과인 벌로 생각했다. 성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계율 속에 일을 집어넣어 철저하게 실천하도록 한 것도 모두 ‘에덴동산에서 추방됐을 때 인간에게 강제된 속죄’의 일환이었다고 한다.그리고 이 같은 풍습은 때마침 자리 잡아가던 3위계를 견고히 하는 데 한몫했다. 속죄의 의미로 스스로 쟁기질을 하던 11~12세기의 수도사와 달리 이 당시 수도원과 성당의 수장들은 자신의 부를 이용하는 최상의 방법으로 기도 장소를 충실히 꾸미고, 재건축하고, 제단과 성유물 주변을 휘황찬란하게 하는 데 큰 관심을 뒀다. ‘경제적 부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레토릭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기사들도 게을리 살면서 노동을 자신들의 고귀한 자유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부를 마구 소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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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누구나 고기를 먹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소는 중요하고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그러나 농부가 트랙터, 경운기 역할을 하는 소를 잡아먹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소를 잡더라도 고기를 장기간 보관할 수도 없었다.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인간을 ‘빵을 먹는 존재’로 정의했듯이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곡물을 경작(cultivate)해 빵을 만드는 것이 곧 문화(culture)이자 문명이었다. 유럽 북부의 게르만족, 켈트족 등이 즐기는 육식은 야만으로 간주됐다.소는 식용으로 거의 키우지 않았다. 초지가 부족해 종일 풀을 뜯는 소를 고기로 먹는 것이 비경제적이었던 탓이다. 그래도 영양 보충을 위한 육식은 필수였다. 로마시대 상류층의 연회에서는 주로 돼지나 양, 닭, 오리 등의 고기를 먹었다. 대다수 평민은 ‘빵과 서커스’ 정책에 따라 무상으로 돼지고기와 기름이 배급될 때나 맛볼 수 있었다.육식은 게르만족이 지배계급으로 올라선 중세에도 선호됐다. 특히 프랑크왕국에서는 육식 금지가 무장해제와 동일한 처벌로 간주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기, 특히 소고기는 여전히 왕과 귀족이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농노들은 어쩌다 고기가 생기면 스프나 스튜로 먹었을 뿐 주식은 빵이었다. 그나마 해마다 곡식을 모두 소진한 늦겨울과 아직 덜 자란 한여름에는 굶주림이 되풀이됐다.15세기 말 대항해시대도 소고기와 연관이 있다. 모험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먼바다로 나간 것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막힌 후추 수입항로 개척이 주목적이었다. 냉동 냉장기술이 없어 고기 부패를 막고 풍미를 살리는 후추 등 향신료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소고기, 음식에서 요리로고기를 불에 구은 스테이크는 본래 북유럽의 거친 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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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병역면제세는 왜 중세에 활성화됐을까
영어에서 프리랜서(freelancer)는 특정 집단이나 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 직업인을 총칭한다. 우리말로 프리랜서라고 쓰지만 영어로는 ‘프리랜스(freelance) 작가’ ‘프리랜스 배우’처럼 쓰는 게 일반적이다. 프리랜서는 고용주가 누구든 상관없이 맡겨진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 일이 있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므로 정해진 직장이 없고, 일이 없으면 보수도 없다.현대의 프리랜서는 자유 계약직이지만, 그 어원에는 흥미롭게도 중세 역사가 녹아 있다. 프리랜서는 ‘free’와 ‘lancer’의 합성어다. 랜서는 ‘랜스(lance)를 쓰는 사람’, 즉 중세의 용병을 가리킨다. 랜스는 로마제국 후기에 군대에서 사용한 짧은 투창인 ‘랑케아(lancea)’가 어원이다. 중세 기사들이 마상 시합 때 손에 들고서 마주보고 달리며 일합을 겨룰 때 쓰는 게 랜스다. 그러나 정작 중세 때는 프리랜서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 초 영국 작가 월터 스콧이 쓴 소설 《아이반호》에서 중세 용병들을 ‘프리랜스’로 지칭한 것이 시초다. 이 소설에서 사자왕 리처드의 귀환에 동요하는 존 왕의 한 가신이 소집한 용병들을 프리랜스라고 부르며 “그 창은 어떤 주군에게도 헌신을 맹세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그 유래다. 기사는 소년 시절부터 기사에게 필요한 무예 학문 예의범절 등을 익혀 실력이 쌓이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말과 갑옷은 워낙 비싸 아무나 갖출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다. 주로 귀족의 자제들이 기사가 됐지만, 말과 장비를 유지할 경제력이 없으면 빚에 쪼들렸다. 이 때문에 용병 모집은 고급 백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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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타
중세 귀족들이 향신료에 열광했던 진짜 이유는?
☞옆에서 소개한 사례는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의 책 《원더랜드》(프런티어 펴냄·444쪽·1만6000원)를 발췌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혁신이 획기적 아이디어나 기술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놀이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한다. 패션, 쇼핑, 음악, 맛, 환영, 게임, 공공장소 등 여섯 주제로 나눠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상업화 시도와 신기술 개발, 시장 개척으로 이어진 다양한 사례를 담았다.어느 초등학교 역사책이든 향신료 무역이 세계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세계무역, 제국주의, 콜롬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와 발견, 로마의 멸망, 주식회사, 베니스와 암스테르담의 변치 않는 아름다움, 이슬람교의 세계적 확산, 여러 풍미가 뒤섞인 도리토스의 맛까지 모두 향신료에서 비롯됐다. 인간이 향신료에 맛을 들였기에 오늘날의 세계가 존재하게 된 셈이기도 하다.욕망과 환상의 사치품지금 일상에서 값싸게 누릴 수 있는 향신료는 한때 말도 못하게 비싼 사치품이었다. 인간이 ‘그까짓 맛’ 때문에 그토록 엄청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향신료 열풍이 일어난 이유는 기본적인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게 통상적인 해석이다. 고대 로마시대나 중세에는 겨우내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으로, 상하기 시작한 고기의 역겨운 맛을 덮기 위해 향신료를 썼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가설을 부정하는 논리도 있다. 후추나 육두구는 거금을 들여야 살 수 있었으므로 1600년대 가격 하락 전까지 유럽 상류층만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유럽 귀족에겐 신선한 고기나 생선이 동나는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향신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