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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松茂柏悅 (송무백열)

    ▶ 한자풀이 松: 소나무 송 茂: 무성할 무 柏: 잣나무 백 悅: 기쁠 열 소나무의 무성함을 잣나무가 기뻐함 남이 잘되는 것을 좋아함을 이름 - 중국 서진의 문인 육기(陸機)가 쓴 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진실로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하고 지초가 불타자 혜란이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 송무백열(松茂柏悅)은 ‘소나무의 무성함을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벗이 잘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백(柏)은 원래 측백나무를 가리키지만, 현재는 잣나무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겨울이 되어도 푸른 빛을 잃지 않아 예부터 선비의 꼿꼿한 지조와 기상을 상징한다. 송백지조(松柏之操, 송백의 푸른 빛처럼 변하지 않는 지조), 송백지무(松柏之茂, 언제나 푸른 송백처럼 오래도록 영화를 누림) 등이 그 예다. 공자는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까지 푸르름을 안다”라고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인간의 지조에 빗댄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도 공자의 이 말에서 제목을 빌려온 듯하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푸르면서도 서로 모습이 비슷해 흔히 가까운 벗을 비유하는 데 사용한다. 송무백열이 대표적 사례다. 혜분난비(蕙焚蘭悲)는 혜란이 불에 타니 난초가 슬퍼한다는 뜻으로, 이 또한 벗의 깊은 우정을 이르는 말이다. 혜(蕙)는 난초의 한 종류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백아(伯牙)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던 절친한 벗 종자기(種子期)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는 타지 않았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은 여기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로, 평생 진정한 벗 한 명 얻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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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堀墓鞭屍 (굴묘편시)

    ▶ 한자풀이 堀: 굴 굴 墓: 무덤 묘 鞭: 채찍 편 屍: 주검 시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하다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이름 - 오자서(伍子胥)는 춘추시대 정치가로 초나라 사람이다. 그는 초나라 평왕의 태자 건의 태부(太傅: 왕의 고문 격)요 충신이었던 오사(伍奢)의 아들이었다. 건의 소부(少傅)였던 비무기가 오사를 시기해 평왕에게 참소하자, 평왕은 오사와 그의 큰아들 오상(伍尙)을 죽이고 자서까지 죽이려 했으나 재빨리 몸을 피해 오나라로 망명했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합려를 도와 강대국을 이룬 뒤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위해 초나라로 쳐들어갔지만 평왕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생전에 오자서의 보복을 예견한 평왕이 자신의 무덤을 깊은 연못 속에 만들고 묘를 조성한 일꾼 500명을 모두 죽여 버린 탓에 무덤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인의 도움으로 왕의 무덤을 찾은 오자서는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철장(鐵杖) 300을 쳐 분을 풀었다.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는 이 소문을 듣고 “그대의 그러한 복수 방법은 지나친 게 아닌가…”라고 책하였다. 에 나오는 얘기다. 굴묘편시(掘墓鞭屍)는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하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도를 넘는 지나친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극형을 추시하던 부관참시(剖棺斬屍)도 의미가 비슷하다.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다. 우리나라는 특히 연산군 때 성행했으며 김종직(金宗直), 송흠(宋欽), 한명회(韓明澮),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성현(成俔) 등이 이 형을 받았다. 참고로 역사적으로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한 극형은 능지처참(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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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雀鴻鵠 (연작홍곡)

    ▶ 한자풀이 燕: 제비 연 雀: 참새 작 鴻: 큰기러기 홍 鵠: 고니 곡 제비가 어찌 기러기의 마음을 알랴 소인은 대인의 뜻을 헤아리지 못함 - 진(秦)나라는 수백 년간 지속된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기원전 221년 중국 천하를 통일했지만, 폭정으로 민심을 잃어 15년 만에 멸망했다. 쌓기는 어렵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인 게 권세의 탑이다. 진 멸망의 첫 봉화는 양성(陽城)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진승(陳勝)이라는 자가 올렸다. 그가 밭에서 일하다 잠시 쉬고 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놈의 세상, 뭔가 뒤집어 놓아야지. 이래서는 어디 살 수가 있겠나!” 주위의 머슴들이 일제히 비웃었다. “여보시게, 머슴 주제에 무엇을 하겠다고?” 진승이 탄식하듯이 말했다. “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오(燕雀安知 鴻鵠之志).” 진시왕이 죽고 아들 이세(二世)가 왕위를 이었지만 포악함과 사치는 아버지보다 더했다. 백성은 삼족을 멸한다는 형벌이 두려워 불만조차 숨겼다. 후에 진승은 오광(吳廣)과 함께 징발되어 일행 900여 명과 함께 장성(長城)을 수비하러 갔다. 한데 대택(大澤)이라는 곳에서 큰비를 만나 기일 내에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건 불가능했다. 늦게 도착하면 참형(斬刑)에 처해지니 차라리 반란을 일으키는 게 더 나을 듯했다. 진승·오광은 뜻을 같이하고 인솔자인 징병관을 죽인 뒤 군중을 모아 놓고 말했다. “어차피 늦게 목적지에 도착해도 우리는 죽으니 사내대장부답게 이름이나 날리자.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있다더냐?” 두 사람은 파죽지세로 주위를 함락시켰고, 진승은 나라 이름을 장초(長楚)라 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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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歸去來辭 (귀거래사)

    ▶한자풀이 歸: 돌아갈 귀 去: 갈 거 來: 올 래 辭: 말씀 사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으로 돌아감 - 귀거래사(歸去來辭)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위진남북조시대 동진(東晋) 말~남조(南朝) 송 초의 시인이다. 유토피아 무릉도원을 노래한 ‘도원화기’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남겼다. 집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고 스스로를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도교와 불교에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을 외고 다닐 정도였다. 좨주(祭酒: 국자감의 우두머리)로 벼슬을 시작해 참군(參軍)을 거쳐 팽택현령에 임명됐으나,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살았다.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유명한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썼다. 시골로 은거해 농사를 지었고, 평생 가난과 병에 시달렸지만 끝내 권세와 타협하지 않았다. 따스한 인간미와 담담한 기풍은 당시의 선비들이 즐겨한 유희 문학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 평범한 시풍이어서 당시에는 멸시에 가까운 평을 받았지만, 후에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시풍은 당나라 맹호연 왕유 유종원 백거이 등을 비롯해 많은 시인에게 영향을 미쳐 중국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다음은 ‘귀거래사’의 내용이다. ‘자, 돌아가자. 숨 막히는 속세와의 인연은 끊어버리자. 이제 다시 벼슬에 올라 무엇을 더 얻으리. 따뜻한 피붙이들의 말을 귀히 여기고, 거문고 소리 들고 책 읽으며 수심을 날려버리자. 농부가 나에게 봄이 찾아오고, 서쪽 논밭에서 농사일이 시작됐다고 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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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匹夫之勇 (필부지용)

    ▶한자풀이 匹: 짝 필 夫: 사내 부 之: 갈 지 勇: 용감할 용 하찮은 남자의 용기라는 뜻으로 혈기만 믿고 함부로 부리는 만용 - 맹자는 왕도(王道)정치의 실현을 위해 여러 나라를 돌며 유세하기로 하고 먼저 양나라로 갔다. 양혜왕(惠王)이 맹자를 정중히 맞으며 이웃 나라와는 어떻게 국교를 맺는 게 좋은지 물었다. 맹자가 답했다. “대국은 소국을 받드는 마음으로, 겸허한 태도로 사귀지 않으면 아니 되옵니다. 이는 인자(仁者)라야 할 수 있는 어려운 일이지만, 은나라의 탕왕이나 주나라의 문왕은 이미 이것을 행했습니다. 또한 소(小)가 대(大)를 받드는 것은 하늘의 도리이옵니다. 무왕(武王)의 할아버지 대왕이 그것을 행했기 때문에 주나라는 뒤에 대국을 이루게 되었고, 월나라 왕 구천은 숙적 오나라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늘을 즐기는 자는 천하를 보존할 수 있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나라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혜왕은 매우 훌륭한 도리라고 탄복했지만 양나라는 어느 나라나 받들기만 해야 할 형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맹자에게 재차 물었다. “나에게는 해가 된다고 하시겠지만, 용(勇)을 즐기는 성품이 있으니 어찌해야 하오?” 맹자가 물끄러미 혜왕을 바라보며 정중히 답했다. “소용(小勇)을 즐겨서는 아니 되옵니다. 칼을 매만지고 눈을 부라리며 너 같은 자는 나의 적수가 아니라고 하는 따위는 필부(匹夫)의 용(勇)으로, 겨우 한 사람이나 상대할 따름이옵니다. 더 큰 용기(勇氣)를 지니십시오.” 필부지용(匹夫之勇)은 하찮은 남자의 용기라는 뜻으로, 소인의 혈기에서 나오는 경솔한 만용을 이른다. 자주 사용하는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도 맹자와 양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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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口尙乳臭 (구상유취)

    ▶한자풀이 口: 입 구 尙: 오히려 상 乳: 젖 유 臭: 냄새 취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다 말과 행동이 아주 유치함 - 한나라 왕 유방(劉邦)이 초나라의 항우(項羽)와 천하를 걸고 싸우던 때의 일이다. 한때 한나라에 복종했던 위나라 왕 표(豹)가 부모의 병간호를 핑계로 평양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런데 귀국한 표는 하진(河津)을 차단하고 항우 편에 붙었다. 분노한 유방은 표를 치기 위해 한신(韓信)을 보냈다. 군대를 싸움터로 보내면서 유방이 역이기에게 물었다. “표 군사의 대장은 대체 누구냐?” “백직(栢直)이라는 자입니다.” “뭐, 백직이라고?” 유방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자는 구상유취(口尙乳臭)야. 백전백승(百戰百勝)한 한신을 절대 당해낼 수 없지.” 유방의 호언장담처럼 표는 도저히 한신의 적수(敵手)가 되지 못했다. 한신은 순식간에 위나라 군사를 무찌르고 표를 사로잡아 유방에게 압송했다. 끌려온 표가 머리를 조아려 간청하자, 유방은 노여움을 거두고 형양의 수비를 맡겼다. 에 나오는 이야기다. 구상유취(口尙乳臭)는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는 뜻으로, 말과 행동이 아주 유치함을 일컫는 말이다. 어리고 하잘것없음을 비난조로 이르는 말이다. 입에서 젖비린내가 난다는 황구유취(黃口乳臭) 황구소아(黃口小兒)도 뜻이 같다. 황구(黃口)는 새 새끼의 주둥이가 노랗다는 뜻에서 비롯됐으며, 철없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표현이다. 삼척동자(三尺童子)는 키가 석 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 철없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식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식으로 쓰인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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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敬而遠之 (경이원지)

    ▶ 한자풀이 敬: 공경할 경 而: 어조사 이 遠: 멀 원 之: 갈 지 존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않는다 겉으로는 공경하되 속은 멀리하다 - 공자는 평소 귀신이나 죽음, 괴이한 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제자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가 답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거늘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未能事人 焉能事鬼)” 자로가 다시 공자에게 물었다. “감히 여쭙건대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다시 답했다. “삶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 인문주의적 전통을 계승한 공자는 이처럼 귀신에 대해 명확한 한계를 설정했다. 공자의 이런 생각은 다음 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백성이 의롭게 되는 일에 마음을 쏟고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공자는 귀신의 존재를 명확히 부인하지 않았으나 그 존재를 강조하지도 않은 것이다. 한나라 유향(劉向)이 저술한 에 나오는 다음 대화에도 공자의 그런 입장이 잘 나타난다. 자공이 공자에게 ‘죽은 사람에게도 지각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는 “죽은 자에게 지각이 있다고 말하자니 효성스러운 자손이 생업에 방해되면서까지 장사에 몰두할까 염려되고, 지각이 없다고 말하자니 불효한 자손이 죽은 이를 유기하고 장사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걸 알고 싶거든 기다리다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가까이하지도 멀리하지도 않는다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도 함의가 비슷하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불가근불가원을 원칙으로 해라. 너무 가까이해서 좋을 일이 없다’ 식으로 쓰인다. 겉으로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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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街談巷說 (가담항설)

    ▶한자풀이 街: 거리 가 談: 말씀 담 巷: 거리 항 說: 말씀 설 길거리나 항간에 떠도는 뜬소문 하찮은 이야기나 소문을 일컬음 - 반고(班固)는 후한 초기의 역사가이자 문학가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기전체 역사서인 를 편집했으며 등의 작품을 남겼다. 반고의 문학성은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왕충(王充)은 후한시대 유물론자로, 공자 맹자 등 성인의 추앙을 반대해 비난도 받았지만 학문은 매우 깊었다. 왕충이 어느 날 반고의 등을 두드리며 “너는 후에 반드시 한나라 역사를 쓸 것이다”라고 했다. 이때 반고는 열세 살이었고 왕충은 반고보다 다섯 살 많은 열여덟 살이었다. 인재가 인재를 알아본 것이다. 명마도 백락(말의 최고 전문가)을 만나야 세상에 알려진다는 뜻으로, 재능 있는 사람도 그 재주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야 빛을 발한다는 백락일고(伯樂一顧)가 연상되는 일화다. 반고는 소설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小說)은 패관(稗官: 민간에 나도는 풍설과 소문을 수집하던 말단 관원)으로부터 나왔으며, 가담항설(街談巷說)과 도청도설(道聽塗說)로 만들어졌다.” 가담항설(街談巷說)은 길거리에 떠도는 뜬소문으로, 하찮은 이야기를 이른다. 풍설(風說) 풍문(風聞)과 비슷한 말이다. 도청도설은 에 나오는 말로, 길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 길에 흘려버린다는 뜻이다. 공자는 “길에서 들은 이야기를 길에서 옮기는 것은 덕을 버리는 짓이다(道聽而塗說 德之棄也)”라고 했다. 말과 관련된 고사성어는 많다. 설왕설래(說往說來)는 서로 변론을 주고받으며 옥신각신하거나 말과 말이 오가는 것을 이르며 마이동풍(馬耳東風)은 ‘말의 귀에 동풍(東風)’이라는 뜻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