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피할 수 있었던 조·청 전쟁
선양 시내에 있는 백탑. 끌려간 조선 포로들이 매매되던 시장이었다.
선양 시내에 있는 백탑. 끌려간 조선 포로들이 매매되던 시장이었다.
명나라에서는 1627년 산시지역을 시작으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나 확산했다. 병자호란 전후 명나라 중심부는 대부분 농민군에 의해 장악되고 정부는 통제 능력을 상실했다. 1636년에 2대 황타이지(皇太極)’는 ‘대청’을 선포하고, 천자를 칭하면서 중국 통일을 목표로 명나라를 외곽 포위해 동서남북으로 팽창했다. 청나라의 배후지라는 지정학적 위치, 적극적인 친명(向明) 세력으로의 변신은 조선을 필수적 공격 대상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친청정책을 추진할 기회를 놓쳤고, 청나라는 준비를 마친 뒤 사신을 파견해 정묘호란 때 맺은 조약의 위반을 비판하고, 형제관계를 넘어 ‘군신의 예’를 요구했다. 분노한 조정은 국서의 수용을 거부했고, 척화론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런데 명나라의 도움조차 없는 상태에서 조선이 청나라와 전면적인 군사전을 벌이는 건 불가능했다. 반면 늦게라도 외교전을 지혜롭게 펼친다면 전쟁 가능성과 피해는 낮아질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 정부와 사대부들이 끝까지 외교활동을 하지 않고, 군사적 대비도 충분히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본능적인 두려움과 불안한 현실을 감추려는 자기기만일까?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기득권의 속성 때문일까? 아니면 부족한 현장감과 교조적인 성리학자들의 근거 없는 오만함 때문일까? 분명한 사실은 그들에게 백성의 생명과 삶을 지키려는 책임의식이 희박했다는 점이다.

나라와 왕이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백성의 안전과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에서 ‘民(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民은 복종하지만, 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고 했다. ‘쌍방책임론’이다. 하지만 이런 가치관은 크게 변질했고, 임진왜란의 처참한 상황 후에도 반성과 책임의 통감, 개혁정치의 구현은커녕 관직과 토지, 노예 소유를 둘러싼 당파싸움이 더욱 심해졌다. 또한 나라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안전과 기득권에도 치명타를 입힐 후금의 공격에 비현실적인 태도와 타자의 입장으로 대응했다. 성리학의 ‘명분론’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파견한 사실을 의리와 모화사상으로 포장해 절대적인 가치로 만들었다. 문관 중심의 조정은 청나라의 존재와 요구를 무시했고, 더더욱 친명배금정책을 고수했다.

물론 인조가 군제체를 개편하고, 군비를 증강하는 등 대비책을 강구한 것은 사실이다. 9만 명 정도로 속오군을 편제하고, 수군도 3만 명 정도로 늘려 전선을 약 600척까지 확장했다. 하지만 ‘이괄의 난’이 발생하면서 전투력이 강하고 청과 대결할 수 있는 북방군은 크게 손실을 봤고, 속오군도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드디어 1636년 12월 9일 청태종이 파병한 12만 명의 군사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이 구축한 해양방어 체제를 우회한 대군은 전광석화처럼 남진했고, 봉화 체계는 임진왜란 때와 동일하게 고장나 조정은 같은 달 12일에야 알았다. 청군은 13일 평양, 개성을 거쳐 불과 1주일 만인 14일 서울 근교에 도달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탈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1만4000명의 병력으로 농성전을 폈다. 하지만 기대했던 조선 군대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했고, 의병활동도 거의 없었다. 점차 식량이 소진되고, 사기가 떨어지는 와중에 강화도가 1월 22일 오후 함락당했다. 세자 등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26일에 전해지자 인조와 조정은 항전 의지를 상실했다. 그리고 1월 30일(음력)에는 불과 47일이라는 단기 농성을 끝내고 삼전도로 걸어가 청태조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항복했다. 이때 몇 가지 굴욕적인 조항을 수용했는데, 그중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서 예를 지킨다’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 체제로 편입돼 1876년(강화도 조약, 조·일 수호조규) 또는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직전까지 자주성을 양보하고 간섭을 받았다.

현실을 잘 모르는 교조적인 성리학자들은 임진왜란의 대참사를 경험하고도, 반성 없이 또 실패를 자초했다. 백성들은 또 한번 피해를 입었고, 무려 50만~60만 명이 포로로 잡혀 겨울날 고향을 떠나 만주로 끌려갔다.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는 기준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역사에 죄를 지으면 그것이 간신이다. 미래가 매우 불투명한 현재. 훗날 간신으로 기록될 인물들이 되도록 적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636년 12월 9일 청태종이 파병한 12만 명의 군사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인조는 강화도로 탈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채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1만4000명의 병력으로 농성전을 폈다. 세자 등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이 26일 전해지자, 인조와 조정은 항전 의지를 상실했다. 그리고 1월 30일(음력)에는 불과 47일이라는 단기농성을 끝내고 삼전도로 걸어가 청태조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항복했다. 이때 몇 가지 굴욕적인 조항을 수용했는데, 그중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서 예를 지킨다’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 체제로 편입돼 1876년(강화도 조약, 조·일 수호조규) 또는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직전까지 자주성을 양보하고 간섭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