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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유럽 곡물값 크게 오르며 사망자 수 전쟁국가 앞질러
평균 곡물가격은 1738년에서 1740년 사이 60%나 뛰었다. 한번 높아진 곡물가격은 1742년까지 떨어지지 않고 지속됐다. 몇몇 지역에선 곡물 가격이 두 배나 오르기도 했다.구체적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선 1737~1738년보다 1740~1741년 곡물 가격이 77.0% 뛰었다. 덴마크에선 같은 기간 곡물가가 71.4% 올랐다. 핀란드는 67.1%, 스웨덴은 60.0%, 아일랜드는 56.7% 급등했다. 스코틀랜드(52.9%) 독일(47.6%) 노르웨이 (44.1%) 등도 식료품값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남부 유럽은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지만 이탈리아(37.2%) 프랑스(35.7%) 오스트리아(33.7%) 잉글랜드(32.9%) 스위스(30.7%) 등도 부담이 급증하긴 마찬가지였다. 곡물가 오르며 저소득층 영양부족이처럼 곡물 가격이 비싸지면서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장기 영양부족 상태가 야기됐다. 당시 저소득층이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인구의 절대다수가 굶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 중반 유럽의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들에선 음식물과 음료 소비에 드는 비용이 가계 전체 수입의 60~7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한다.이 같은 곡물가 상승의 여파로 1735~1739년에 비해 1740~1742년의 사망 증가율도 크게 높아졌다. 다만 곡물가 상승률과 사망자 증가율이 비례하지는 않았다. 노르웨이 사망자 수가 81% 늘어난 것을 비롯해 핀란드(51.8%)와 아일랜드(25.3%) 등의 사망률 증가율이 높았다. 프랑스도 사망자가 24.5%나 늘었고 잉글랜드는 23.4% 상승했다. 아일랜드, 노르웨이, 핀란드 등은 식량 부족 여파로 사망자 증가율이 당시 러시아와 한창 전쟁 중이던 스웨덴(22.7%)을 크게 웃돌기도 했다. 전쟁보다 굶주림이 훨씬 무서운 재앙이었던 셈이다.당시 프로이센, 폴란드,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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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왜구 경험이 일본 무역발전·군사대국화 토대 이루는 사이, 명나라는 해금정책 고집·조선은 권력다툼으로 쇠락중
1498년에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해 후추 등 향신료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1511년 ‘향신료의 섬’인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고,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해협을 거쳐 1512년에는 자바섬에 진출했다. 그런데 1543년 영파로 가던 배가 표류해 규슈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고, 이때 철포(조총)가 일본에 전달됐다. 1549년에는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규슈 남부인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인들은 1553년 마카오에 진출했고, 1557년 영유권을 얻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 무역망에 참여했다. 복건(푸젠), 절강(저장) 등 동남 연해지역에서 현지 상인들과 활발한 밀무역을 전개했으며, 특히 일본의 은을 명나라에 수출하는 일을 했다.이 무렵 일본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상인과 선원, 선교사들이 들어가 소위 ‘남만(南蠻)문화’가 발달했다. 의술, 천문학, 조선술 등의 신기술을 비롯해 시계, 조총 등의 서양 물건, ‘빵’ ‘덴푸라’ ‘카스텔라’ 등 포르투갈에서 흘러들어간 음식 문화 등이 유행했다. 천주교가 수용돼 1582년에는 규슈 서부인 오이타(大分)현의 소년 4명이 바다를 건너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로마로 가 교황인 그레고리 13세를 알현했다. 1584년에는 에스파냐인이 규슈 북서부의 히라도에 도착했다. 이처럼 ‘일본의 쇄국’과 ‘조선의 쇄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일본에 굴복당한 조선처럼 된다.1588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왜구를 근절시키는 법령을 발표한다. 결국 왜구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활동과 경험은 일본의 무역 발전과 군사대국화의 인적, 물적 토대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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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8세기 유럽 부흥기에도 농경사회의 한계는 못 피해
서양에서 18세기는 ‘위대한 세기’ ‘찬란한 세기’ 등 긍정적인 이미지가 보통 따라붙는다. 절대왕정과 계몽주의, 시민혁명의 시대라는 프리미엄이 적지 않은 것이다. 또 이때는 꾸준한 경제발전이 이뤄진 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식민지 개척에 따른) 생활공간 확대와 식량 증대의 시기’로도 불렸다. 최근에는 이 기간을 소비혁명이 발생한 시기이자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의 때로 보기도 한다.그 결과 인구도 증가했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라 차이가 크긴 하지만, 18세기 100년 동안 유럽 인구는 9500만 명에서 1억46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세계 인구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도 1700년 17~18%에서 1800년에는 20% 수준으로 높아졌다. 1700년 70~80만 명으로 추산되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수는 1789년 대혁명 직전에는 230만 명까지 늘었다. 전체 인구 증가율을 훨씬 웃도는 자본가 계층의 증대는 상업의 발전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경제 발전으로 유럽 인구 급증영국을 중심으로 도시화도 빠르게 이뤄졌다. 1600~1800년 영국 인구는 111% 증가했는데 도시 인구 비율은 600%까지 늘었다. 특히 1750~1800년 유럽 도시 인구 증가율의 70%는 영국 몫이었다. 1800년에도 영국 인구가 유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 미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국의 도시화 비율 증가 속도가 가팔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도시화 물결은 이 시기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각지로 빠르게 확산됐다.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괄목할 만한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에선 자연환경이 인구를 조절하는 ‘맬서스적 인구조정’이 두 번이나 크게 작동했다. 농경사회에서 인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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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해적질하던 왜구들 국제환경에 빠르게 적응, 다국적 무역상 변신…동남아까지 활동 범위 넓혀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났고, 82년이 지난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동안 왜구 무리들은 어떻게 활동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강력한 일본군으로 변신했을까. 그리고 조선의 관리와 선비들, 백성들은 무엇을 했을까.1419년 6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 인해 전기 왜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본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 주민들과 왜구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강온양면 정책을 폈다. 하지만 왜구는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부산) 왜변, 1555년에는 을묘왜변(강진·진도·영암)을 도발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왜구가 침략한 내용이 312건이나 나온다.이 무렵 동아시아에서는 ‘후기 왜구’들이 발호해 주로 중국 해안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1368년 건국된 명나라는 1371년 주민들이 바다로 나가는 행위를 막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 민간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푸젠성·저장성·광둥성 등 해안에 견고한 성을 쌓고, 군사를 양성했다. 군선도 건조해 곳곳에 배치했다. 이런 해금정책은 300년 이상 존속되다가 1684년에야 폐지됐다.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원나라를 멸망시킬 때 적대적인 관계였던 장사성 등의 해양 세력이 성장하고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였다. 또 명나라는 이민족인 원나라와 달리 책봉체제와 조공무역이라는 전통적인 중화주의 체제를 복원하고, ‘해양과 무역’이 아니라 ‘내륙과 농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왜구의 발호 때문이었다. 명 정부는 책임을 물어 1386년에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와 무역을 금지했다. 이후 1392년 무로마치 막부(1336~1573년)가 왜구를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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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친경 부활했지만 농업생산량은 급감 '아이러니'
광해군 이후에는 현종 대에 이를 때까지 친경의식이 치러지지 않았다. 친경이 다시 논의된 것은 숙종 대로 남인의 대표 허목이 옛 기록을 근거로 친경의례를 시행하자고 적극 건의한 이후였다. 하지만 친경의 ‘부활’은 쉽지 않았다. 마침 천연두가 유행한 탓에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다.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친경 당일 큰비가 내려 관경대에 설치된 일월오악도 병풍이 찢어지고 소를 끌고 쟁기를 밀 수 없을 정도로 땅이 질척대자 친경 행사가 연기된 것이다. 다음날 현종 왕릉인 숭릉의 능침이 무너지는 사고까지 생기면서 친경의례는 아예 무산됐다.이후 오랫동안 중단됐던 친경의식은 영조 때 되살아났다. 영조는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1753년(영조 29년)과 1764년(영조 40년), 1767년(영조 43년) 친경을 거행했다. 1767년 영조는 세손과 함께 친경하고 고사에 따라 친잠(누에치기)도 하기로 했다. 이때 곡식의 종자를 받아 보관하는 장종의식을 같이 치렀다. 정조 때는 대규모 행사로 친경은 하지 않았지만 1781년 윤5월에 적전에서 보리 베는 것을 보는 의식은 거행했다. 친경의식은 고종(1871)과 순종(1909, 1910) 때까지 명맥을 이었다.국왕의 친경의례가 제대로 부활한 시기는 쌀이 전국 장시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는 교역상품이 된 때였다. 인구가 증가하고 가난한 하층민까지 쌀을 주식으로 소비했던 것이다.윤용출 부산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농업노동 같은 비숙련 노동자가 받는 쌀임금은 18세기 초 하루 8되 수준으로 상당히 높았다. 이는 1970년대 수준에 필적하는 것이지만 이후 쌀임금 수준은 1900년까지 200년간 하락하게 된다. 경상도와 전라도 다섯 지역에서 관찰된 논 1두락당 소작료도 17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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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마도주 항복 받긴 했지만 전투다운 전투 없이 철군, 미온적 대응으로 해양포기…훗날 임진왜란 참사 겪어
조선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중간지역인 아소완 근처 니네(仁位)에 상륙했다. 하지만 급습당해 장수들을 비롯한 100여 명의 군사가 죽었다. 전투는 소강상태에 이르고, 양측은 타협을 시도했다. 조선의 입장으로는 해양작전이 곤란해지는 음력 7월 이전에 철수하는 것이 바람직했고, 대마도주는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이종무는 정벌을 성공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7월 3일 대마도에서 철군했다. 불과 15일 동안의 작전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이뤄지지 않았고 전리품도 빈약한 대규모 해외 원정이었다. 만약 현장 사령관인 이종무가 조선을 겨누는 비수인 대마도를 점령한 뒤 일본 본토의 혼란을 이용해 영토로 편입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15일 만에 철군 후 왜구들 다시 활개결국 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충청도 해안을 공격했고, 조선은 재정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국제관계가 변화하고, 내부에서 반발이 있자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대마도가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한 영토니 군신(君臣)의 예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대마도주는 왜인들이 거제도에 살게 하고,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형식을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시간을 벌고, 실리를 얻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렇게 해서 ‘부산포(동래)’와 ‘내이포(진해)’ 등을 개설했고, 대마도를 경상도 관찰사의 지휘를 받는 영토로 취급했다. 도주에게는 ‘도선증명서’를 발급해 무역 독점권을 줬다.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되찾아야 한다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주로 이때의 상황과 몇몇 기록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이후에 세종은 일본국에 통신사를 세 번 파견하고, 염포를 설치하는 등 대마도에 유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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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왕이 직접 쟁기 잡고 밭갈이…백성들 농사일 독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 2년(983) 1월 신미일에 ‘왕이 원구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태조를 배향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같은 달 을해일에는 ‘왕이 몸소 적전(국왕이나 천자가 농경의 시범을 보이기 위해 설정한 의례용 토지)을 갈고 신농씨(神農氏)에 제사 지내면서 후직(后稷: 고대 중국의 관명으로 농사일을 주관하던 장관, 주나라의 시조인 기를 가리킴)을 배향했다. 풍년을 기원하며 왕이 친히 적전을 가는 의식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했다.고려 성종 때는 왕이 직접 토지를 가는 친경의례뿐 아니라 ‘헌종의식’도 처음으로 거행됐다. 헌종의식이란 ‘왕후가 육궁의 사람을 거느리고 동(늦벼)과 육(올벼) 종자를 싹틔워 임금에게 바친다’는 《주례》의 기록을 근거로 왕후가 올벼의 싹을 틔워 바치는 행사다.성종대에 도입된 이 같은 친경의례를 받들어 이후 일부 왕이 실천에 옮겼다. 1031년(현종 22) 선농에 제사하고 적진을 친경했고, 1048년(문종 2) 후농제를 지냈다. 1134년(인종 12)과 1144년(인종 22)에도 적전을 친경하거나 제사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1144년 이후로 왕이 적전에서 밭을 직접 가는 친경례는 거행되지 않았다. 당시 정치권에선 현실정치를 비판하면서 이상적 통치를 제안할 경우 “적전에서 예를 시행하자”는 논의가 빠지지 않았을 뿐이다. 윤소종(1345~1393)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이 적전에서 친경의례를 통해 민생을 위한 개혁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적극 제안하기도 했다.왕이 농사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취하도록 본격적으로 요구받은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정도전(1342~1398)은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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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60여년간 조선 괴롭힌 왜구 토벌하기 위해 '상왕' 태종 명령으로 대마도 정벌에 나서지만…
불가사의한 일이다. 한 국가가 다른 나라의 해적 집단에 그렇게 오랜 기간 농락당하면서도 해양력을 키우지 않은 역사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을 대외정책 기조로 삼았다. 명(明)나라에 사대(事大)를 취하며, 일본 등 타국과 가깝게 지낸다는 인식이다.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면 ‘현실’이라는 명목으로 굴복을 주장하고, 중국적 질서에 충실한 성리학자들로선 최고의 선택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왜구는 고려 말에 비해 규모는 작아졌지만 해를 바꿔가면서 무려 160여 년 동안 조선을 줄기차게 괴롭혔다.1393년 3월 왜구가 충청도 해안인 보령을 침공해 병선을 탈취했고, 한양 입구인 강화도 교동을 공격했다. 이듬해에는 경상도 일대를 시작으로 전라도와 서해안 곳곳을 침략했다. 이후 매해 침략했다. 1396년 8월 120척이 경상도 해안을, 10월 말에는 부산 동래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신정부는 긴장하면서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다.왜구의 발호에 조선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을까? 때마침 온건한 인물인 대마도주(島主)와 타협해 쌀·콩 같은 식량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한 왜구들에게는 벼슬과 성을 주고, 토지와 집도 마련해 ‘항왜(降倭)’ ‘투화왜(投化倭)’들을 만들었다. 국방력, 해군력 증강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7년에는 해안가 요충지에 진을 설치했다. 태조는 호수에서 항구로 변한 용산강에 가서 전함 진수식에 참석했고, 각 도에 함대사령관에 해당하는 수군 절제사를 임명했다. 이런 정책 덕분인지 왜구들은 한동안 발호하지 않았고, 정부도 긴장을 풀었던 것 같다. 1398년에는 수군을 감소시켰고, 이듬해에는 병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