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조선과 다른 방식으로 개항·근대화 성공한 일본(上)
시모노세키 해안 미모수소가와 공원에 복원한 포대. 1864년 전쟁 때 4개국의 포격으로 부서짐.
시모노세키 해안 미모수소가와 공원에 복원한 포대. 1864년 전쟁 때 4개국의 포격으로 부서짐.
1866년 프랑스 함대 3척이 영종도와 강화도를 거쳐 서울의 양화대교까지 정찰하고 청나라로 귀환했다. 다시 7척의 전함을 끌고 와 600명의 해병대를 상륙시켜 강화도를 파괴하고 약탈했다. 1871년에는 미국이 아시아 함대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군대로 강화도를 공격해 군인과 백성 300여 명을 죽였다.

이에 앞서 일본은 1853년 미국이 파견한 흑선(군함)의 포함외교에 경악했고, 1854년에는 오키나와와 유·미(琉·美) 수호조약을 맺고 온 미국과 ‘일·미 통상조약’을 맺어 개항을 선택했다.

의아하다. 불과 13년 앞서 선진 외세를 경험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켰고, 1910년에는 식민지로 만들어 아직도 분단의 비극이라는 멍에를 못 풀고 있다.

일본은 무슨 일을 어떻게 벌여 이런 성공을 거둔 것일까. 일본은 몇 가지 점에서 조선과 분명히 달랐다.

첫째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종류와 성격이다. 전통신앙을 계승했고, 18세기 후반에는 국학을 발전시켜 신도사상과 천황제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효와 인, 근왕정신(충)을 중요시한 조선의 성리학과 달리 천황과 주군에 충성하고, 의리와 명예를 준거가치로 삼았다. 불교는 ‘선(禪)’을 매개로 무사도와 결합했고, 백성의 실생활과 밀접해져 주도적인 사회사상 역할을 했다. 비록 16세기 후반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부 지역에 끼친 천주교의 영향도 경시할 수 없다.

둘째,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현재 오이타현 지역에서는 1582년 4명의 소년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했고, 1613년 센다이번이 파견한 유럽 사절단은 범선으로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와 쿠바를 거친 뒤 대서양을 지나 에스파냐에 도착했다. 그들은 로마까지 가면서 문물을 견학하고 통상 활동을 했다. 17세기 전반 바쿠후(幕府·막부)는 수많은 주인선(무역선)을 동남아시아까지 파견했고, 해외에 일본마을(町)을 건설했으며 태국에서는 하급 무사들이 아유타 왕국에서 발생한 쿠데타에 참여했다.

셋째, 난학(네덜란드)을 활용해 서양의 과학과 기술·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지도 제작술·조선술·항해술·무기·천문·의학·농법 등의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을 수용하고, 학교를 세워 적극적으로 나라 발전에 활용했다. 섬나라 일본인들은 인식이 세계로 확장됐고, 신사상인 인본주의와 근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바쿠후 말기에 서양의 압박을 받자 애국심을 발휘하고, 정치와 사회개혁을 신속하게 추진할 능력을 이미 훈련받은 것이다.
일본이 홋카이도와 쿠릴열도 등을 관리했던 북해도 도청.
일본이 홋카이도와 쿠릴열도 등을 관리했던 북해도 도청.
넷째, 쇄국정책을 표방했지만, 바쿠후는 현명하게 4개의 항구를 선택해 개방했다. 홋카이도 남쪽의 마쓰마에는 아이누족, 사쓰마는 유구국, 대마도는 조선, 나가사키의 데지마는 청나라·네덜란드(유럽)와 교류하도록 허가했다. 특히 나가사키는 외국 상인들이 입항할 때 해외의 풍설(정보)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을 정도다. 이 항을 통해 막대한 양의 도자기를 수출해 유럽의 도자기 문화에 자극을 줬고, 주문 생산까지 했다. 전통 그림인 ‘우키요에(부세화)’는 1850년 열린 런던 박람회에 출품한 뒤 인기를 끌어 모네, 고흐 등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번의 다이묘들도 만성적인 재정난 때문에 쇼군 몰래 여러 지역과 밀무역을 시도했다. 결국 일본은 조선의 쇄국과 달리 간접무역을 계속하면서 세계로 열린 ‘반개방’ 국가였다.

다섯째, 경제가 발전해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의 결과를 수용할 토대가 마련됐다. 농법과 농기구 등의 개량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고, 어업과 공업 등의 산업이 발달했다. 기술력의 발전으로 도로망·수운·해운이 발달해 전국적인 규모의 유통권이 형성됐고, 상업이 발달했다. 각 번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운영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상업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도시가 발달해 1721년 에도의 인구는 100만 명을 웃돌았고, 오사카나 교토도 40만 명을 상회했다. 자연스럽게 유연한 사고와 능력을 갖춘 대상인들을 주축으로 전통질서를 비판하면서 신사상과 신문화, 신체제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결국 일본의 성공적인 개항은 실학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이며, 실력을 갖춘 사회 흐름이 형성된 덕분이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조선보다 13년 앞서 선진 외세를 경험한 일본은 어떻게 선진화에 성공했을까. 먼저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종류와 성격이 조선과 완전히 달랐다. 난학(네덜란드)을 활용해 서양의 과학과 기술·문화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쇄국정책을 표방했음에도 현명하게 4개의 항구를 선택해 개방했다. 이에 따라 경제가 발전해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의 결과를 수용할 토대가 마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