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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한민족이 백의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민족은 역사 이래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백의민족 신화는 어느 정도 진실일까. 오늘날 많은 한국인은 한민족이 흰옷을 숭상하고, 즐겨 입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말로 흰옷을 좋아하고 흰옷만 고집했는지를 냉정히 따져본 적은 거의 없다.최공호 박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백의민족에 대한 관념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을 포함한 일제 강점기의 여러 학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백의민족’ 개념이 부각된 것은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국 미술에 대해 ‘색채 결핍론’과 ‘비애미’를 들고나온 데 대한 반론의 성격도 적지 않았다.하지만 정말로 흰옷 착용이 한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특질이었을까.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인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은 삼국시대 이후 빈번하게 발견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에 “부여인은 흰색 옷을 숭상해 흰옷에 소매가 넓은 포와 바지를 입는다”는 기록이 있다. <수서(隋書)>에는 “신라의 복색은 흰색”이라는 묘사가 나온다. 이후 1487년 조선에 명나라 사신으로 온 동월의 저술인 조선부에 이르기까지 흰옷은 외국인의 시선에 한민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포착됐다.이 같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이 백색 패션을 선호해서 의도적으로 추구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우선 고구려 고분벽화 등 현재까지 전하는 전근대 시기 시각자료에선 흰옷에 대한 숭상을 확인하기 어렵다.더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의 적지 않은 문헌에서 “한민족이 흰옷을 피하려고 했다”는 기록을 전하는 점이다. 19세기 충청 지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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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국제관계 눈뜬 소현세자 급사, 포로·환향녀 냉대…전후에도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갇혀 망국의 길로
조선 포로들의 속환가가 초기에는 남자 은 5냥, 여자 은 3냥 수준이었다. 하지만 혈육의 정이 남다른 조선 사람들이 선양을 계속 찾아오자 가격은 150냥에서 250냥 정도까지 올랐고, 심지어 한 고위관리는 아들을 위해 1500냥을 지급할 정도였다. 결국 재력 있는 양반 사대부의 포로들은 귀환했지만, 그것도 몇 차례에 걸쳐서 2000여 명에 그쳤다. 그나마 대다수 백성은 돌아오지 못한 채 남자들은 노예로, 여자들은 첩이나 창기로 전락했다. 그 후예들은 청나라 사람, 중국 사람들로 변했다.관광단이나 사업가, 고구려 유적 답사에 나선 학생들은 선양의 청나라 ‘고궁’과 ‘백탑’에서 선조들의 참상을 몰라 숙연함과 반성하는 마음을 갖기보다 웃고 즐긴다. 식민지 백성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역사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이다.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귀환한 포로를 ‘영웅’으로 환영하는 나라는 자주적이고, 성공한 국가다. 조선은 그 반대였다. 8년 만인 1645년 돌아온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조선과 청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조선과 포로들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청국의 크기와 위상을 절감하고, 국제관계의 실상에 눈을 떠 몽골어를 공부했다. 또한 청나라에 와 있던 아담 샬을 비롯한 천주교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수한 서양문물을 배웠다. 더불어 자명종, 천문의, 세계지도 등 부국강병에 필요한 서양물건을 가지고 귀국한 그의 존재는 성리학자들의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통성에 위협을 느낀 인조의 냉대,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다 결국 2개월 만에 급사했다. 상황과 세자의 시신 상태, 인조의 태도, 당쟁을 고려해 ‘독살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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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패전 후 조선은 청나라 속방으로 전락…백성 50만명 이상 포로로 끌려가
이웃한 국가 간은 협력과 우호관계일 때도 있지만 경쟁과 갈등, 불가피한 충돌도 발생한다. 때로는 우리의 선택이나 상대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제질서 때문에 충돌하기도 한다. 일부 배신자를 제외하고, 국가 간 충돌에서 패배한 국가의 백성에게는 포로, 노예, 죽음의 길이 기다린다.조선은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국가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망각한 성리학자들의 나라였다. 광해군의 정책과 같이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를 외교적으로 이용하면 청나라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청을 자극해 전면전을 초래했다.청태종의 친정군 12만 명의 선발대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넘었지만 12일에야 사실을 보고받았던 정부는 무능했다. 더구나 임진왜란의 대참상을 겪고, 정묘호란이 끝난 지 불과 9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몰현실적인 자주론자들의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불과 45일을 버티다 항복했다.승전국과 패전국은 협의 끝에 9개 조항을 만들어 공표했다.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관계를 끊고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인조가 항복의식을 행한 삼전도에는 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방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상황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조인 때까지 이어졌다.조선의 정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전쟁 기간이 매우 짧았고, 전장이 한반도 북부와 수도권에 한정됐으며 큰 전투가 없었지만 완벽한 패배와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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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식민지에서 태어나면 차별…본국 출산 강행
19세기 말 영국에선 원정 출산이 성행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이었지만 각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부모의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식민지에서 관료로 봉직한 ‘있는 집’ 부인들은 애를 낳기 위해 오랜 뱃길과 불편한 철로를 마다하지 않고 애를 낳으러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특히 영국의 대표 식민지인 인도에 파견 근무하는 고위공직자들의 부인은 지체가 높을수록 아기 출산 시기에 맞춰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가까운 친척이나 자신의 성 혹은 영지에서 출산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장차 태어날 아기의 출생지가 인도가 아니라 영국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모두 자식을 ‘2등 국민’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유대인의 경우 더 심각해서 당시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유대인은 부모가 영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더라도 외국인으로 간주돼 땅을 구입할 수도 없었고 식민지 교역에서 배제됐다. 뿐만 아니라 영국 상인에 비해 두 배의 세금을 내야 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의 유대 상인들은 임신한 부인을 영국으로 원정 출산 보내 영국 시민권을 얻도록 했다고도 전해진다.하지만 모든 식민지 거주 영국인이 본국으로 원정 출산을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론 식민지 출생이란 차별을 떨치기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본국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정책을 찬양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매진하는 인물도 등장했다.대표적 인물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이다. 1907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던 키플링은 우리에겐 <정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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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9세기 경제성장률 유럽에서 가장 높아
철도 발달에 따른 수혜에서 보헤미아 지역은 빠지지 않는다. 페트르 초르네예와 지르지 포코르니 등 체코 학자들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이미 보헤미아 지역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산업지대가 됐다. 국내외 철도 네트워크를 통한 경제 통합의 효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비트코비체 철강사나 필젠에 있던 스코다작업소, 브라우하우스 같은 기업들은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프라하뿐만 아니라 오스트라바, 클라드노(휘텐베르크와 콜베르크바우사의 거점)를 비롯해 기계공업의 중심지였던 브륀, 유리공업에서 강점을 보였던 북부 보헤미아, 직물산업의 중심지였던 동북부 보헤미아 지역 등 보헤미아 전 지역이 비교적 골고루 산업화의 수혜를 입었다.그 결과 합스부르크제국 내 체코인들의 영역은 전체 토지의 26.4%에 불과했지만 제국 전체 인구의 35%를 체코인이 차지할 정도로 보헤미아 지역의 경제 발전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인구 밀도 역시 1854년 ㎢당 84명에서 1880년에는 104명으로 늘었다. 1910년에는 ㎢당 128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는 1910년 현재 오스트리아 지역 인구밀도인 ㎢당 95명을 뛰어넘을 정도로, 도시화가 진행된 징표로 해석됐다. 체코지역에서 인구 1만 명 이상 도시는 1880년 38개에서 1910년 77개로 늘었다. 같은 기간 체코 도시인 숫자는 80만 명에서 19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19세기 후반 지역 간 통합이 강화되면서 상품 가격이 지역별로 큰 차이가 없어졌고, 이자율과 임금 수준도 평준화돼갔다. 당시 인도 곡물가의 지역별 편차가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컸고, 국가 내 이자율 격차는 미국이나 일본이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심했다는 국제비교도 곁들여졌다.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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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진왜란 참사 후에도 반성·개혁없이 당파싸움만…외교·군사적 대비도 없이 청과 대립하다 굴욕
명나라에서는 1627년 산시지역을 시작으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나 확산했다. 병자호란 전후 명나라 중심부는 대부분 농민군에 의해 장악되고 정부는 통제 능력을 상실했다. 1636년에 2대 황타이지(皇太極)’는 ‘대청’을 선포하고, 천자를 칭하면서 중국 통일을 목표로 명나라를 외곽 포위해 동서남북으로 팽창했다. 청나라의 배후지라는 지정학적 위치, 적극적인 친명(向明) 세력으로의 변신은 조선을 필수적 공격 대상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친청정책을 추진할 기회를 놓쳤고, 청나라는 준비를 마친 뒤 사신을 파견해 정묘호란 때 맺은 조약의 위반을 비판하고, 형제관계를 넘어 ‘군신의 예’를 요구했다. 분노한 조정은 국서의 수용을 거부했고, 척화론은 더욱 강력해졌다.그런데 명나라의 도움조차 없는 상태에서 조선이 청나라와 전면적인 군사전을 벌이는 건 불가능했다. 반면 늦게라도 외교전을 지혜롭게 펼친다면 전쟁 가능성과 피해는 낮아질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와 사대부들이 끝까지 외교활동을 하지 않고, 군사적 대비도 충분히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본능적인 두려움과 불안한 현실을 감추려는 자기기만일까?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기득권의 속성 때문일까? 아니면 부족한 현장감과 교조적인 성리학자들의 근거 없는 오만함 때문일까? 분명한 사실은 그들에게 백성의 생명과 삶을 지키려는 책임의식이 희박했다는 점이다.나라와 왕이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백성의 안전과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에서 ‘民(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民은 복종하지만, 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고 했다. ‘쌍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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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9세기 유럽 최대 지배가문…1차 세계대전 때 해체
합스부르크 가문은 19세기까지 유럽 최대 지배가문이었다. 1848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재위했을 때 그는 오스트리아 영지(저지와 상부 오스트리아 공작령과 스티리아 공작령, 카르니오라와 카린티아, 티롤 백작령, 포랄베르크,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이스트리아 변경백령과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시)와 헝가리 국왕령(헝가리 왕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헝가리 군사 접경구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보헤미아 왕령(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령, 상부 및 저지 실레지아 공작령)과 갈리시아 왕국, 크라쿠프 대공령, 부코비나 공작령, 달마티아 왕령, 잘츠부르크 공작령도 그의 땅이었다. 여기에 비록 종이 위의 명목상 영지이긴 하지만 상부 및 저지 루사티아와 로렌, 키부르크도 법적으로는 합스부르크의 영지였다. 1291년 이후 실재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왕국도 이론적으로는 그의 지배지에 포함됐다.과거 스페인 펠리페 2세 시대에 비해 제국의 규모가 줄어든 19세기에도 합스부르크가(家)의 위세는 대단했다. 가문은 375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25만7478㎢의 영지를 보유하면서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제국 내 인종도 550만 명의 독일인과 500만 명의 마자르족, 400만 명의 이탈리아인, 300만 명의 체코인, 250만 명의 루데네인, 200만 명의 루마니아인, 200만 명에 가까운 폴란드인으로 구성됐다. 150만 명 규모의 슬로바키아인과 비슷한 규모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10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의 슬로베니아인과 75만 명의 유대인, 50만여 명의 집시와 기타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그리스인도 제국의 신민이었다.하지만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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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서인 정권의 '향명배금' 정책 고집…국제질서 변화 못읽어 정묘·병자호란 자초
‘호란’은 오랑캐(胡)가 일으킨 ‘난’이라는 뜻이다. 오랑캐는 여진족 계열인 올랑개(兀郞介) 부족을 가리키는 용어지만, 성리학자들은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조선과 청나라(여진족) 사이에 발생한 전쟁은 1627년부터 1637년 초까지 10년간 이어졌고, 1단계 정묘호란(1627년)과 2단계 병자호란(1636~1637년)으로 구성됐다. 전쟁의 배경과 과정, 결과가 한족인 명나라와 여진족(만주)이 주도한 청나라의 흥망에 영향을 미쳤다. 예측과 예방이 가능했지만 저항 없이 항복한 우리 역사에 치욕스러운 패배를 안겨준 전쟁이기도 하다.역사학자 관점에서 조선 시대에는 불가사의하고 수용하기 힘든 사건이 몇 번씩 발생했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뒤를 이은 정묘호란, 특히 불과 9년 뒤 발생한 병자호란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 사건에 책임질 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조선의 위정자들은 왜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을 몰랐을까. 중국과 만주 일대에서 질서가 재편되고, 정복국가가 탄생할 때는 예외 없이 한국지역을 공격했다. ‘고수 전쟁’ ‘고당 전쟁’ ‘여요 전쟁’ ‘여원 전쟁’ ‘조청 전쟁’ ‘6·25전쟁’이 그러하다. 일본열도의 통일과 전환도 비슷했는데, ‘임진왜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일본의 식민지화’ 등이다.그 시대의 상황을 보면 전쟁 발발 예측은 분명했고, 중국에서는 격렬한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1618년에는 요동지역의 태자하 유역인 무순을 점령하면서 대(對)명 전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위협을 감지했던 명나라는 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