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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레스코프 '왼손잡이'

    당신 왼손에 새겨진 글자 하나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소설이 있다. 종이에 메모를 하면서 따라 읽어야 무슨 이야기인가 대충 감 잡을 수 있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그냥 까닥까닥 엄지발가락을 흔들면서 읽어도 아무 지장 없는 소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러시아 1급 소설들은 전자인데, 딱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주로 ‘스키’나 ‘레프’ ‘세프’로 끝나기 때문이다. 분명 이 ‘스키’가 그 ‘스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딴 ‘스키’일 때 느껴지는 허망함(그러면서 등장인물들은 또 왜 그다지도 많단 말인가. ‘스키’들이 떼로 등장할 때의 어리둥절함이란, 말을 말자). 그러니 어쩌나. 백지 위에 남의 집 가계도를 열심히 그려가면서 소설을 읽어나갈 수밖에. 우리에게 러시아 소설들이 시베리아 잣나무처럼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좋을 존재로 남은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왼손잡이》는 따로 메모가 필요 없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이름이 그냥 ‘왼손잡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우리에게 도통 메모할 틈을 주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서둘러 넘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즉, 플롯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이란 뜻이다.사실 ‘왼손잡이’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영국에서 현미경을 통해서야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인공 벼룩(이 벼룩은 열쇠를 넣어 돌리면 펄쩍펄쩍 뛰어오르기까지 한다)을 선물받은 러시아 황제는 자국의 기술이 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믿었고, 그래서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장인들에게 이 인조 미생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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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우리는 모두 더블린 사람들 어떤 도시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낳기도 하지만 어떤 문학작품은 도시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없었다면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쓸 수 없었겠지만 더블린에 사는 인간 군상을 그린 ‘더블린 사람들’이 세상에 나온 뒤로 더블린은 더 이상 그 이전의 더블린일 수 없게 되었다. ‘더블린 사람들’ 이전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한 도시였지만 ‘더블린 사람들’ 이후 더블린은 ‘더블린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니까 더블린이라는 도시에 살아서 더블린 사람들인 것이 아니라 더블린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서 더블린인 것이다. 뉴욕이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뉴요커가 되는 것이 아니라 뉴요커들이 사는 곳이 뉴욕인 것처럼, 파리에 사는 사람들이 파리지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파리지앵이 사는 곳이 파리인 것처럼. 대개는 도시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규정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의 특징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뉴요커라고 부를 때, 파리지앵이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의 물리적 특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그러니 우리가 뉴요커라고 부를 때, 파리지앵이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것들은 특정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특성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욕망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더블린 사람들’이야말로 더블린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머지 더블린이라는 도시와 거의 무관해 보일 정도다. 그러니까 ‘더블린 사람들’이란 더블린이라는 특정한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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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지지워지 않는 얼룩 초등학교 6년 내내 교복을 입어야 하는 학교에 다닌 나는 유독 교복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다. 그때는 하복도 동복도 달랑 한 벌뿐이었고 동복 상의에 부착하는 흰 깃만 두 개였다. 5학년 여름, 담임선생님 심부름으로 몸이 아파 학교에 나오지 못한 K의 집에 병문안을 갔다. 그런데 그날 내가 점심을 먹으며 흘린 반찬 국물이 교복 상의의 왼쪽 가슴께에 묻어 있어 계속 신경이 쓰였다. K는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소파에 누워 있었고 K의 엄마가 과일을 가지고 나와 앉아 찬찬히 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같은 동네라 부모가 뭘 하고 사는지 정도는 다 아는 사이였고 친구의 엄마는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키가 크구나. 그런데 교복에 뭘 묻히고 다니니 여자애가.” K와 나는 그 후로 더 친해지지 못했고 남녀 학교로 갈라져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날 수돗가에 가 얼룩을 지워보려고 그토록 애썼지만 얼룩은 남아 있었고 K와 친해지지 못한 이유가 그 얼룩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은 인생의 얼룩에 관한 소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얼룩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소설의 제목처럼 ‘오점’(stain)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필립 로스는 80세에 가까운 할아버지이고 영미권의 평론가들이 ‘현대 미국을 충실히 기록한 거장’이라고 평가하는 작가다.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미국 남성 잡지 ‘플레이보이’에 연재되었던 작품들을 모은 앤솔러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에 실린 ‘이웃집 남자’라는 단편소설이었다. 자신의 아내가 이웃집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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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들 세상에는 수많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 제가 접한 것만 해도 몇 가지는 떠올릴 수 있겠군요.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아버지와 아들의 과묵한 종말론적 여행기입니다. ‘한낮의 시선’을 포함한 이승우의 소설은 아버지=신에 대한 기나긴 애증서사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김애란의 근작 ‘두근두근 내 인생’은 먼저 늙어가는 자식과 어린 부모에 대한 속 깊은 청춘소설입니다. 황정은의 ‘모자’는 아버지가 조용하고 침울한 모자가 되어버리는 매력적인 이야기였죠.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의 원제는 ‘아버지들과 아들들’입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어떤 아버지와 어떤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구세대로서의 ‘아버지들’과 신세대로서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인 거죠. 소설 속의 아버지들은 귀족의 정신과 로맨틱한 몽상, 그리고 예술에 대한 숭배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유럽과 러시아에서 19세기 초중반 수십년을 풍미한 게 이른바 낭만주의였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런 낭만적 ‘아버지들’에 대한 ‘아들들’의 반항이 시작됩니다. 예술적 ‘교양’이 넘쳤던 ‘아버지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들들은 거칠고 완강한 유물론자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술과 영혼의 단련보다 개구리 해부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을 매료시킨 것은 고상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유물론적인 사고였습니다. 물론 아직 성숙한 ‘이념’에는 이르지 못해서 ‘속류적’ 유물론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사람들은 이 신세대들을 ‘허무주의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니힐리즘이라는 말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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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더 많은 불행, 더 많은 환란을! 중독은 대개 아무 의미도 갖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술이나 문장에 중독되는 건 문장에 심취해서도 술을 사랑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사랑하고 취하려 애쓰는 척 스스로를 몰아가려는 경향에 불과하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은 타당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중독엔 딱 꼬집어 말할 만한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 맥락이 있다면 그건 중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몰입의 속도와 관련될 뿐, 어떤 일관된 내용과 지향점을 갖지 않는다. 그저 빠지기 위해 빠져들 뿐이다. 《몰락하는 자》는 내뱉기에 중독된 자의 처절한 자기고백으로 읽힌다. “글렌과 냉혹성, 글렌과 고독, 글렌과 바흐, 글렌과 골트베르크 변주곡, 난 생각했다. 글렌과 산림 스튜디오, 인간에 대한 글렌의 증오, 음악에 대한 증오, 음악인에 대한 증오, 난 생각했다. 글렌과 간결함, 식당을 둘러보면서 난 생각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아야 해, 난 생각했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옐리네크 등과 더불어 20세기 독일어권 문학계의 이단아로 통한다. 셋은 공히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했으나 모국에 대한 분노와 인간과 예술에 대한 환멸을 독자적인 방식의 언어 살해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종종 같은 범주로 묶인다. 하지만 문학사의 특정 경향은 한약방의 약재 상자처럼 일목요연하게 분류될 수 없는 법이다. 문학은 결국, 어떤 개인의 지독한 체취에 불과할 수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기 안의 요설들을 가감 없이 토해내는 방식으로 기존 소설의 서사구조를 뒤틀어놓는다. 그렇게 그는 오스트리아 문학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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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날카로운 칼로 도려낸 소설가의 삶 가령 이런 칼이 있습니다. 누대를 이어온 장인이 만든 이 칼은 자르는 식재료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이 칼로 다듬은 생선은 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다른 칼로 뜬 회와는 맛이 확연히 다릅니다. 세포의 변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지요. 과일을 깎아두면 색과 맛이 변하지 않으며 양파를 다져도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이 칼로 살아있는 짐승을 단칼에 베면 처음엔 선명한 근육의 결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제야 피의 냄새를 먼저 맡을 수 있을 것이며 이윽고 천천히 방울져 맺히는 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인간 혹은 세계를 한 개의 오렌지라고 가정해볼까요. 소설이란 어떤 형식으로든 이 오렌지를 잘라서 접시에 담아내는 요리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로로, 세로로, 대각선으로, 혹은 잘게 다져 즙을 낼 수도 있겠지요. 다만 칼 한 자루로.일상과 영혼을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베어낼 수 있는 칼. 처음엔 선명한 단면을 보여주고 다음엔 그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냄새를, 마침내 과즙 대신 방울져 나오는 피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칼.소설가라면, 영원한 젊음보다는 이런 칼과 자신의 영혼을 바꾸자는 유혹에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어쩌면 누군가와 이런 거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가입니다. 마침내 그 칼을 손에 쥔 그는 가장 먼저 저 자신의 삶을 요리해서 접시에 올려놓았습니다. ≪가면의 고백이지요.≪가면의 고백은 미시마 유키오가 자신의 출생부터 이십대 중반의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성장과정을 써내려간 자전 소설입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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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다자이 오사무 ‘쓰가루’

    살아 있으면 또 훗날 이봐, 얼른 이쪽으로 들어오게. 자네가 그런 데서 어정거리면 놈들이 도망쳐버리거든. 도깨비들 말이야. 여기 산벚나무 뿌리 구멍 안에 숨어 있으면 그들이 오는 게 보인다네. 아, 그건 총알자국이 아니야. 전쟁도 여긴 비켜갔거든. 가까이서 보니 자넨 좀 멍청하게 생겼구먼. 아니, 그냥 이야기를 좋아하게 생겼단 말이네. 자네처럼 얼굴이 홀쭉하고 귀가 큰 사람은 옛날이야기를 좋아하거든. 맞지? 자, 내게 마침 책 한 권이 있네. 달도 무겁고 바람도 쓸쓸하니 책 읽기 딱 좋은 때가 아닌가 말이야. 자네 혹시 다자이라고 알고 있나? 다자이 오사무, 그래 그런 이름이네. 다자이는 분명 연인과 자살이니 약물중독이니 허무주의에 자기혐오로 유명하네. 그러나 어떤가, 그의 생이 오로지 비극과 고통으로만 점철되었을 것 같은가? 다자이라고 왜 호쾌하고 천진하던 시절이 없었겠는가. 바로 맞혔네, 내가 가진 책이 바로 그렇다네. 놀라지 말게, 여기서 다자이는 무려 “독자여 안녕! 살아 있으면 또 훗날. 힘차게 살아가자. 절망하지 마라”고 외친단 말일세.≪쓰가루≫란 말이지. 그래, 좋은 곳을 펴는군. 여기서 다자이는 쓰가루 반도의 온갖 곳을 쑤시고 다니며 그곳에 대해 떠들어댄다네. 왜냐고? “괴로우니까.” 자네, 뿌리를 부정한다는 게 어떤 건 줄 아나? 혈육과 절연한 채 그들을 삿대질하다 그조차 괴로워 비난을 자신에게 돌려버리는 고통의 순환에 대해 알고 있나? 그건 말일세, 모래폭풍이 이는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것과 같다네. 희망이나 신기루 같은 낭만적인 것은 없네. 죽음. 그래, 바닥 없는 절망과 죽음만이 가까이 있지. 그런 삶을 살던 다자이가 자신의 고향이 있는 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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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슈테판 츠바이크‘체스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겁쟁이들의 이야기슈테판 츠바이크는 겁이 많았다. 정신적으로 늘 절망 직전의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가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주변의 기대가 컸고 그만큼 요구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참여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츠바이크의 삶을 소설로 쓴 로랑 세크직에 의하면 그는 문학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비난을 받을 만큼 받았다. 그는 인물들의 광기 어린 열정 외에는 세상에 달리 말하고자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설도 소설이지만 대단히 많은 인물들에 대해 쓴 전기 작가이기도 하다. 에라스무스, 메리 스튜어트, 발자크, 두루두루… 그건 타인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사람은 실제로 타인의 마음 상태를 흉내 낼 수 있고, 자신 안에 있는 감정들을 통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자기 자신의 행동인 양 뇌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이입을 참 잘한 작가였다. 그는 그렇게 사람의 영혼을 깊게 파고들고 오래 붙들면서 쉬지 않고 글을 썼다.하지만 그는 센 사람이 아니었다. 전쟁에, 유명세에, 기대치에, 의무에 시달리면서 그는 자신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더이상 목소리를 낼 만한 힘이 없었고, 그의 정신 어디에서도 중대한 진실이 솟아날 구석을 찾을 수 없었으며, 아직도 비밀로 남아 있는 출구를 짐작조차 할 수 없어했다. 사람의 뇌는 지속적으로 고통에 노출이 되면 손상된다. 술이 그렇게 만드는 것처럼. 처음부터 행복할 줄 몰랐던 그는 마지막까지도 행복해지는 데 실패했다. 결론은 자살이었다.영혼의 반려자였던 ‘강한’ 첫번째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