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간도협약과 영유권 문제 (上)
방천항에 세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두만강 하구.
방천항에 세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두만강 하구.
‘간도 영유권 갈등’은 정계비가 세워진 1712년부터 1885년, 1887년의 감계회담과 간도협약을 거쳐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 간 매우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 간도협약의 문제성을 인식하고 해결하려면 조약의 정당성과 실효성 여부를 검증하고 그 내용과 배경을 국제질서의 재편이란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19세기 말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과 구질서의 청산을 두고 벌인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고, 이어 사할린 지역과 조선의 지배권, 만주의 선점을 걸고 러시아와 충돌했다. 독도를 차지한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다. 이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벌이던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대한제국과는 을사늑약을 맺어 외교권을 박탈했다. 1907년에는 프랑스와 ‘불·일협약’을 맺고, 러시아와는 ‘제1차 러·일협약’을 맺어 러시아가 구축한 철도·항만·탄광 등 만주의 이익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그런데 1906년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 통감부에 간도 지역에 사는 조선인을 마적 등으로부터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8월 한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용정에 설치하고 육군중좌를 소장으로 파견해 원대한 목표와 행정구역 설정 등 치밀한 계획하에 간도협약을 주도했다.

백두산 천지에 있는 북한의 국경비 5호 비석.
백두산 천지에 있는 북한의 국경비 5호 비석.
연길청까지 설치한 청나라는 대군을 파견해 강경하게 대응했다. 두 나라는 1909년 1월 협상을 시작해 9월 4일 ‘간도협약(圖們江中韓界務條款)’을 맺었다. 전문 7조로 구성된 협약의 제1조는 간도 문제다. ‘일·청 양국 정부는 도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류땅에 있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함을 성명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은 이렇게 간도 영유권을 청나라에 넘기고, 협상카드로 요구한 안봉선(단둥~심양 간 철도), 길회선(연길~회령 간 철도) 등의 만주철도 부설권, 무순·연대의 탄광 채굴권 등 5건을 획득했다.

그런데 체결 직후인 10월 26일 러시아와의 밀약을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그리고 11월 1일에는 통감부 파출소를 철수했다. 일본은 청나라와 협약을 맺으면서 간도 내에 용정 등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네 곳 개방, 영사관 및 분관 설치, 영사재판권 등을 보장받았다. 따라서 간도 지역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일본 정부가 병력을 갖고 다수의 한국 사람과 진출을 시작한 일본인의 관리권을 가진 지역으로 변신했다. 결국 간도협약은 만주를 점령하고 통치하려는 선결작업이었고, 준비 기간을 확보하려는 단계적 전략의 일환이었다. 훗날 만주국을 세우면서 길림성 지역을 ‘간도성’으로 변경한 것은 간도협약에 숨긴 일본의 전략을 밝혀준다.

그런데 청나라는 왜 일본의 책략을 간파하면서도 무리한 요구를 수용했을까? 멸망 3년 전 시점인 데다 ‘반청혁명’ 등 내부 혼란으로 일본에 대항할 능력은 부족했다. 한편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러시아의 남진과 서진을 제어할 세력으로 일본을 이용한다는 전략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또 하나는 국가를 넘은 민족 또는 역사영토와 연관된 장기정책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한국(조선)은 수천 년 동안 영토 갈등을 일으킨 숙명적인 상대였다. 특히 간도는 정계비를 세운 뒤 국경 문제를 일으켰고, 청나라의 발상지라는 상징성도 있었다. 따라서 중국인 특유의 장기전략과 불확실한 국제질서를 고려해 간도에 대한 영구권리를 확정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 많은 이익을 양보했지만, 결과를 보면 올바른 선택이었고, 영악한 후손들은 이 전략을 성공시켰다.

실제 대한제국에 이어 청나라까지 멸망하자 한국인들은 두 강을 건너왔고, 주인 없는 만주를 개발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 공산당의 일원으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지만 일본이 항복하자 간도는 승전국의 일원인 중국의 영토로 굳어졌다. 많은 한민족은 본국으로 귀환했지만 100만 명 이상 남은 그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은 직후 러시아와의 밀약을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했다. 이후 통감부 파출소를 철수했다. 일본은 청나라와 협약을 맺으면서 간도 내에 용정 등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네 곳 개방, 영사관 및 분관 설치, 영사재판권 등을 보장받았다. 따라서 간도 지역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일본 정부가 병력을 갖고 다수의 한국 사람과 진출을 시작한 일본인의 관리권을 가진 지역으로 변신했다. 결국 간도협약은 만주를 점령하고 통치하려는 선결작업이었고, 준비 기간을 확보하려는 단계적 전략의 일환이었다. 훗날 만주국을 세우면서 길림성 지역을 ‘간도성’으로 변경한 것은 간도협약에 숨긴 일본의 전략을 밝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