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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진왜란 참사 후에도 반성·개혁없이 당파싸움만…외교·군사적 대비도 없이 청과 대립하다 굴욕
명나라에서는 1627년 산시지역을 시작으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나 확산했다. 병자호란 전후 명나라 중심부는 대부분 농민군에 의해 장악되고 정부는 통제 능력을 상실했다. 1636년에 2대 황타이지(皇太極)’는 ‘대청’을 선포하고, 천자를 칭하면서 중국 통일을 목표로 명나라를 외곽 포위해 동서남북으로 팽창했다. 청나라의 배후지라는 지정학적 위치, 적극적인 친명(向明) 세력으로의 변신은 조선을 필수적 공격 대상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친청정책을 추진할 기회를 놓쳤고, 청나라는 준비를 마친 뒤 사신을 파견해 정묘호란 때 맺은 조약의 위반을 비판하고, 형제관계를 넘어 ‘군신의 예’를 요구했다. 분노한 조정은 국서의 수용을 거부했고, 척화론은 더욱 강력해졌다.그런데 명나라의 도움조차 없는 상태에서 조선이 청나라와 전면적인 군사전을 벌이는 건 불가능했다. 반면 늦게라도 외교전을 지혜롭게 펼친다면 전쟁 가능성과 피해는 낮아질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와 사대부들이 끝까지 외교활동을 하지 않고, 군사적 대비도 충분히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본능적인 두려움과 불안한 현실을 감추려는 자기기만일까?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기득권의 속성 때문일까? 아니면 부족한 현장감과 교조적인 성리학자들의 근거 없는 오만함 때문일까? 분명한 사실은 그들에게 백성의 생명과 삶을 지키려는 책임의식이 희박했다는 점이다.나라와 왕이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백성의 안전과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에서 ‘民(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民은 복종하지만, 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고 했다. ‘쌍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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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9세기 유럽 최대 지배가문…1차 세계대전 때 해체
합스부르크 가문은 19세기까지 유럽 최대 지배가문이었다. 1848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재위했을 때 그는 오스트리아 영지(저지와 상부 오스트리아 공작령과 스티리아 공작령, 카르니오라와 카린티아, 티롤 백작령, 포랄베르크,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이스트리아 변경백령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시)와 헝가리 국왕령(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헝가리 군사 접경구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보헤미아 왕령(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령, 상부 및 저지 실레지아 공작령)과 갈리시아 왕국, 크라쿠프 대공령, 부코비나 공작령, 달마티아 왕령, 잘츠부르크 공작령도 그의 땅이었다. 여기에 비록 종이 위의 명목상 영지이긴 하지만 상부 및 저지 루사티아와 로렌, 키부르크도 법적으로는 합스부르크의 영지였다. 1291년 이후 실재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왕국도 이론적으로는 그의 지배지에 포함됐다.과거 스페인 펠리페 2세 시대에 비해 제국의 규모가 줄어든 19세기에도 합스부르크가(家)의 위세는 대단했다. 가문은 375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25만7478㎢의 영지를 보유하면서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제국 내 인종도 550만 명의 독일인과 500만 명의 마자르족, 400만 명의 이탈리아인, 300만 명의 체코인, 250만 명의 루데네인, 200만 명의 루마니아인, 200만 명에 가까운 폴란드인으로 구성됐다. 150만 명 규모의 슬로바키아인과 비슷한 규모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10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의 슬로베니아인과 75만 명의 유대인, 50만여 명의 집시와 기타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그리스인도 제국의 신민이었다.하지만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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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서인 정권의 '향명배금' 정책 고집…국제질서 변화 못읽어 정묘·병자호란 자초
‘호란’은 오랑캐(胡)가 일으킨 ‘난’이라는 뜻이다. 오랑캐는 여진족 계열인 올랑개(兀郞介) 부족을 가리키는 용어지만, 성리학자들은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조선과 청나라(여진족) 사이에 발생한 전쟁은 1627년부터 1637년 초까지 10년간 이어졌고, 1단계 정묘호란(1627년)과 2단계 병자호란(1636~1637년)으로 구성됐다. 전쟁의 배경과 과정, 결과가 한족인 명나라와 여진족(만주)이 주도한 청나라의 흥망에 영향을 미쳤다. 예측과 예방이 가능했지만 저항 없이 항복한 우리 역사에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겨준 전쟁이기도 하다.역사학자 관점에서 조선 시대에는 불가사의하고 수용하기 힘든 사건이 몇 번씩 발생했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뒤를 이은 정묘호란, 특히 불과 9년 뒤 발생한 병자호란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 사건에 책임질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조선의 위정자들은 왜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을 몰랐을까.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질서가 재편되고, 정복국가가 탄생할 때는 예외 없이 한국지역을 공격했다. ‘고수 전쟁’ ‘고당 전쟁’ ‘여요 전쟁’ ‘여원 전쟁’ ‘조청 전쟁’ ‘6·25전쟁’이 그러하다. 일본열도의 통일과 전환도 비슷했는데, ‘임진왜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일본의 식민지화’ 등이다.그 시대의 상황을 보면 전쟁 발발 예측은 분명했고, 중국에서는 격렬한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1618년에는 요동지역의 태자하 유역인 무순을 점령하면서 대(對)명 전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위협을 감지했던 명나라는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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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 아시아 바다 누비며 무역…유럽·남미 순방도, 통신사 정세파악 못해 1875년 일본 군함에 무릎
조선 도공인 이삼평이 가마를 연 아리다(有田) 자기는 매우 유명해 유럽에서 주문자 생산이 많았고, 독일 등에는 일본 도자기 연구소들이 설립돼 도자기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도자기와 더불어 전파된 전통 그림인 ‘부세화(우키요에)’는 유럽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인상파가 성립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모네, 마네, 고흐 등은 일본 문화에 심취해 작품에 많이 반영했다.일본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중국의 해안가 도시들, 베트남의 호이안, 캄보디아, 샴(태국), 믈라카 해협, 자바섬(자카르타), 루손(마닐라), 타이완 등에 마을을 만들었고, 상관을 설치하면서 무역선을 파견했다. 철, 일본도, 은, 구리, 심지어 서양식을 모방해 제작한 총까지 수출했다. 일부 지역에는 왜구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조선 포로도 있었다. 막부시대에 일본은 네덜란드와 청나라뿐만 아니라 북쪽 지역에 살던 아이누(하이)인들, 남쪽의 유구(오키나와 열도)를 지나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을 벌였고,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대무역망’과도 연결됐다.일본이 이렇게 상업 발달과 무역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데는 내부의 발전도 있었지만 막부의 해양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막부는 쇄국정책을 취했지만, 해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 특정 상인들에게 외국과 무역할 수 있는 주인장(朱印狀)을 발부했는데, 이 증서를 소지한 ‘주인선’은 일본 배를 근간으로 중국의 장크 스타일에 서양 범선의 특징을 혼합해 만들었다. 조선을 침공했던 선봉장인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는 1604년 약 550t급의 주인선을 건조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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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영국 모방해 산업화…전쟁보상금 덕에 창업 열풍
독일의 약진 원인으론 여러 가지가 꼽힌다. 첫 번째가 ‘후발자의 이점’이다. 일찍이 알렉산더 거셴크론이 독일과 러시아의 산업화 사례를 관찰한 뒤 설파한 것이 ‘후진성 가설’이다. 후진 사회들은 역설적으로 ‘대도약’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앞선 사회의 경험에서 배우거나 선발 사회가 개척한 기술과 지식을 공짜로 또는 값싸게 획득할 수 있어 빠르고 효율적인 산업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논리다. 독일은 영국 공장을 모방해 자본과 노력, 시간을 줄일 수 있었던 데다 신기술도 자유롭게 적용했다.독일 은행들이 기업에 대한 금융지원뿐 아니라 기업 설립과 운영, 감독, 혁신의 촉진에까지 밀접하게 관여한 것도 특징이다. 소위 ‘D-은행들’로 불린 다름슈타트방크, 디스콘토게젤샤프트, 도이체방크, 드레스트너방크가 1870~1913년 보유한 자산의 가격은 6억마르크에서 175억마르크로 급증했다. 이는 독일 은행들이 보유한 산업자본 주식이 크게 늘어난 영향이다.보불 전쟁 후 독일에 유입된 막대한 전쟁보상금 덕에 창업과 투기 열풍이 분 것도 한몫했다. 배상금으로 철도 같은 기반시설 투자가 늘었고, 새로운 제철기술을 활용한 철도를 이용해 시장에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게 가능해졌다. 실제 당대인들은 이때를 ‘창업시대’로 부르기도 했다. 여기에 독일 특유의 카르텔(기업 연합) 구조가 효율적으로 작동한 측면도 있다.2차 산업혁명 시기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가들의 사례도 이 같은 독일적 발전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소위 ‘대포왕’이라고 불린 알프레드 크루프가 대표적인 경우다.크루프 가문은 16세기부터 에센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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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통신사 9차례 오간 200년간 일본은 강국으로 변신…막부, 해양력 강화…경제수도 오사카 인구 40만명
조선은 1636년 일본 막부의 쇼군(장군)에게 ‘통신사(通信使)’란 정식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1811년까지 아홉 차례나 파견했다.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이라고 부르며 성리학적 지식을 뽐내던 조선 통신사들이 오간 200년간 일본은 강국으로 변신했다.왜인이라고 경멸하며 눈길을 돌렸던 배타적인 통신사들도 놀라면서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수도였던 오사카는 인구가 4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였다. 상업이 발달해 물자가 풍부하고, 많은 사람이 질서를 지키는 도시였다. 도시는 정비가 잘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도로가 숫돌처럼 반반했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췄다. 강과 운하에는 ‘무지개 다리’들이 걸려 있었고, 수많은 선박이 오갔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다니는 거리와 수입품을 전시해놓은 시장들, 목욕의 풍습과 변소의 청결함도 경이로운 눈초리로 기록했다.에도(1868년 이후 동경)는 막부의 쇼군이 거주했던 정치수도였다. 고구려 유민과 신라인들이 개척한 동경만 지역의 작은 어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상업과 무역 등을 염두에 두고 건설한 해양도시였다. 발전을 거듭하더니 18세기 초에는 상하수도 설비 등 각종 인프라가 구축됐고, 인구 100만여 명의 세계적 도시로 변모했다. 반면 20세기 초 한양 인구는 25만 명 정도였다.일본은 발달한 수차를 사용했고, 수리시설을 완벽하게 갖춰 따뜻한 기후를 활용해 삼모작을 하고 있었다. 수산업이 발달해 전 해역에서 어로활동이 활발했다. 혼슈 북쪽 아키다, 아모모리 등의 해역에서 잡은 ‘연어’와 ‘다시마’ 등을 실은 상선들이 조선통신사선들이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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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독일 경제 급부상하며 독일어가 학문 공용어 역할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됐지만 철강·전기·화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이뤄진 ‘2차 산업혁명’은 독일이 주도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독일 산업의 발전상은 놀라웠다.프로이센이 유럽의 주요 경쟁국들보다 빠르게 성장하게 된 것은 1850~1860년대 이후의 일이다. 1830년대만 해도 프랑스의 국민총생산(GNP)은 1960년 미국 달러로 환산할 때 86억달러로 프로이센(72억달러)을 앞섰지만, 1880년이 되면 프랑스 174억달러, 프로이센 200억달러로 역전된다. 1913년이 되면 프로이센의 GNP는 498억달러로 프랑스(274억달러)의 두 배 규모가 된다. 유럽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830년에는 프랑스가 21%로 프로이센(5%)의 네 배를 넘었지만 1880년이 되면 프로이센은 20%로 프랑스(13%)를 크게 앞선다. 1913년엔 프로이센이 40%로 프랑스(12%)의 네 배 수준이 돼 처지가 180도 바뀐다. 1860년 비등했던 에너지 소비량도 1913년이 되면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세 배에 달한다.산업별로 살펴봐도 독일의 성장은 가파르다. 19세기 초 프로이센의 연간 철강 생산량은 5만t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뿐 아니라 합스부르크제국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산업지형도는 급격히 변화한다.1871년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이 통일된 이후 독일의 철강 생산량은 1890년대만 해도 연간 410만t으로 영국(800만t)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1900년이 되면 630만t으로 영국(500만t)을 추월하게 된다. 1910년대가 되면 독일(1360만t)이 오히려 영국(650만t)의 두 배를 넘는 철을 생산하게 된다.전기, 광학, 화학 같은 20세기적 산업 분야를 개척한 것도 독일이었다. 대표적 전기 관련 기업인 지멘스와 AEG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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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재침략 막기 위해 일본을 살피고 배우기보다 멸시…정약용 등은 통신사 거만한 행적과 과시행태 비판
조선통신사 행사는 두 나라의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며,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약점을 파악할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조선이 재침을 방어하고 역습의 기회를 모색한다면, 내정을 샅샅이 탐지하고 해양력을 파악하며 복잡한 해로망까지도 탐지할 기회였다. 물론 ‘시호(승냥이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듯한 불안감, 종묘사직과 능묘까지 훼손당한 적개심과 오기 등이 가득 찼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들의 잘못과 무력감 때문에 파괴된 나라와 피해 입은 백성들에 대한 도리를 떠올려야 했다.일본은 멸시가 아니라 극복의 대상, 학습의 대상이었지만 정치인이면서 학자였던 조선통신사들은 전쟁의 후유증이 심하고, 청나라에 항복한 굴욕적인 상태에서도 일본을 배우려는 자세가 부족했다.조선통신사들은 자신들을 ‘상국(上國)의 사신’ ‘대국(大國)의 사신’ 등으로 지칭하고 일본을 섬오랑캐(島夷), ‘올빼미’라고 불렀다. 하의를 벗고 흑치를 한 풍습을 보면서 야만인이라고 멸시했다. 또한 성리학에 조예가 부족하고 시문에 서투르다고 무시했다. 실제로 도시에서조차 통신사들의 성리학 지식과 한문 및 서예에 감동하는 일본인이 많았다. 신유한 때는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곤혹스러운 사실이 여러 곳에 기록됐다. 일본의 문물과 제도에 감탄하는 신유한조차 그들의 글이 졸(卒)하고 우습다고 표현했다. 또 1636년에 온 김세렴은 조그만 항구에서 일본의 전선을 관찰한 뒤 일본 전선이 우리 배보다 못하다고 평가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일본의 기술 능력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본 정약용은 통신사들의 거만한 행적과 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