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북학파의 개혁사상과 정책 (上)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큰 산인 의무려산. 고구려 국경선 지역으로 연행사들이 이곳을 통과했고, 홍대용이 쓴 의 의산이기도 하다.  석하사진문화연구소 제공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큰 산인 의무려산. 고구려 국경선 지역으로 연행사들이 이곳을 통과했고, 홍대용이 쓴 의 의산이기도 하다. 석하사진문화연구소 제공
17세기 후반부터 두꺼운 벽틈으로 미풍이 불어오고, 메마른 땅에서는 샘물이 솟기 시작해 점차 강물로 변해갔다. 북학을 핵으로 삼은 실학이 조선 역사에 등장했다.

북학은 소외됐던 이상주의자들이 주도해 적대감을 가졌던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해 부강한 조선, 잘사는 백성을 목표로 삼자는 사회개혁의 학풍이고 사상운동이었다.

첫째, 그들이 추구한 목적과 제안한 정책은 ‘경세치용’ ‘이용후생’을 거쳐 ‘실사구시’로 단계적인 발전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인식론의 변화, 농사에서 상공업 중시 등 정책의 변동, 서학인 천주교의 수용 등을 놓고 노선을 달리했다. 그리고 기존 체제로부터 음양의 피해를 봤다.

조선은 두 번의 대전쟁과 패배, 기아와 전염병으로 인한 대참사, 양반 관료들의 탐학, 성리학자들의 무능으로 붕괴하는 중이었다. 또한 신분제 일부가 무너지고, 외국과의 비자발적 교섭, 포로들의 귀환, 통신사와 연행사들의 견문 등으로 쇄국과 성리학의 맹신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붕괴의 진행을 막아야 할 조선의 선택은 ‘체제의 강화’란 시대의 반동 또는 부분적인 양보를 통한 개선이었다. 주류들은 전자를 택해 요행을 바라며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소외된 지식인들은 보편적 인성과 성리학의 원론에 충실하면서 사회 개선의 인식과 학문을 자생적으로 만들어갔다.
조선통신사들이 아름다움과 견고함에 감탄한 일본 규슈 북서부 고쿠라성.
조선통신사들이 아름다움과 견고함에 감탄한 일본 규슈 북서부 고쿠라성.
이익은 재야의 자생적인 사상가로서 성리학의 관념성을 배격하고, 현실 개선의 방책을 전방위로 전개한 경세치용학파이다. 뒤를 이은 홍대용은 ‘북학’을 표방하면서 본격적으로 청나라와 서양 문물의 이론과 기술, 지식을 수용해 실생활에 응용하고 도움 주는 연구를 했다. 1765년 연행사의 일원으로 북경에 체류할 때 선교사들과의 필담으로 서양 사상과 천문 등 자연과학을 배우고, 선교사이자 과학자로 청나라에 영향을 미친 마테오 리치를 극찬했다. 그는 <의산문답>의 형식을 빌려 성리학과는 다른 천문론을 펼치면서 우주가 무한하며, 지구 중심이 아니라는 설을 주장했다(김문용 <홍대용의 실학과 18세기 북학사상>).

박지원은 홍대용으로부터 청나라의 사정과 서양의 천문, 지리 등을 배우다가 1780년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때 받은 충격과 학습, 열정으로 <열하일기>에서 신분제도, 수취와 조세, 농사 방식과 상업 등에 대한 개선안을 밝혔다. 또한 <호질전> <양반전> 등의 패관소설 형식으로 사회 비판과 개혁사상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서얼 차별의 현실을 비판했고, 소중화 의식과 향명사대주의를 배격했으며, 농업보다 상업과 산업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과농소초> 같은 농업 발전에 필요한 저서들을 썼지만 정책 변화를 시도할 기회가 없었다. 본인의 성격과 정조 등 기존 세력의 배척으로 50세가 돼서야 한직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임형택 <연암 박지원 연구>).

북학파를 완성한 박제가는 서얼 출신으로 박지원의 제자였고, 명저인 <북학의>를 지어 정조에게 바쳤다. 네 번이나 청나라를 방문하면서 청나라의 문물과 서양 사상, 기술력을 과감하게 수용해 산업을 발전시키고 상업 유통과 무역, 생활의 편리를 주장했다. 심지어는 벽돌을 생산해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궁궐·도로·제방 등을 개축하고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이헌창 <박제가>).

그럼 북학파가 활동하고 실학의 토대가 완성된 18세기 유럽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연행사들이 만난 러시아는 이미 아시아 국가로 변신한 뒤 청나라와 국경 분쟁을 일으켰다. 네르친스크 국경조약을 맺은 후 1728년에는 베링해를, 1741년에는 알래스카를 발견하는 등 동방 개척을 추진 중이었다. 일본은 통신사들의 보고와 <해행문집>에 수록된 기행문에 보이듯 농법 개량으로 생산량이 늘어났고, 어업과 상업이 발전했다. 또한 큰 건축물과 운하 도로망을 갖춘 대도시들이 번성했다. 조선술의 발달로 태평양을 넘고, 동남아시아와 청나라, 유럽과 무역을 벌이면서 문화와 기술을 수입했다. 또한 강한 자의식이 생겨나면서 고유 문화와 신도 천황을 중요시한 국학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자본주의가 시작됐으며, 정조가 등극한 1776년에는 미국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789년에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괴테,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활약하는 ‘질풍노도운동(Sturm und Drang)’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역동적인 시대였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박지원은 홍대용으로부터 청나라의 사정과 서양의 천문, 지리 등을 배우다가 1780년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때 받은 충격과 학습, 열정으로 <열하일기>에서 신분제도, 수취와 조세, 농사 방식과 상업 등에 대한 개선안을 밝혔다. 또한 <호질전> <양반전> 등의 패관소설 형식으로 사회 비판과 개혁사상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서얼 차별의 현실을 비판했고, 소중화 의식과 향명사대주의를 배격했으며, 농업보다 상업과 산업이 중요함을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