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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43)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

    별놈의 학교가 다 있네?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나는 이 질문의 답은 알 수 없지만 나만의 행동 양식 하나는 갖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한 번만 읽어도 그만인 소설은 습기 찬 방구석에 멀찍이 놔두고, 한 번 더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소설은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인, 노트북 뒤에 탑처럼 쌓아두는 것이다. ‘한 번 더 읽어야만 하는’ 소설책은 공통점들을 갖고 있다. 밑줄이 쫙쫙 그어져 있거나, 그걸로도 모자라면 큼지막한 별이 밑줄 옆에 꼬리처럼 달려 있거나,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제법 중요한 페이지의 귀퉁이가 야무지게 접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그런 책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 있고, 연필심이 번져 엉망진창이다. ‘엉망진창’은 내가 그 책을 흠모하는 방식이자 좋아한다는 우회적 표현이다. 나는 글을 쓰다 문장이 막히거나 막연히 뭔가가 읽고 싶어질 때면 몰래 그중 한 권을 빼들고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염탐하듯 문장과 이야기를 읽고 또 만져본다. 그러면 어김없이 이런 생각이 찾아든다. 이야기와 문장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것은 내가 몇 권의 책을 냈음에도 아직 풀지 못한 문제이고,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더 낸다 해도 풀지 못할 것만 같은 탄생의 비밀이다. 내겐 불길한 예감이다. 이 책은 내 노트북 뒤에 놓여 있는 몇 권 되지 않은 책 중의 하나다.『벤야멘타 하인학교』,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는 제목의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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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정글북'

    냉정하거나 유쾌한 난투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나는 대자연으로부터조언을 구했다. 언덕의 휘우듬한 선처럼 둥글게 솟고 떨어지는 느긋한 능선과 깊은 골짜기 아래 나는 살았다. 검은 구름수레가 몰려오면서 잎잎에 빗줄기가 후드득 듣기 시작하는 때와 눈보라의 뒷등이 누군가에 의해 밀려나가는 때를 나는 특히 좋아했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숲의 법칙과 물의 법칙을 모두 배웠다. 마치 『정글북』에서 느림보 갈색 곰 발루가 모글리에게 썩은 가지와 튼튼한 가지를 구별하는 법, 벌집에 다가갈 때 벌들에게 공손하게 말하는 법, 물웅덩이에 첨벙 뛰어들기 전에 물뱀에게 경고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듯이. 말하자면 나는 『정글북』에서 정글의 존재들이그러했듯이 “너와 나, 우린 피를 나눈 형제야!”라고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작고 큰 생명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서로 속삭이고 대화하는 것을 보고 들었던 것이다.1894년 출간된 러디어드 키플링의 『정글북』은 1907년 키플링에게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영예를 안겨주었고, 지금도 여전히아동문학의 고전으로서 세계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메수아의 아들 나투(모글리)가 호랑이에게 쫓기다 늑대 가족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힘과 꾀로 무리를 이끄는 늑대 아켈라, 호랑이 시어칸, 자칼 타바키, 흑표범 바기라, 야생 코끼리 하티, 솔개 칠, 비단구렁이 카 등 무수히 많은 동물들이 등장한다. 모글리는 이들과 어울리고 경쟁하고 싸우면서정글의 법칙을 배우게 된다. 정글로부터 추방되었던 모글리가 소떼를 몰아서 악독한 수장 시어칸을 죽임으로써 용맹을 떨치는 장면으로 일단락된다.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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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절망'

    완전 범죄? 완벽한 소설을 꿈꾸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은 제목만큼이나 강렬하고 아찔한 소설이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더미 속에서 ‘분신’과 ‘범죄’가 포착된다. 하지만 환상적인 고딕풍의 범죄소설이 펼쳐지리라는 독자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베를린에 살고 있는 서른여섯 살의 러시아계 독일인으로 변변찮은 초콜릿 사업자이다. 1930년 5월9일, 업무차 프라하에 들렀던 그는 풀밭에서 자고 있는 한 부랑아가 자신과 무척 닮았음을 확신하고서 모종의 영감에 휩싸인다. 문학 속의 분신을 현실로 불러내듯 문학 속의 범죄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 분신이라는 개별성과 유일성을 위협하는 요소를 이용해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 그 과정에서 많은 거짓말이 창조된다. 펠릭스를 꾀기 위한 현란한 수다는 물론이거니와 아내 리다 앞에서 거국적으로 털어놓는 동생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에 가깝다. 게르만의 미학적 환희가 극점으로 치달아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자기기만이다. 펠릭스는 정말로 그와 닮았는가. 그의 범죄는 정말로 ‘무관심’과 ‘무목적’의 행위(예술)인가. 혹시 기울어져가는 사업을 만회하려는 속된 욕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리다와 아르달리온의 ‘부적절한’ 관계는 또 어떠한가. 이런 식의 거짓을 전혀 몰랐다면 그는 나보코프의 소설에 곧잘 등장하는 눈 뜬 장님인 것이고, 만약 알았다면, 알고도 죽였다면 정녕 희대의 악당인 것이다.파리의 한 호텔에서 범행의 기록에 열중하던 중 게르만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언급한다. 라스콜니코프를 괴롭힌 묵직하고 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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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리카르도 피글리아 '인공호흡'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당신은 말로써 당신을 잘 표현하는가? 당신은 선동적인가? 당신은 궤변론자에 속하는가? 당신은 쓸데없는 말이라도 늘어놓지 않고선 배기지 못하는가? 당신의 말이 씨가 된 적이 있는가? 그러길 바란 적이 있는가? 침묵을 강요당한 적은 있는가? 당신은 말할 수 없다면 침묵하길 택하는가? 아니면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선택한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도 도저히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너머의 세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당신은 어떻게 말하는가? 혹시 글을 쓰는가? 당신이 글을 쓴다면 바로 그런 것을 쓰는가? 무슨 방법으로 쓰는가? 그런데 만약 이 세계에 말을 빼앗긴 이름 없는 자들이 널려 있다면? 여기저기에.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인공호흡》에는 사실인지 허구인지 모르겠으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두 사람,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는 상반된 세계에 속해 있던 두 사람에 대한 일화가 소개돼 있다. 훗날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독재자가 될 사람. 하지만 그때까지 가진 것은 계획과 말뿐이었던 비루하고 소심한 남자가 프라하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1909년 10월부터 1910년 8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아르코스 카페에 나타났다. 그는 거기서 자기 연민과 망상에 가까운 자기중심성, 미래에 대한 과도한 강박 관념을 예술가들에게 뜨겁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의 말을 들었던 사람 중 하나는 프란츠 카프카였다. 요설을 늘어놓던 남자는 히틀러였다. 몇 번의 우연한 만남 동안 카프카는 히틀러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말은 씨가 되는 법이에요. 말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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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미하일 레르몬토프 '우리 시대의 영웅'

    레르몬토프, 기형도, 그리고 우리 시대의 문학청년들삶을 문학으로 만들기, 또는 문학이라는 열병에 감염된 삶에 대한 경고는 오랫동안 있어왔다. 막스 베버는 그나마 괴테가 문학적 삶을 사는 데 성공했지만 그런 시도가 작품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은 베버의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으로 삶-문학이 실패한 사례다. 주인공 페초린은 사교계의 이목을 끄는 스물다섯 살의 장교로 레르몬토프 자신의 초상이었다. 레르몬토프는 낭만주의의 세례를 입고 세계와 불화하는 존재로 본 자신에 대한 인식을 페초린에 투사했다. 페초린은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나는 불행한 성격을 지녔어요. 교육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하느님이 나를 원래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요.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의 원인이라면, 나도 그들 못지않게 불행하다는 사실입니다.”19세기 초 격동의 러시아에서 전쟁을 체험하고 문학을 사랑한 젊은이가 스스로를 불행한 존재로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넘치는 열정에 이끌려 삶과 작품을 하나로 만들려는 시도는 실패하게 돼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진정한 작가는 일기를 쓰는 작가라고 말했다. 작품에서 작가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또한 잃어버려야 한다. 작가는 작품을 쓰면서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일기를 쓴다. 레르몬토프는 일기를 쓰듯 작품을 썼고 작품을 쓰듯 일기를 썼다. 그 결과 작품은 자의식의 과잉으로 장광설이 돼버렸고 그의 삶은 현실 감각을 잃고 미망으로 빠져들었다. 레르몬토프는 27세에 죽었다. 레르몬토프는 삶과 문학을 뒤섞는 것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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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이노우에 야스시 '둔황'

    모래는 울고, 이야기는 흐른다어릴 적 할머니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는 재밌는 건데, 좋아하면 왜 가난해지지? 예닐곱 살 꼬마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였다. 할머니는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면서도 손녀가 잠을 못 이루는 밤마다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밤은 황금광인 줄 알고 재산을 털어 넣었다가 패가망신한 사내 얘기를, 또 어떤 밤은 미쓰꼬시 백화점 양식당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다가 시아버지 될 사람을 발견하고 줄행랑친 경성의 ‘모단걸’ 얘기를. 전등을 끈 캄캄한 방에 누워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궁금하고 이상한 일이 많아 잠이 더 달아났다. 겨울밤, 마루에 둘러앉은 노인들이 화로에 알밤과 쇠고기를 굽고 담배를 태우며 나누던 이웃 나라 이야기 또한 부엌에서 빈대떡을 부치던 며느리의 밝은 귀를 거쳐 밤잠 없는 아이에게로 왔다. 그래, 그런 경로로 이야기는 내게 소설보다 먼저 왔고, 역사보다 앞서 도착했다. 몇 해 전 전봉관 선생의 『황금광시대』를 읽고 나서야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이는 거짓이든 참이든 상관없는 하나의 이야기가 자립한 뒤였다. 나는 역사 이전에 이야기로 한 사내의 불가해한 삶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사내는 이야기를 좋아한 만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을 테고, 그러니 모험을 좋아했겠지. 모험을 좋아했다면 분명 황금광을 발견했다는 친구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내가 땅을 날리고 월급을 차압당하다 요절하게 된 사연은 옛날이야기가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 오래전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할아버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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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는다몇 달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있다. 마을에서는 그를 따르는 어린 소년 하나만 그의 편이 되어 줄 뿐 아무도 ‘운이 다한’ 그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날 홀로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간 그의 낚싯바늘에 거대한 청새치가 걸려든다. 그의 배보다 더 큰 그 물고기와 이틀 밤낮에 걸쳐 드잡이를 한 끝에 그 물고기를 끌고 항구를 향해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해안에 도착했을 때엔 물고기는 이미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들에 의해 다 뜯어먹히고 앙상한 뼈와 대가리만 남은 상태였다. 노인은 오두막집에 지친 몸을 누이고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 꿈을 꾸며 잠든다.누구나 다 아는 이 이야기의 작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가없는 바다와 하늘이라는 자연의 원형극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드라마는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인간 정신에 대한 찬양이자 광활한 우주 속에서 고독한 단독자로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비감 어린 헌사이다. 상어와 사투를 벌이며 노인이 뱃전에서 되뇌는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묵묵히 시련을 견디는 강인한 노인의 초상을 통해 고전적 휴머니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눈부신 빛과 파도,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의 4원소가 진동하는 이 소설은, 비교하자면, 지중해의 태양과 소금기의 맛이 감도는 카뮈 같은 유럽 작가의 소설과는 다른 향일성의 감흥을 읽는 사람에게 제공한다. 거기엔 멕시코만 특유의 역사적 상흔과 생존을 위한 투쟁이 강렬한 피냄새와 뒤섞여 있다. 20세기에 행동주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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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살만 루슈디 '한밤의 아이들'

    전체에 대한 사라진 열정 그런 책들이 있다. 책장을 열기 전 표지와 저자의 이름을 번갈아 쳐다보고 눈대중으로 두께를 가늠해보며 마라톤 출발선상에 선 선수처럼 긴장과 흥분, 기대와 각오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게 되는 그런 소설 말이다. 또 그런 작가들이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높이(깊이가 아니다)에 절망해 망연자실, 또 한숨을 내쉬게 되는 그런 작가 말이다.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 바로 그런 소설, 그런 작가다.루슈디는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계를 통째로 삼켜야 한다고. 그리고 자신의 말마따나 마치 이 세계를 통째로 집어삼킨 듯 무시무시한 공력으로 뭔가를 엄청나게 쏟아낸다. 그것이 단지 이야기뿐일까? 무수한 사람의 이름과 사물의 이름, 수많은 지명과 풍경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순간에 태어난 살림 시나이란 주인공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여자와 남자, 부자와 가난뱅이, 힌두와 이슬람, 인도와 파키스탄, 혁명가와 도망자, 영국인과 인도인 등 모든 것이 뒤섞인 가계의 역사를 장구하게 펼쳐 보인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지간한 소설 한 권 분량 정도가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빅뱅처럼 그순간 모든 것이 시작된다. 국가가 탄생하고 한 남자의 인생도 같이 시작된다. 그것도 태어나는 순간 조산사에 의해 다른 아이와 바꿔치기 당한 채 말이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하게 시작된 그의 생은 그보다 앞서 일어났던 모든 일, 그가 겪고 보고 실천한 모든 일과 그가 당한 모든 일, 즉 혼돈에 빠진 인도 전체(근작 『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