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합스부르크 왕가(下)

그 결과 합스부르크제국 내 체코인들의 영역은 전체 토지의 26.4%에 불과했지만 제국 전체 인구의 35%를 체코인이 차지할 정도로 보헤미아 지역의 경제 발전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보헤미아의 인구 밀도 역시 1854년 ㎢당 84명에서 1880년에는 104명으로 늘었다. 1910년에는 ㎢당 128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이는 1910년 현재 오스트리아 지역 인구밀도인 ㎢당 95명을 뛰어넘을 정도로, 도시화가 진행된 징표로 해석됐다. 체코지역에서 인구 1만 명 이상 도시는 1880년 38개에서 1910년 77개로 늘었다. 같은 기간 체코 도시인 숫자는 80만 명에서 19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19세기 후반 지역 간 통합이 강화되면서 상품 가격이 지역별로 큰 차이가 없어졌고, 이자율과 임금 수준도 평준화돼갔다. 당시 인도 곡물가의 지역별 편차가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컸고, 국가 내 이자율 격차는 미국이나 일본이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심했다는 국제비교도 곁들여졌다.
앨런 스캐드 런던정경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제국을 외부의 혼란을 잘 견뎌냈고, 변화의 활력이 강했던 나라로 바라본다. 다양한 민족을 통치해온 합스부르크제국의 마지막 몇 년은 민족주의 등장으로 필연적으로 파멸과 쇠퇴로 향하는 길고 긴 과정에 불과했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한 셈이다. 통설에선 19세기 말, 20세기 초 합스부르크제국이 무너진 것이 놀라운 게 아니라 제국이 그처럼 오랫동안 지속된 것이 더 신기한 일이었다.
1870년에서 1913년 사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경제는 매년 평균 1.32% 수준씩 성장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성장이 빠른 수준이었고 오직 독일만이 이에 필적하는 성장을 유지했다. 후발주자 중에는 스웨덴과 덴마크만이 합스부르크제국에 견줄 만했다. 1871년 헝가리 지역에선 성장이 더 빨라 평균 1.7% 수준이었다. 1878년에는 헝가리 지역에서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돼 당시 유럽에 퍼져 있던 대불황의 징후마저 없었다. 비록 제국 내에서 서쪽 지방이 더 빨리 발전하긴 했지만 제국 전체적으로는 19세기 초에 비해 후진성은 신속하게 극복됐다.
물론 이중적인 면도 있었다. 산업 경쟁력이 떨어졌던 오스트리아는 서유럽 선진국과 경쟁하기 힘든 낮은 품질의 제품을 헝가리 지역의 큰 내수시장에 팔아먹으면서 덩치를 키웠다. 그렇다고 헝가리가 손해만 본 것도 아니었다. 헝가리도 제국 내에서 착취당했다기보다 오히려 제국의 양분을 빨아먹었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는 주장까지 제기될 정도다. 실제 1906년 이후로는 여러 민족 문제도 해결 국면이었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통합도 잘 이뤄지고 있었다. 외교적으로도 합스부르크제국은 독일의 든든한 동맹국이었다.
19세기 말 합스부르크제국은 불안 요인도 많았지만 언어·문화·교육의 동질화·집중화 작업도 적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문맹률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독일보다 낮지 않았다. 제국 내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의 위상은 불어나 이탈리아어를 쓰는 것보다 열등한 게 아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민족주의의 영향도 제국 해체의 원심력이 제국 통합의 구심력보다 더 강했다고 단정하긴 힘들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합스부르크제국이 망한 것은 자체로 파멸과 분열의 씨앗을 배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과 그 동맹국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수정론의 요지다. NIE 포인트

2. 13세기 유럽에서는 왕가를 어떤 방식으로 정했을까.
3.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