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병자호란과 백성의 눈물 (下)
청태종 황태극의 무덤인 북릉 심양.
청태종 황태극의 무덤인 북릉 심양.
조선 포로들의 속환가가 초기에는 남자 은 5냥, 여자 은 3냥 수준이었다. 하지만 혈육의 정이 남다른 조선 사람들이 선양을 계속 찾아오자 가격은 150냥에서 250냥 정도까지 올랐고, 심지어 한 고위관리는 아들을 위해 1500냥을 지급할 정도였다. 결국 재력 있는 양반 사대부의 포로들은 귀환했지만, 그것도 몇 차례에 걸쳐서 2000여 명에 그쳤다. 그나마 대다수 백성은 돌아오지 못한 채 남자들은 노예로, 여자들은 첩이나 창기로 전락했다. 그 후예들은 청나라 사람, 중국 사람들로 변했다.

관광단이나 사업가, 고구려 유적 답사에 나선 학생들은 선양의 청나라 ‘고궁’과 ‘백탑’에서 선조들의 참상을 몰라 숙연함과 반성하는 마음을 갖기보다 웃고 즐긴다. 식민지 백성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역사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이다.

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귀환한 포로를 ‘영웅’으로 환영하는 나라는 자주적이고, 성공한 국가다. 조선은 그 반대였다. 8년 만인 1645년 돌아온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조선과 청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조선과 포로들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청국의 크기와 위상을 절감하고, 국제관계의 실상에 눈을 떠 몽골어를 공부했다. 또한 청나라에 와 있던 아담 샬을 비롯한 천주교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수한 서양문물을 배웠다. 더불어 자명종, 천문의, 세계지도 등 부국강병에 필요한 서양물건을 가지고 귀국한 그의 존재는 성리학자들의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통성에 위협을 느낀 인조의 냉대,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다 결국 2개월 만에 급사했다. 상황과 세자의 시신 상태, 인조의 태도, 당쟁을 고려해 ‘독살설’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추잡한 궁중 암투가 일어나면서 인조는 세자빈을 내쫓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어린 손자인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는데, 결국 둘은 제주도에서 장독과 병으로 죽고, 막내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 사건을 조선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항복한 왕인 인조와 개혁적인 왕위 계승자 간 권력 쟁탈전을 넘어 국내파와 포로파(송환파)의 갈등, 성리학과 실용학문(서양학문, 훗날 북학으로 발전), 명분론과 실용론의 대결이고, 친명 세력과 친청 세력 간의 대결이었다.

조선은 전쟁 패배로 인구가 급감해 농업 등 기간산업에 차질이 생기면서 국가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인조가 취한 대동법 등 몇 가지 정책도 차질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이 전쟁은 혈연 공동체 의식에 균열을 만들었고,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양반 사대부들의 무능함을 드러냈다. 더욱이 ‘환향녀(還鄕女)’ 문제는 그들의 열등감으로 뭉쳐진 오만과 위선을 드러냈다. 포로로 끌려갔다 집안의 재력으로 귀국한 환향녀들은 사회에서, 가족과 남편에게서 철저히 버림받았다. 인조는 환향녀들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어 몸을 정화하는 의식을 통해 조선 사회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버림받은 그들은 일부는 자결하거나 몸을 팔면서 생활을 유지했고, 일부는 청나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현실로 체험하지 못한 후대인들은 ‘객관’이라는 핑계로 원론적인 잣대를 들이대 평하고, 경망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특성이 있다. 필자 또한 ‘관찰자’란 자격 미달의 평가자이지만, 역사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비겁한 조선 사내들을 비판한다. 조선의 왕과 위정자이며 성리학자, 남편이며 아비인 그들을 말이다. 그들은 나라(國)와 백성(民) 대신 ‘충(왕)’을 더 소중히 했고, 가족 대신 가문에 집착해 나라도 가족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죄인들이다. 8년 고생 끝에 귀국한 소현세자 등을 배척해 죽게 했고, 사지에서 돌아온 환향녀들을 사회에서 매장하거나 자결을 강요했다. 그들은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도, 인정도 없는 부도덕한 죄인들이다.

형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은 인재를 등용하고, 군사 체제를 정비하며 북벌을 야심 차게 추진했으나 10년 만에 죽었다. 이후 비겁한 양반 성리학자들은 통한의 반성과 절치부심의 복수, 부국강병의 실천을 포기한 채 성리학을 확대 재생산하며 당쟁에 몰두했다. 그 결과 백성을 더 탄압하고 가렴주구가 심해지면서 조선은 붕괴의 길로 치달았다.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전쟁 후 돌아온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조선과 청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조선과 포로들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청국의 크기와 위상을 절감하고, 국제관계의 실상에 눈을 떠 몽골어를 공부했다. 또 청나라에 와 있던 아담 샬을 비롯한 천주교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수한 서양문물을 배웠다. 더불어 자명종, 천문의, 세계지도 등 부국강병에 필요한 서양물건을 가지고 귀국한 그의 존재는 성리학자들의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통성에 위협을 느낀 인조의 냉대.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다 결국 2개월 만에 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