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내가 만난 운명의 Book (13) '정주영…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

한 나라의 경제발전은 대중이 아닌 창업가의 기업가 정신에 의해 결정된다. 빌 게이츠가 대표적이다. 그가 이렇게 썼다. “나는 열아홉 살 나이에 나름대로 앞날의 세계를 점치고 내가 옳다고 여긴 방향에 나의 미래를 걸었다.” 그는 ‘윈도’ 개발로 1994년 이후 10년 넘게 세계 1등 부자인데다, ‘빌 & 멜린더 재단’을 세워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베풀어오고 있다.
한국 경제의 발전 과정에서도 빌 게이츠 같은 창업가들을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글의 시작에서 언급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다. 그는 1915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침에는 밥 해먹고, 점심에는 굶고, 저녁에는 죽 쑤어먹고 지내는 지독한 가난이 싫어서 16세 때부터 19세 때까지 네 차례나 가출했다.
그는 네 번째 가출 끝에 인천의 한 쌀 도매상 배달원이 되었다. 수소문하여 찾아온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새경으로 1년에 쌀 열여덟 가마를 받는다고 하자 가출을 허가했다. 그는 23세 나이에 쌀가게를 인수받아 쌀가게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중·일 전쟁이 일어나 총독부가 배급제를 실시하자 쌀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그 후에 그는 자동차 사업 실패, 일제의 강제 사업정비, 6·25전쟁 등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는 한국을 ‘배 만들기’ 세계 1위,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국가가 될 수 있는 주춧돌을 놓았다.
![[Book & Movie ]"돈 빌려 조선소 짓겠다" 결국 성공…無에서 有를 창조한 기업가정신](https://img.hankyung.com/photo/201502/AA.9594409.1.jpg)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를 짓겠다고 하자 ‘무슨 경험이 있다고 조선소를 만드느냐’고 얘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배를 큰 탱크로 보고 그 탱크 속에 엔진을 붙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세계를 돌아다녀도 돈 빌리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데이비스라는 미국 사람을 만났다. 그는 미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한국전에도 참전한 사람인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 덕분에 1억달러 차관이 마련되었다. 영국의 버클리은행에 서류를 제출했다. 영국 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의 보증을 받아야 한다. 하루는 수출신용보증국의 최고 책임자가 정주영을 만나자고 했다. 그는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신을 주어야만, 다시 말하면 배가 팔린다는 증명서를 갖다 붙여야만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정주영은 그날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로부터 배를 살 선주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다. 당시 울산 미포만의 잡초 우거진 백사장 사진과 그 지역의 5만분의 1 지도 한 장, 그리고 스코트 리스고우 회사에서 빌린 26만t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을 들고 다니면서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런 자신을 정주영 회장은 미쳤다고 생각했다. 운 좋게도 그는 자신보다 더 미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세계적인 선박 왕 오나시스의 처남 되는 리바노스라는 선주가 정주영 회장의 배 두 척을 사겠다고 나선 것이다.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두 척은 울산조선소 준공식에서 명명식을 가졌다. 그렇게 만든 첫 번째 배를 보고 리바노스는 “이 배가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잘 만든 배다”고 칭찬했다.
울산조선소는 도크를 파내는 것도, 배를 짓는 것도 모두 세계 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미국과 중국의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조선입국(造船立國)으로 태어났다. 한국은 조선 수주에서 세계 일등 자리를 놓고 중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오지만 사실상 10년 넘게 세계 일등 자리를 지켜왔다.
2014년에 ‘자동차’와 ‘선박해양구조물 및 부품’을 합한 수출액은 888억1000만달러로, 총수출에서 자동차와 배가 차지하는 비중은 15.9%에 이른다. 창업가 정주영 회장의 기여다. 배우자!
박동운 < 단국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