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교양 기타

    <59> 존 밀턴'실낙원'

    무너지는 사랑의 낙원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는 낙원의 원주민들이었다. 그곳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제외한 그 어떤 법이나 윤리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가난도 없고 겨울도 없고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는 완전한 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낙원을 잃게 된다. 유일한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형벌은 가혹했다. 낙원에서 쫓아냈고, 죽음을 예감하는 유한한 존재로 전락시켰으며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을,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내렸다. 그것은 그들이 범한 단 하나의 죄였지만 그 죄는 인류 모두가 유산으로 물려받아야만 하는 원죄가 되고 말았다.나는 가끔 물끄러미 앉아 그들의 삶을 상상해보곤 한다. 낙원에서 그들의 삶은 완전했다. 알몸의 상태로 부끄러움 없이 서로를 사랑했고, 부드럽고 따뜻한 풀밭에 누워 불면 없이 잠들었으며, 한 점의 우울감도 없이 눈을 떴다. 그들은 악을 알지 못했기에 죄의식과 죄책감을 몰랐고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기에 치욕과 비참 같은 슬픈 감정도 느낄 줄 몰랐다. 하지만 낙원을 잃은 후부터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비참했을 것이고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린 박탈감은 그들로 하여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했을지도 모른다. 존 밀턴이 지은 『실낙원』은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인간의 원죄와 구원의 가능성을 다룬 일종의 종교 서사시다. 표면적인 서사는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내용이다. 시간적으로 태초 이전과 종말 이후를, 공간적으로 천국과 지옥, 낙원과 실낙원까지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교양 기타

    <58>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슬프고…그래서 더 장엄한…어렸을 때 큰집에는 어린이 세계명작동화 전집이 있었다. 큰집보다 형편이 좋지 못했던 우리 집에서는 전집을 살 수가 없어서 나는 돈이 생길 때마다 한 권 한 권씩 사 모아야 했는데, 큰집에 갈 때마다 내 전의가 불타올랐다. 계림문고판 어린이 세계명작전집. 그 책들을 전부 다 갖고 싶어 애가 닳았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욕망도 전의도 충족되지는 못했으나, 책 한 권을 새로 갖게 될 때마다 그 책들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즐거움이 짜릿했다. 가나다 순서로도 배열해보고, 전집 번호대로 배열해보기도 하고, 내가 정한 명작 순위로도 배열해보았다. 『폭풍의 언덕』은 언제나 내가 정한 명작 순위의 1위에 있었다. 어렸을 때 내가 읽었던 계림문고판 『폭풍의 언덕』은 어린이들이 읽기 쉽게 원작을 재구성해놓은 책이었다. 소설은 캐서린의 아버지가 히스클리프를 데리고 오던 날로부터 시작되어 히스클리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러니까 이 광대한 이야기의 전달자인 록우드나 엘렌 딘은 나오지도 않았거나 나와도 아주 슬쩍 나왔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책의 완역본을 읽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도대체 내가 뭘 읽었던 거야? 당혹감과 노여움과 부끄러움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감정이었다. 나는 그 계림문고판 『폭풍의 언덕』을 잊고 싶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도 『폭풍의 언덕』의 한 장면을 떠올리라고 하면 계림문고의 삽화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히스클리프가 창가에 서서 이미 죽은 캐서린에게 제발 들어와달라고 울부짖는 장면의 기억은 아직도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열두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

  • 교양 기타

    <57>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어머니의 욕망에 갇힌…그래서 자아가 상실된 이십대의 어느 날, 이 책을 읽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입속에는 침묵이 가득 찼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고, 나 자신조차 무서워 들여다본 적 없는 스스로의 심연을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어떤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험이 된다. 감당할 힘 없이 진실을 마주했다가, 우리는 자멸해버릴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미쳐버린 사람들도 알고 있다. 경고하건대 이 소설은 함부로 첫 장을 넘길 책이 아니다. 에리카. 그녀는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여선생이다. 서른이 넘은 그녀는 친구도 애인도 없이, 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 노모는 일과표에 따라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고, 통제한다. 어머니는 딸을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왔다. 에리카는 이른 유년 시절부터 피아노의 악보체계에 묶여 있었다. “그 다섯 개의 선은 그녀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때부터 그녀를 지배해왔다.” 에리카는 피아노 외의 어떤 충동에도 휘둘리지 않도록 훈육받았으며, 어머니의 우상으로 떠받들어져 살아왔다.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도 시체와 다름없었고, 끝내 죽어버림으로써 모녀에게 가난과 공허를 남겼다. 어머니와 딸은 삶을 예술로써 보상받으려 했으나,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단둘이 살아온 모녀 앞에 뒤늦게 젊은 남자가 나타난다. 젊은 미남자인 클레머는 자신만만하게 이 병적으로 왜곡되고, 이상에만 매달려 있고, 잘못 떠받들어진 정신에만 의지해 사는 괴상한 지성인 에리카를 변화시키려 한다. 그것은 오래된 연

  • 교양 기타

    <56> 사샤 소콜로프 '바보들을 위한 학교'

    우리의 어떤 부분은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비차’이다. 작가 사샤 소콜로프의 친구이자 이웃인 지적장애아 ‘비차 플랴스킨’. 그 이름을 굳이 외울 필요는 없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1.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소. 바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든 게 되어버리는 세상 또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세상. 이 문장에 대해선 누구도 명백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걸 바랐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 무엇이든 되지 않을 자유. 우선 자유라는 단어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비차가 그 무엇보다 자유를 선택했다니까 하는 말이다. 2. 당신은 완전한 하나인가? ‘비차’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완전한 하나인가? 이런 질문은 너무 불편한데. 나는 적잖이 바보노릇을 해보았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다. 정색하며 ‘당연히 완전한 하나야’라고 대답해봤자 소용없다. 거짓말하지 마. 언제나 비차는 나를 들들 볶는다. 비차의 목소리를 빌려 헛기침까지 해가며 대답했다. 그래, 맞아. 완전한 하나가 아니지. 정말로 어색하고 부끄럽고 그럼에도 퍽 쉬운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날짜는 누군가 생각나면 오는 거야. 때론 한번에 여러 날이 곧바로 오기도 하지. 혹은 오랫동안 하루도 오지 않는 때도 있어. 그때는 너는 공허 속에서 살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심하게 아프게 돼.” 문득 내가 지금 시간 밖에 있는지 시간 안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날짜 없는 시간에 대해서 아주 진지한 자세로 골몰하기도 했다. 관자놀이를 쿡쿡 찔러가며 고민한 결과, 그게 바로 비차의 시간이라는

  • 교양 기타

    E. L. 닥터로 '래그타임'

    래그타임은 말이 없지만…1897년부터 유행한 래그타임은 훗날 재즈의 원류가 되기도 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음악 포털에서 래그타임을 검색해보았다. 내용이 없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래그타임을 찾긴 쉽지 않았다. 검색창에 보이는 표면적 정보로는 그 음악의 구체적 성질은 물론이고, 단순한 감각조차 일깨우기 어려웠다. 동영상을 찾는다. 새하얀 소매에서 뻗어 나온 시커먼 두 손이 하얗고 검은 건반 위를 뛰어다닌다. 버퍼링이 일어나고, 음악이 멈춘다. 래그타임은 분명히 음악이라고 했지만, 나는 음악 없이 책장을 펼치기로 한다. 때는 니그로의 현란한 피아노 연주가 공기중에 흩뿌려지던, 1902년. 그곳은 미국, 뉴욕 주 뉴로셸, 브로드뷰 애비뉴. 1900년, 고집 센 청교도 노인처럼 미국은 자신의 속내를 금방 드러내지 않았다. 실제 인물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인간들이 터무니없는 짓을 자연스럽게 해냈다. 그것을 우리는 ‘진보 시대’라고 부른다. 그 기간 동안 인류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었고, 특정 인종에 대한 대대적이고도 과학적인 학살이 벌어졌으며, 핵무기가 만들어졌다. 나는 책을 되도록 천천히 읽어야 했다. 그곳에 섞여 있는 인간의 냄새가 독서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진보하는 인간에게는 살 타는 냄새가 난다. 코를 벌렁거리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연기가 내 쪽으로만 왔다. 환기되지 않는 독서의 시작.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땅을 밟은 청교도 이민자들과, 그 후로 오랫동안 배에 개나 닭처럼 실려 아메리카 땅에 들어온 흑인들, 대기근을 피해서 대서양을 건넌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몸을 섞고 부비고 있었다. 몸과 몸이 닿는

  • 교양 기타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

    섬약한 당신많은 괴물들이 있었다. 신이 타락했거나, 저주를 받아 잘못 태어났거나,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보니 괴물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거나, 혹은 복수심에 불타 스스로 괴물이 되거나. 그러나 이 괴물은 여러모로 다르다. 그는 역사상 가장 서정적이고 섬약한 괴물이며, 탄생한 지 200년이 지나도록 이름 하나 얻지 못해, 무어라 불러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는 비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촉망받던 젊은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스스로 조물주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전까지 그의 인생은 정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점잖은 귀족 집안의 자제인 프랑켄슈타인에게는 일찌감치 정해놓은 아름다운 약혼녀도 있었다. 그의 내면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다. 죽고 사는 것이 신의 영역이었던 때, 만연한 죽음만큼 자연스러운 것도 없던 시절에, 젊은 천재는 생명체의 탄생에 비상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가 이 이야기를 막 탄생시킬 무렵, 그녀의 나이는 열아홉에 불과했다. 조숙했던 그녀는 17세에 아버지의 제자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재능 있는 시인이었던 퍼시는 유부남이었다. 둘의 불장난 앞에 놓인 것은 8년간의 긴 유랑과 가난의 그림자였다. 도피 이듬해, 메리 셸리는 아이를 낳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녀가 전 유럽 대륙을 지나며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뼈대에 살이 붙어갔을 것이다. 그사이 셋째 딸을 낳았으나 이듬해 잃었다. 메리 셸리는 십대 후반에 사로잡힌 불같은 감정 이후, 거의 모든 것을 차례로 잃었다. 그녀의 연보는 주인공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공포영화와 크게 다

  • 교양 기타

    메도루마 슌 '물방울'

    도쿠쇼가 쓰다이시미네. 나는 오늘 굉장한 것을 썼다. 소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썩 괜찮은 소설이다. 처음 쓸 무렵에는 이런 굉장한 것이 될 줄은 몰랐다. 구상하게 된 계기도 하찮았다. 습기에 지쳐 창턱에 몸을 의지하고 마당을 내다보며 가려운 발가락 틈을 긁다가 말이다, 동과(冬瓜)가 열린 것을 보았다. 넓은 잎 틈으로 벌써 내 넓적다리만하게 열매가 자라 있었다. 이시미네. 우리가 군인의 신분으로 배고프고 목마른 채로 미군을 피해 구덩이에 누워 있을 때, 다른 것 말고 시원하게 얼린 동과 한 점을 씹고 싶다!라고 말했던 것을 나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는 해도 소금에 절인 반찬으로나 올라오는 동과를 보고, 나, 도쿠쇼가 소설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굉장한 것을 말이다. 최근 요양 차 마을에 머물고 있는 소설가 선생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평가를 받을 생각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선생에게 추천을 받으면 신문에 내 이름을 싣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후련해질 것이다. 이시미네, 너나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었다고 이름 석 자 실리지 못할 신문에, 살아서 이름이 실리는 꼴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 신문에 실릴 경우 원고료라는 것도 받게 되는 모양이다. 그 돈을 받아 여름 웃옷을 마련하고 싶다. 지금 입는 것은 소매가 너무 닳아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걸린다. 전쟁 때 눈물 나는 이야기를 팔아 돈을 벌면 벌을 받는다고 마누라 우시는 핀잔을 주었지만 책도 읽지 않는 여편네가 알 일이냐. 조만간 원고를 가지고 선생을 찾아갈 생각이다. 이시미네. 어제 쓴 것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런 하찮은 것을 써두고 굉장한 것을 썼다고 말했다니

  • 교양 기타

    조지 오웰'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소설가가 되기 전에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 ‘그’는 코끼리를 총으로 쏘아 죽인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가들이란 소설가가 되기 전에 ‘이상한 짓’을 꽤나 많이 해본 치들로 알려져 있다. (물론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 나만 해도 실은……) 범위와 양상이 하도 다양해서 그 이상한 짓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결코 이상하지 않은 짓도 훗날 결과적으로 이상한 짓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아무튼 소설가들은 괴이하고 수상쩍고 유별나고 생뚱맞은 경력을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소설가의 밑천이다. 때문에 이상한 짓은 짐짓 장려되기도 한다. 자신이 경험한 이상한 짓을 곰곰이 되새기고 질서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는 과정 자체가 바로 창작이라 할 수 있다. (반추나 성찰 없이 이상한 짓의 장려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삼아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가 아닌 그냥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마는 안타까운 현실!)‘그’로 돌아가자. 그는 코끼리를 총으로 쏴 죽였다. 분명 넘치도록 이상한 짓을 한 것이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독특하고 기묘한 경력이다. (다른 소설가들의 각종 일탈과 스캔들이 살짝 평범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는 바로 조지 오웰(1903~1950), 자신이 코끼리를 쏴 죽인 전후 사정을 글로 남겼다(‘코끼리를 쏘다’-1936). 20대 초반의 5년간, 그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현 미얀마)에서 경찰 간부로 근무한다. 어느 날 그는 사육장을 탈출한 코끼리가 마을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신고를 받는다. 코끼리는 이미 집과 기물을 파손하고 사람을 해쳤다. 사정을 살피러 현장으로 간 그는 끝내 코끼리를 사살하고 만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