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병자호란과 백성의 눈물(上)
청의 요청으로 파병된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이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접근했던 등주 수성.
청의 요청으로 파병된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이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접근했던 등주 수성.
이웃한 국가 간은 협력과 우호관계일 때도 있지만 경쟁과 갈등, 불가피한 충돌도 발생한다. 때로는 우리의 선택이나 상대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제질서 때문에 충돌하기도 한다. 일부 배신자를 제외하고, 국가 간 충돌에서 패배한 국가의 백성에게는 포로, 노예, 죽음의 길이 기다린다.

조선은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국가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망각한 성리학자들의 나라였다. 광해군의 정책과 같이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를 외교적으로 이용하면 청나라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청을 자극해 전면전을 초래했다.

청태종의 친정군 12만 명의 선발대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넘었지만 12일에야 사실을 보고받았던 정부는 무능했다. 더구나 임진왜란의 대참상을 겪고, 정묘호란이 끝난 지 불과 9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몰현실적인 자주론자들의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불과 45일을 버티다 항복했다.

승전국과 패전국은 협의 끝에 9개 조항을 만들어 공표했다.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관계를 끊고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인조가 항복의식을 행한 삼전도에는 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방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상황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조인 때까지 이어졌다.

조선의 정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전쟁 기간이 매우 짧았고, 전장이 한반도 북부와 수도권에 한정됐으며 큰 전투가 없었지만 완벽한 패배와 항복으로 자주성을 상실했다. 또한 나라와 백성, 역사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3만여 명의 사망자와 함께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희생됐다. 최명길은 <지천집>에서 포로를 50만 명으로 전했고, <산성일기>와 <남한일기>에서는 60여만 명으로 기록했다. 시대 상황과 조선 인구를 고려하면 이 같은 수치는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하지만 국경까지 육로로 이어져 일본과 달리 많은 포로가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전쟁이 그렇지만 특히 다종족으로 편성된 청나라 군대에 포로는 전리품이었고,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었다. 군사력, 국가 노동력, 사적 노동력, 성적 도구로 포로가 필요했다. 포로는 매매와 양도가 가능했고, 많은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왕실을 비롯해 양반 사대부의 여자들도 많이 잡혀갔다. 이 사건은 역사 이래 최대 수치로, 조선 사회의 대균열은 물론이고 혈연을 기반으로 한 조선공동체가 붕괴했다고 본다.

척화파였던 삼학사의 오달제는 심양까지 가는 데 60일이나 걸렸고 숱한 고난을 겪었음을 기록했다. 포로들은 만주의 한겨울 삭풍과 눈보라 속에서 굶주림, 매질, 강간 등을 당했고, 일부는 죽음을 맞았다. 사료에는 강화도가 점령당할 당시에도 세자를 포함한 왕족, 사대부 가족, 백성이 포로로 잡혔고, 일부 여인은 능욕당하고 자결한 일이 기록됐다. 이미 정묘호란 때도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고, 일부는 병자호란 때 적군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정부는 포로 문제에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포로의 숫자가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정부는 능력도 부족했지만,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살아남은 조선 포로들이 청나라 수도인 심양에 도착한 뒤 청나라는 심양관에 억류한 소현세자에게 속환의 방식과 시기 등을 전했다.

세자는 보호자들이 심양으로 와서 속환금을 내고 포로를 데려갈 수 있는 조건들을 조정에 알렸다. 이어 공식적인 속환사와 많은 원속인이 심양에 도착했고, 마침내 5월 15일 지금은 시내 가운데가 된 백탑 근처에서 ‘조선 포로 매매시장’이 열렸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승전국과 패전국은 협의 끝에 9개 조항을 만들어 공표했다.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관계를 끊고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인조가 항복의식을 행한 삼전도에는 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방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상황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 조인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