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엄격한 도제교육의 그늘 (上)
한경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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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게르만족은 무기 제작과 관련이 깊은 대장간 일처럼 특수한 기예를 갈고닦을 필요가 있는 수공업을 존중했다.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금속을 다루는 일 외에도 제빵, 정육업, 목수 등이 별도의 수공업 분야로 등장했고,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동업조합(길드·Zunft) 체제로 발전해나갔다. 문헌에 등장하는 동업조합 중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106년 결성된 보름스 어류상인 단체를 꼽을 수 있다. 전설상으로는 마인츠 방직업자 단체가 1099년 결성됐다고 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이어 1128년 결성된 뷔르츠부르크 제화업 단체 등 다양한 단체가 등장한다.

초창기 이들 단체는 라틴어로 ‘fraternitas’ ‘consortium’ ‘societas’ ‘unio’ 같은 단어로 불렸고, 훗날 독일어로 된 사료에 따르면 북부독일에선 ‘Gilde’ ‘Amt’ 등이 주로 쓰였다고 한다. 동부독일에선 ‘Zeche’ ‘Einung’ ‘Innung’ 같은 용어로 불렸고, 16세기 이후엔 독일어권 지역에서 ‘Zunft’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됐다. 12세기 동업자 단체 길드 등장길드가 도시국가의 정치 영역에까지 큰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에선 13세기 초까지 대부분 도시에서 30~40개 길드가 활동했다. 베네치아에는 142개 길드가 있었다. 1380년대 크레모나에는 8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볼로냐에는 9000명의 길드 조합원이 활동한 것으로 전해질 정도다.

이들은 도시를 장악한 귀족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쳐 무장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면세특권을 철폐하고자 조직적 활동도 했다. 무장 조합들은 성인 또는 구역의 이름을 따거나 별, 선원, 말, 사자, 용 등의 문양을 내세웠다. 피렌체에서 공무원들은 ‘인민과 길드의 수호자’ 이름으로 각종 법령을 발표했다. 1293년 파두아에서 무역길드들은 “파두아시를 모든 폭군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평화상태의 코뮌으로 유지하고 보전하기 위해 단일 기구, 협회, 형제단, 연맹을 구성한다”는 합의를 이루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시에나에서 길드의 높은 정치 참여 활동을 두고 “식료품을 팔고 무두질하거나, 신발을 만들던 사람들이 도시를 통치하는 것은 ‘똥통정부’와 다름없다”는 외부인의 비판이 튀어나왔을 정도다.

플랑드르 지역에서도 길드는 융성했다. 길드는 과세로부터 보호를 요구했고 정치에도 참여하려고 했다. 리에주 같은 곳에선 1303년부터 시의회 의석 절반을 길드가 차지했다. 1520년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일기에서 앤트워프를 지나는 성모승천 대축일 행렬에 대해 ‘온 도시 사람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신분과 길드를 알리는 표식이 있었다. 금세공업자, 도장공, 석공, 테두리장식공, 조각공, 가구장이, 목수, 선원, 어부, 고기장수, 무두장이, 옷장수, 빵장수, 재단사, 신발장사 등’이라고 묘사하며 당시 다양한 모습으로 번창했던 길드의 모습을 전하기도 했다. 정치참여·상호부조 등 다양한 활동직업 노동의 종류에 따라 특화 편성된 수공업자 연합체인 이들 길드는 사망, 질병 및 기타 재난이 발생할 경우 동료들에게 상호 원조를 제공했고, 경제 영역을 서로 보장했다. 상호 부조도 주요 역할이었다. 내부에서는 ‘노동’을 규제하고 외부엔 ‘독점화’를 요구했다. 생산 과정과 경영 관리는 철저히 통제했다.

이를 위해선 특히 동업조합 외부로부터 경쟁을 배제하는 게 중요했다. 결국 최저가격을 유지하는 등 길드 회원부터 각종 경쟁에서 제한을 받았다. 어떤 장인(마이스터)도 그가 계승해온 이외의 노동을 해선 안 됐다.

한 장인이 다른 장인 밑에서 피고용인처럼 일해서도 안 됐다. 이를 두고 막스 베버는 “중세의 길드 목록은 200종 이상이 기록돼 있는데, 기술적 견지에서 보면 20~30종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라고 촌평했다. NIE 포인트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1. 길드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2. 유럽에서 길드가 융성한 이유는 뭘까.

3. 길드의 세력이 커지면서 어떤 현상이 발생했는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