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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영국 기관총에 아프리카 '추풍낙엽'…유럽 각국도 긴장
19세기 중반만 해도 아프리카 내륙은 ‘미지의 세계’였지만 1880년대부터 1900년 사이 수천 개의 아프리카 내륙 왕국은 40개의 국가로 재편됐고, 그중 36개는 유럽 국가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된다. 아프리카는 영국에 정치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지역이라기보다 알짜배기 최대 식민지인 인도로 가는 길목 내지 인도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장치 역할을 했다. 인도로 가는 배들이 연료로 사용할 석탄을 보관하는 장소의 의미로도 개척됐다.이 같은 유럽의 확장 배경에는 금융과 무력의 결합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맥심 기관총으로 상징되는 기술 우위가 핵심적 역할을 했다. 맥심 기관총은 원래 미국에서 개발됐지만 개발자 하이람 맥심은 언제나 영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런던의 허튼가든에 있는 지하 작업장에서 맥심 기관총 프로토타입이 작동할 수 있게 되자 총을 시험해볼 수 있도록 저명 인사들을 초청했다. 1884년 영국에서 맥심건컴퍼니가 설립됐을 때 영국의 금융 재벌 로스차일드경이 이사로 참여했고 로스차일드의 은행에선 1900만 파운드의 자금을 제공, 맥심컴퍼니와 노르덴펠트총기사의 합병을 지원했다. 이어 로스차일드가는 “백인은 지구상의 더 많은 곳에 거주할수록 인류 복지에 더 이바지한다”는 신념을 지닌 세실 로즈와 합심해 아프리카 진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맥심 기관총의 능력이 여실히 드러난 것은 1898년 9월 수단에서 발생한 옴두르만 전투에서였다. 사막 부족 연합군이 역사상 최강 제국의 정규군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 전투는 잔혹한 학살극으로 마무리됐다. 사막 부족군이 영국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영국의 맥심 기관총 앞에 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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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전후 귀환한 조선 포로들 환영은커녕 냉대받아…문벌사족들은 가족이 돌아온 사실 숨기기도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사람도 꽤 많았다. 《국조인물지》에 기록된 이엽 장군은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잡혀 포로로 끌려갔다. 좋은 대우와 회유를 뿌리치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결국 자결했다.쇄환, 즉 정부의 공식적인 노력으로 귀환한 사람들도 있었다. 1604년 6월 나라를 망친 성리학자들 대신 승병장인 사명당이 ‘탐적사’로 파견됐다. 일행은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만나고, 300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1607년에는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돼 전후 문제 등을 논의하고, 124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1624년에도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물론 일본이 자발적으로 쇄환시킨 포로도 있었다. 대마도 도주는 종전 전에 강화를 요구하면서 조선 포로를 500명 가까이 돌려보냈다. 광해군 때도 우호 관계를 회복하자면서 잡혀갔던 백성을 잇달아 쇄환시켰다.조선 정부와 사회는 귀국한 포로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첫째, 의심하고 경계했다. 선조 38년 6월 17일 기록에는 사명당을 따라 대마도에서 온 박수영이 나라를 배반해 인명을 많이 살해했으니 형벌을 주자는 요청에 선조가 윤허한 내용이 있다. 1601년에는 강사준과 여진덕 등이 80여 명이 함께 탈출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일본의 자연재앙과 분열상황 등을 보고했다. 그런데도 조정은 일단 의심하고, 조사를 단행했다.둘째, 믿기 힘들지만 냉대와 억압 등을 많이 저질렀다. 2차 쇄환, 3차 소환 때는 관리들이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고, 정부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귀환 포로를 억압하고 약탈하는 일도 빈번했다. 1605년 6월 7일자에는 유정(사명당)이 쇄환한 사람들을 마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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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초대형 다이아몬드 원석 발견으로 보어전쟁 촉발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하는 ‘부어(boer)’(독일어로 농부를 가리키는 ‘바우어(bauer)’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에서 나온 보어(boer)인은 남아프리카 지역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다.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 사람들은 1650년대 동인도회사 소속 식민지 주민으로 시작했다. 한때 케이프타운은 세인트헬레나에서 봄베이, 벵갈 지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동인도회사의 영화를 상징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지역 네덜란드인들은 179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몇 년 만에 영국에 점령당한 뒤 영국의 신민으로 살아갔다. 이후 영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일부 네덜란드계 주민은 영국과의 마찰을 피해 남아프리카 내륙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트란스발 지역에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이라는 네덜란드계 국가를 건설했다.조용한 ‘농업 독립국’으로 남을 법했던 이들 지역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이아몬드였다. 1866년 오렌지강 연안에서 21캐럿짜리 초대형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농사짓고 있는 발밑에 초대형 다이아몬드 광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또 프리토리아 지역에선 무려 ‘3025캐럿’이라는 역사상 최대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됐다. 185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에 이어 남아공에도 거대한 금광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아공 지역은 맹목적인 충동과 탐욕이 집결하는 땅이 됐다.이 같은 ‘노다지 판’을 영국이 가만 놔둘 턱이 없었다. 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에도 세계 식민지를 오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남아프리카의 위상이 높았던 데다 당장 얻을 ‘돈’도 적지 않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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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진왜란으로 최대 10만명 안팎의 백성이 포로가 돼…마카오·인도·이탈리아·포르투갈 등지로 팔려나가
정권과 나라는 붕괴해도 괜찮다. 이민족, 다른 국가에 지배받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백성은 죽어서는 안 된다. 백성이 살아야 새 세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임진왜란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일본은 전쟁 결과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정권이 교체됐다. 명나라는 파병 목적을 이룬 대신 멸망이 앞당겨졌다. 만주의 여진족은 어부지리를 얻어 청 제국을 건설했다.침략을 받아 전장이던 조선은 승전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의병장들과 백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끌려간 포로를 내버렸다. 교토 시내의 ‘미미쓰카(耳塚)’라는 크지 않은 무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베어온 조선인의 귀 5만 명분이 묻혀 있다고 한다. 포로는 적게는 2만~3만, 많게는 10만 명이 넘고, 그 가운데 7500명 정도만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국에 귀환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포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고, 책임져야 할 조선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전쟁은 고도의 정치행위, 경제행위며 또한 문화행위다. 그 때문에 사람의 약탈이 있었고, 노예무역이 병행됐다. 일본군은 정치적인 영토 외에 자원과 문화재 약탈, 포로 획득을 목적으로 군대 체재까지 개편했다. 그 결과 학자, 의원, 도공 등의 기술자와 농민을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 적선에 실린 채로 대한해협을 건너 적지에 내팽개쳐진 조선 포로들의 운명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첫째, 대부분은 귀환을 체념한 상태로 정착해 일본인으로 변신했다. 노비를 비롯한 천민은 물론이고,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홍호현 이성현 등의 양반도 정착해 상급 무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 무렵 일본의 여러 곳, 특히 규슈에는 조선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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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차 세계대전으로 금본위제 흔들리며 국제금융 마비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 소위 프랑권 국가들이 1870년대 금본위제로 이행했고 미국도 1900년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1900년이 되면서 유럽과 북미, 일본, 아르헨티나까지 금에 기반을 둔 화폐체제를 구축했다. 고전적 금본위제가 자리잡은 것이다. 이때에는 지폐를 통화당국에 들고 가면 언제라도 법이 정한 무게의 순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1914년 이전 영국에선 파운드당 순금 113.0016그레인으로 교환됐고, 미국에선 달러당 순금 23.22그레인의 비율로 태환됐다. 금태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영국은 1844년 ‘은행허가법’에서 영국중앙은행의 은행권 발행액이 금 보유액에 1400만 파운드를 더한 금액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독일도 1876년 관련법을 통해 독일제국은행이 발행하는 지폐량은 제국은행 금 보유액 및 재무성 증권 보유액의 세 배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금에 기반을 둔 안정된 통화체제가 갖춰지면서 세계화가 빠르게 진전되고, 인플레이션 위협이 약해졌다. 금본위제 아래 통화정책은 금의 화폐가치를 유지한다는 준칙에 따라 이뤄졌고, 이 준칙이 잘 지켜지면서 인플레이션 문제가 이후에 비해 훨씬 적었던 것이다. 덴마크의 경제학자 윌리엄 샤를링의 분석에 따르면 1873~1886년 사이 유럽 주요 은행의 귀금속 보유량이 33억2900만 라이히스마르크에서 60억44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증가하는 동안 이 귀금속을 본위로 발행된 지폐 액수는 113억3280만 라이히스마르크에서 103억8900만 라이히스마르크로 오히려 감소했다.이처럼 19세기 후반 금과 은 모두 생산이 늘었지만 두 금속의 위상이 극과 극으로 달라진 금본위제로의 이행 배경에는 영국의 힘이 있었다. 바로 금의 가치가 지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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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향토방위하던 의병들, 관군과 합동 전국적 전투 전개…전공 다툼으로 고초 겪거나 전쟁 후에 숙청당하기도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의 승리로 절망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백성들은 항전의 의지를 되찾는 전기를 마련했다. 의병들은 초기에는 향토 방위에 주력했으나, 곧 다른 지역 의병들은 물론 관군과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전국적인 전투행위를 펼쳤다. 나주의 김천일은 수백 명의 의병을 지휘해 선조의 행재소로 북상하다가 강화도 작전을 펼쳤고, 한강 작전으로 승리했다. 광주에서 거병한 고경명도 진주성 전투에 참여해 승전을 이끌어냈다. 관군과 명나라군의 평양성 탈환전에서 큰 공을 세운 의승군은 곧이어 서울 근교 한강가에서 벌어진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정문부의 북관대첩으로 인해 함경도는 보존됐고, 가토오 기요마사의 일본군은 두만강을 넘지 못해 전선의 확대가 저지됐으며,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수하는 상황이 됐다. 의병들, 전쟁에서의 역할의병들의 전국적인 활동으로 전선이 확대된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많은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 의병들은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백성들의 협조를 받아 유격전을 펼쳤다. 일본군의 허를 찌르거나 전진과 후퇴의 길목을 장악해 혼란을 유발했고, 일본군은 수성전을 선호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이르렀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도와 학정, 당파싸움으로 인해 전쟁 전에도 임꺽정(林巨正)의 난 등 민란이 발생했고, 전쟁 도중에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정부와 관군을 불신한 백성들은 떠돌다가(유망) 포로로 잡혀 부역했고, 심지어는 ‘순왜’로 변신해 적에 협조했다. 의병은 이들을 흡수해 전력을 이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그렇다면 생명까지 바쳤던 의병들은 가치와 명예를 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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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군 파죽지세에 한양서 임금 탈출하며 '아비규환'…핍박받던 농민·노비 등 의병으로 궐기 전국서 유격전
의병(義兵) 의승(義僧) 의기(義妓) 의곡(義穀). 이런 선조들을 생각하면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생기가 돈다. 우리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지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사실은 비상시국이었고, 정부와 군대의 무능과 부재 현상을 알리는 안타까운 증거들이기도 하다. 의병들의 활동과 전적1592년 4월 13일 17시경 ‘임진왜란’ 또는 ‘임진조국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상륙 후 두 번의 전투를 마치고 북상했다.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배수진을 격파한 뒤에는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군했다. 조선의 군대는 제 역할을 못했고, 임금이 황급히 탈출한 서울은 아비규환이 됐다. 동요한 백성들은 공포에 떠는 존망의 기로에서 이순신의 옥포해전 승리 소식을 접했다. 이와 함께 곽재우가 경남 의령에서 재산을 털고 노비들을 포함해 의병을 일으킨 소식을 들었다. 역사에서 의병의 존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그는 ‘홍의장군’을 칭하면서 1000여 명의 군사로 낙동강 전투 등 숱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고경명은 전라도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동원했으며, 남원 지역의 안영(安瑛), 나주의 김천일(金天鎰) 등의 의병과 합심해 호남을 방어했다.조헌은 충북 옥천에서 일어나 승군 500명과 합동 작전으로 청주성을 수복했으나, 금산에서 관군의 불참으로 불리한 전투를 벌이다가 700명 전원이 전사했다. 함경도 북쪽에서는 정문부가 적군에 투항한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소위 북관대첩을 이뤘다. 이 밖에 젊은 김덕룡 형제를 비롯해 합천에서 정인홍, 고령에서 김면, 손인갑, 권응수 등이 있었다. 1차 진주성 대첩에 참여한 최경회, 심대승, 임계성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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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파운드·마르크·달러 화폐단위는 귀금속에서 유래
드라크마. 유로화의 등장으로 사라질 때까지 수천 년간 통용된 그리스의 화폐 단위 ‘드라크마’는 원래 ‘한 손 가득히’란 뜻으로 쇠꼬챙이 여섯 가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선 오랫동안 은이 주요 가치 척도 및 교환 수단으로 기능했다. 아나톨리아 고원 주요 광산에서 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은이 산출됐고, 국제 교역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됐다. 하지만 은은 주조된 단위에 따라 계산된 게 아니라 그때그때 중량을 달아 계산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에선 주화가 아닌 은괴의 무게를 달아 사용했고, 상황마다 금속의 가치는 천칭에 달아 결정했다.이에 따라 정의를 집행하는 법규에도 은의 무게를 통한 지불 방식이 명문화됐다. 기원전 2세기 메소포타미아 에슈눈나 법전에 “다른 사람의 코를 물었을 때 은 1미나(고대 그리스 무게 단위, 약 500그램)의 벌금이, 뺨을 때렸을 때는 10세켈(유대 무게 단위, 약 5온스)의 벌금이 부과됐다”는 식이다.반면 앤서니 앤드루스 옥스퍼드대 교수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세기경 표준화된 철물을 교환 목적으로 사용했고, 철물의 대표주자는 바로 쇠꼬챙이였다. 이 같은 철물을 사용한 명칭은 화폐 명칭으로 이어졌다. ‘오볼로스’라는 작은 은화를 가리키는 단위는 한 가닥의 쇠꼬챙이에서 유래했고 ‘드라크마’는 여섯 가닥의 쇠꼬챙이에서 나왔다.이후 등장한 주요 화폐 단위도 대부분 귀금속의 무게를 재는 단위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영국의 ‘파운드’와 발음과 철자가 똑같은 무게 단위 ‘파운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파운드는 원래 은 1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