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효종의 북벌론과 나선정벌 (上)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병자호란 후 효종 때 개축했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병자호란 후 효종 때 개축했다.
효종의 ‘북벌론’은 비록 꿈이었을지라도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이성계는 1388년 음력 5월 하순, 압록강가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탄 말의 눈빛과 꼬리짓, 울음소리는 어땠을까. 이후 이종무가 1419년 잠시 대마도에 발을 디뎠고, 세종 때 김종서와 최윤덕은 멀리서 그림자만 봤을 뿐이다. 이후 조선은 ‘남정북벌’을 꿈꾼 적은 없다. 한정된 인식과 무능함, 현실에 안주하는 습성 때문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에 포위된 채 울음을 터뜨린 인조는 포로로 끌려가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냉대하고 그의 가족을 멸한 뒤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정책기조로 삼고, 실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과 추진했다. 왕을 방어하는 어영청군을 강화해 수도에 상주시켰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군도 재정비했다. 기병전에 대비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기병을 재편했고, 신병기들을 제조했다. 북벌론의 실상
청나라의 북진 정책에 맞서 싸운 흑룡강 상류, 소흥안령 지역에 거주하는 다구르족의 서낭당 신앙인 오보에.
청나라의 북진 정책에 맞서 싸운 흑룡강 상류, 소흥안령 지역에 거주하는 다구르족의 서낭당 신앙인 오보에.
효종의 ‘북벌론’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

첫째, 효종을 비롯한 서인 일파들은 정말로 실천할 의지가 있었을까.

함께 포로생활을 겪었지만 소현세자는 조선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위해 청을 학습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효종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대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인은 국력과 국제관계의 실상을 외면했고, 전쟁의 참상과 백성의 희생을 가볍게 여긴 죄로 역사와 백성에 책임져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반청정책과 자주성의 표방은 피해의식과 복수심, 자주라는 감성을 이용해 정책적인 과오를 반전시키고 면피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와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재야의 거두이자 권력자인 송시열은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에서 ‘존주대의(청을 오랑캐로, 명을 정통으로 해 중화사상을 따른다)’와 ‘복수설치(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다)’란 북벌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고, 이조판서로 북벌을 추진했다.

북벌론은 왕과 양반 체제에 대한 백성의 불신과 저항을 무마하고, 전쟁의 위기의식을 일으켜 국론을 통일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군사력을 재건하고, 정치력을 강화하면서 지지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는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물론 이 정책의 긍정적인 점도 몇 가지 있다. 학자적 관료인 송시열은 ‘정치를 개선해 오랑캐를 물리친다(修政事以攘夷狄)’는 명분을 내걸고, 궁정사업과 토목공사를 줄여 국가재정을 건전하게 만들었다. 세금을 줄이는 등 백성의 삶을 중요시하는 정책도 건의했다. 하지만 실제로 백성들은 농사철에도 군사 훈련에 투입됐고, 성벽과 개수공사 등에 동원되면서 농사에 차질이 많았다.

둘째, 효종 세력들은 북벌정책을 실현 또는 실천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까.

국내 환경을 고려하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3만 명의 전사자, 50만 명 이상의 포로로 인한 군사력과 노동력의 막대한 상실, 전답의 파괴와 손실로 인한 경제 추락과 국가 재정의 부족 등은 전쟁 준비에 장애 요인들이다. 불안감과 염전 분위기의 증폭도 문제였다. 따라서 왕과 일부 양반 권력자를 빼놓고는 명분도 희박하고, 승산 없는 전쟁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와 만주의 국제환경국제환경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남북 분단과 6·25전쟁처럼 우리 운명은 국제환경에 좌우되는 일이 많았다. 1654년 당시 명나라는 멸망(1644년)한 지 이미 10년이 됐다. 물론 복명운동이 계속됐고, 1658년에는 남쪽에서 정성공이 10만 명의 병력과 전선으로 남경 근처까지 공격했다. 북쪽 몽골 지역에서는 준가르 제국이 일어나 청과 갈등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강희제가 등극하기 직전이었고, 통일 제국을 완성하는 단계였다.

동아시아 세계는 이미 서양 세계의 구심력에 끌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의 발생과 과정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양 세계의 역할이 있었고, 소현세자는 독일 출신인 아담 샬 등의 선교사와 교류하면서 서양의 신사상을 체험하고, 발달된 과학과 기술문명을 접촉한 뒤에 이를 이식하려고 시도했었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정책기조로 삼고, 실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과 추진했다. 왕을 방어하는 어영청군을 강화해 수도에 상주시켰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군도 재정비했다. 기병전에 대비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기병을 재편했고, 신병기들을 제조했다. 북벌론은 왕과 양반 체제에 대한 백성의 불신과 저항을 무마하고, 전쟁의 위기의식을 일으켜 국론을 통일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군사력을 재건하고, 정치력을 강화하면서 지지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는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