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합스부르크 왕가(下)
합스부르크 왕가가 여름휴가를 즐기던 크로아티아의 오파티야. 한경DB
합스부르크 왕가가 여름휴가를 즐기던 크로아티아의 오파티야. 한경DB
철도 발달에 따른 수혜에서 보헤미아 지역은 빠지지 않는다. 페트르 초르네예와 지르지 포코르니 등 체코 학자들에 따르면 19세기 중엽 이미 보헤미아 지역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산업지대가 됐다. 국내외 철도 네트워크를 통한 경제 통합의 효과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비트코비체 철강사나 필젠에 있던 스코다작업소, 브라우하우스 같은 기업들은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프라하뿐만 아니라 오스트라바, 클라드노(휘텐베르크와 콜베르크바우사의 거점)를 비롯해 기계공업의 중심지였던 브륀, 유리공업에서 강점을 보였던 북부 보헤미아, 직물산업의 중심지였던 동북부 보헤미아 지역 등 보헤미아 전 지역이 비교적 골고루 산업화의 수혜를 입었다.

그 결과 합스부르크제국 내 체코인들의 영역은 전체 토지의 26.4%에 불과했지만 제국 전체 인구의 35%를 체코인이 차지할 정도로 보헤미아 지역의 경제 발전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인구 밀도 역시 1854년 ㎢당 84명에서 1880년에는 104명으로 늘었다. 1910년에는 ㎢당 128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는 1910년 현재 오스트리아 지역 인구밀도인 ㎢당 95명을 뛰어넘을 정도로, 도시화가 진행된 징표로 해석됐다. 체코지역에서 인구 1만 명 이상 도시는 1880년 38개에서 1910년 77개로 늘었다. 같은 기간 체코 도시인 숫자는 80만 명에서 19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세기 후반 지역 간 통합이 강화되면서 상품 가격이 지역별로 큰 차이가 없어졌고, 이자율과 임금 수준도 평준화돼갔다. 당시 인도 곡물가의 지역별 편차가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컸고, 국가 내 이자율 격차는 미국이나 일본이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심했다는 국제비교도 곁들여졌다.

앨런 스캐드 런던정경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제국을 외부의 혼란을 잘 견뎌냈고, 변화의 활력이 강했던 나라로 바라본다. 다양한 민족을 통치해온 합스부르크제국의 마지막 몇 년은 민족주의 등장으로 필연적으로 파멸과 쇠퇴로 향하는 길고 긴 과정에 불과했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한 셈이다. 통설에선 19세기 말, 20세기 초 합스부르크제국이 무너진 것이 놀라운 게 아니라 제국이 그처럼 오랫동안 지속된 것이 더 신기한 일이었다.

1870년에서 1913년 사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경제는 매년 평균 1.32% 수준씩 성장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성장이 빠른 수준이었고 오직 독일만이 이에 필적하는 성장을 유지했다. 후발주자 중에는 스웨덴과 덴마크만이 합스부르크제국에 견줄 만했다. 1871년 헝가리 지역에선 성장이 더 빨라 평균 1.7% 수준이었다. 1878년에는 헝가리 지역에서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돼 당시 유럽에 퍼져 있던 대불황의 징후마저 없었다. 비록 제국 내에서 서쪽 지방이 더 빨리 발전하긴 했지만 제국 전체적으로는 19세기 초에 비해 후진성은 신속하게 극복됐다.

물론 이중적인 면도 있었다. 산업 경쟁력이 떨어졌던 오스트리아는 서유럽 선진국과 경쟁하기 힘든 낮은 품질의 제품을 헝가리 지역의 큰 내수시장에 팔아먹으면서 덩치를 키웠다. 그렇다고 헝가리가 손해만 본 것도 아니었다. 헝가리도 제국 내에서 착취당했다기보다 오히려 제국의 양분을 빨아먹었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는 주장까지 제기될 정도다. 실제 1906년 이후로는 여러 민족 문제도 해결 국면이었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통합도 잘 이뤄지고 있었다. 외교적으로도 합스부르크제국은 독일의 든든한 동맹국이었다.

19세기 말 합스부르크제국은 불안 요인도 많았지만 언어·문화·교육의 동질화·집중화 작업도 적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문맹률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독일보다 낮지 않았다. 제국 내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의 위상은 불어나 이탈리아어를 쓰는 것보다 열등한 게 아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민족주의의 영향도 제국 해체의 원심력이 제국 통합의 구심력보다 더 강했다고 단정하긴 힘들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합스부르크제국이 망한 것은 자체로 파멸과 분열의 씨앗을 배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과 그 동맹국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수정론의 요지다. NIE 포인트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1. 합스부르크 왕가의 경제력에 대해 살펴보자.

2. 13세기 유럽에서는 왕가를 어떤 방식으로 정했을까.

3.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