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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기타

    꿈 찾아 도쿄행…풍선껌·롯데타워 최고 기업 일군 '뚝심의 기업인'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 놀이공원 건너편에 뮤지컬 전용극장인 샤롯데시어터가 있다. 이 이름에 담긴 사연이 재미있다. 샤롯데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자 주인공으로, 제과기업 롯데를 설립한 신격호가 상상 속에서 흠모한 여인이었다. 사실은 롯데라는 이름도 샤롯데의 애칭이다.■ 기억해 주세요^^샤롯데는 괴테의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자 주인공 이름으로 신격호가 상상 속에서 흠모한 여인이었죠. 롯데라는 기업 이름도 샤롯데의 애칭이에요.문학청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주인공 샤롯데 흠모신격호는 1921년 경상남도 울주(울산에 편입)에서 태어났다. 농업고등학교를 나와 생계를 위해 종축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그의 꿈은 소설가였다. 그 꿈을 이루고자 스무 살에 일본행을 감행한다.우여곡절 끝에 도쿄에 도착하지만 막막했다. 먼저 건너간 친구의 하숙집에 얹혀살면서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가난한 조선인 청년에게 문학은 사치스러운 꿈이었다. 신격호는 새벽부터 일해서 번 돈으로 와세다공고 야간 화학부를 다니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러던 중 평소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하나미스 노인이 사업 기회를 제안해 온다. 6만엔을 투자할 테니 군수용 기름을 만들어 팔자는 것이었다. 신격호는 뜻하지 않게 사업가가 됐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막 사업을 시작한 그에게도 치명타를 가했다. 미군의 연이은 공습으로 일본 열도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신격호의 작은 작업장도 폭격을 맞았다. 1945년의 일이었다. 얼마 안 있어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전쟁은 끝났다. 신격호는 하나미스 노인에게 투자금을 빚진 신세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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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나이팅게일, 병원을 혁신하다

    ■기억해 주세요^^나이팅게일은 환자 사이의 최소 거리 유지, 간호사 1명당 최대 환자의 수(12명), 병실내 온도 습도의 조절 등을 처음 시도했어요.‘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1820~1910)은 누구나 안다. 그가 간호학의 창시자라는 것도 일반 상식이다. 1893년 제정돼 간호학도들이 맹세하는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도 유명하다. 하지만 ‘간호학’이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기에 나이팅게일의 이름이 불멸의 명성을 획득했을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부유한 영국 상류층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 ‘플로렌스’는 피렌체의 영국식 발음이다. 언니 파세노프도 이탈리아 출생인데, ‘파세노프’는 나폴리의 그리스식 이름이다. ‘나폴리’는 그리스어 사투리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이다.간호학을 창시한 여전사나이팅게일은 신의 소명을 받았다며, 어린 시절부터 본인의 천직을 간호사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간호사는 ‘병원이라는 특수공간에서 일하는 하녀와 청소부’ 정도의 이미지였다. 상류층 여성이 지원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깼다.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업적은 이것이 아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크림반도에서 크림전쟁(제1차 동방전쟁)이 벌어진다. 러시아제국에 맞서 오스만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나 공국 등이 연합전선을 편 전쟁이다.병원의 더러운 붕대, 시트가 더 문제30대 중반의 독신 여성(당시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일이다. 나이팅게일은 평생을 독신으로 시종했다) 간호사로 참전한 나이팅게일은 이스탄불 야전병원장으로 활동하며 영국군 부상병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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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니콜라이 고골 '외투'

    짧은 희망이 지나가다입춘이 지났지만 온난화로 녹아내린 북극의 얼음이 찬바람을 뿜어대 아직 외투를 못 벗고 있다. 한겨울에 외투가 없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고골의 소설 《외투》는 우리나라보다 몇 배나 더 추운 러시아에서 옷을 빼앗긴 남자를 그리고 있다.남들이 볼 때 만년 구등관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적은 월급으로 따분한 일을 하며 인생을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다. 정작 당사자는 400루블의 급료에 만족하며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한다. 얼어붙는 듯한 추위가 몰아닥치자 그는 해진 외투를 수선하러 간다.수선공은 이리저리 살펴보다 너무 낡아 더 이상 기울 수 없다며 새 외투를 권한다. 몇 차례의 간청에도 계속 안 된다는 얘기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외투를 사기로 결정한다. 지난 1년간 조금씩 모은 돈과 생각보다 많이 나온 상여금 덕에 새 외투를 장만한다. 앞으로 차도 마시지 않고 촛불도 켜지 않고 속옷 세탁도 덜하고 신발이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걸을 정도의 내핍생활을 결심하면서.‘외투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축하 파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새 외투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경찰관을 찾아가 고발하고 고관에게 간청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허세에 가득 찬 고관의 고압적인 태도에 눌린 데다 외투를 다시 구입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낙담한다. 절망에 빠진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편도선염으로 열이 올라 세상을 떠나고 만다.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페테르부르크에 외투를 빼앗는 유령이 나타나고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고압적인 고관도 부들부들 떨면서 외투를 벗어준다. 그 고관은 어떻게 되었고 유령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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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 키보드의 조상은 피아노의 건반 '소리의 진화'가 디지털 혁명을 이끌었죠^^

    ☞옆에서 소개한 사례는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의 책 원더랜드(프런티어 펴냄·444쪽·1만6000원)를 발췌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혁신이 획기적 아이디어나 기술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놀이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한다. 패션, 쇼핑, 음악, 맛, 환영, 게임, 공공장소 등 여섯 가지 주제로 나눠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상업화 시도와 신기술 개발, 시장 개척으로 이어진 다양한 사례를 담았다.4만3000년 전 슬로베니아 북서쪽 변방 동굴에 살던 어린 곰 한 마리가 숨졌다. 그로부터 1000년 후 독일 남쪽 블라우강 숲속에서 매머드 한 마리가, 5000년 후에는 백조 한 마리가 숨졌다. 이들 생명체가 사후에 맞은 운명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남은 뼈가 인간의 손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피리’로 변신했다는 것. 지금도 연주가 가능할 만큼 잘 보존된 것도 있다.수만년 전 인간이 음악에 눈뜬 이유는음악과 관련된 기술의 역사는 생존을 위해 만든 옷이나 사냥 도구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훗날 학자들은 뼈에 뚫린 피리 구멍 사이의 간격이 완전 4도와 완전 5도 소리를 내도록 배치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4도와 5도는 현대음악에서 많이 쓰는 화음의 뼈대를 이룬다. 한 옥타브 차이는 주파수가 정확히 2 대 1인 음정을 만들어 청각에 생생한 울림을 남긴다.음향이론의 기본도 몰랐을 초기 인간이 왜 악기를 만들었을까. 음악은 인간에게 쾌락을 준다. 설탕이나 아편이 뇌의 쾌락중추를 자극하는 방식은 간단하지만, 음악은 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자극한다. 인간은 이미 체험한 음악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을 계속 추구하게 된다. 뼈로 만든 인류 최초의 피리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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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살 때 일본 철공소에 취직…지배인 승진, 자전거 거쳐 '소하리' 기아자동차 공장 만들어

    현재의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그룹 소속이지만 1997년 이전까지는 독립된 자동차 기업이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원래의 기아차를 세우고 성공시킨 김철호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에 가서 사업을 배우고 돈을 벌어 한국에 기업을 일으킨 청년의 이야기다.■ 기억해 주세요^^우리와 함께 있는 삼천리 자전거와 기아자동차의 역사를 역추적하면 1922년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을 배운 한 젊은이의 꿈을 만나게 됩니다.일본으로 건너가 ‘기회’를 찾다김철호는 1905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다. 변변한 농토조차 없는 가난한 집이었다.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까지 한 처지라 더욱 막막했다. 김철호는 일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 무렵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만주나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요즈음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돈 벌러 오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1922년, 김철호도 17세의 나이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우여곡절 끝에 삼화제작소라는 철공소에 취직할 수 있었다. 볼트와 너트를 만드는 직원 열 명의 작은 직장이었다. 성실히 일한 덕분에 4년 만에 그 회사의 지배인이 됐다. 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하던 시절임을 생각해봤을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3000리호 자전거’를 아시나요?김철호는 사업을 제법 잘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졌고, 그 여파가 일본에도 밀어닥쳤다.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다. 삼화제작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무 사정이 나빠져서 퇴직금 대신 기계를 지급해야만 했다. 다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김철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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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창씨개명 이야기

    ■ 체크 포인트식민지 등 정복된 국가에선 자주 이름바꾸기가 강제로 시행된다. 터키와 불가리아 사이에서도 창씨개명이 분쟁을 일으켰는데…일제 강점기에만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게일어 지명을 영어식으로 모두 바꾸었다. 세계적인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얼(Brian Friel: 1929~)은 《이름 바꾸기(Translations)》(1980)라는 3막 희곡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19세기 말 아일랜드 도네갈 지방의 한 농촌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이름과 지명과 언어 자체가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으로 급격하게 바뀌는 현실을 증언한다. 고유한 언어가 소멸해 가는 바로 그 순간이다.아일랜드를 정복한 영국의 이름바꾸기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례도 있다. 이름 바꾸기를 강요당해 국적을 버리고 망명한 스포츠 스타의 이야기다. 나임 슐레이마놀루(터키)의 처음 이름은 나임 슐레이마노프다. 불가리아 산간 마을에서 광부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155㎝의 단신이었지만 152㎝인 아버지와 141㎝인 어머니에 비하면 그는 가족 중 최장신이었다.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던 슐레이마놀루는 15세 때 이미 세계신기록을 세웠고 이듬해 자기 몸무게의 세 배를 들어 올린 역사상 두 번째의 인간이 되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1984년부터 ‘슐레이마노프’에게 매달 연금을 지급하고 아파트도 제공했다. 일종의 파격이자 엄청난 특혜였다. 문제는 같은 해 1984년에 터진 터키계 불가리아인들의 시위다. 불가리아 정부는 소수민족을 탄압했다. 반터키 캠페인이 일어나고 모스크가 폐쇄되었으며 이슬람 축제 및 이슬람식 장례식 금지, 터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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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장영희·김점선 '생일'

    시를 읽으면 좋은 가사가 나온다형식과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는 시의 특징은 언어를 함축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짧은 언어에 많은 의미를 담아 아름답게 표현하는 시를 ‘문학의 정수’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시는 감성이 살아 움직이는 청춘에 써야한다고들 말한다. 시인들이 다른 장르에 도전하기도 하는데 시를 오래 쓴 작가들의 문장력은 특별한 데가 있다.예전 학생들이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시를 읊었다면 요즘 친구들은 직접 가사를 써서 랩을 만들고 부른다. 쇼미더머니, 언프리티 랩스타에 이어 고등래퍼가 상종가를 치는 중이다. 비트에 맞춰 랩을 할 때 가사에 귀 기울이다가 ‘시를 읽으면 훨씬 좋은 가사를 쓸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아치볼드 매클리시의 ‘시법詩法’에서는 시를 이렇게 표현한다.‘시는 둥그런 과일처럼/만질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래된 메달들처럼/딱딱하고/새들의 비상처럼/시는 말을 아껴야 한다./시는 구체적인 것이지/진실된 것이 아니다./슬픔의 긴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사랑을 위해서는/비스듬히 기댄 풀잎들과 바다 위 두 개의 불빛/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단지 존재할 뿐이다.’서강대 영문과 교수이자 수필가였던 장영희 선생이 엄선한 시와 단상, 화가 김점선 선생의 밝고 환상적인 그림을 담은 《생일》에서 소개한 시이다.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이라는 타이틀로 신문에 연재됐던 시 가운데 49편을 뽑아서 엮은 《생일》은 영어 공부도 하고 시도 읽고 해설도 보고 그림도 감상할 수 있는 일석사조의 책이다.그 자리에서 휘리릭 읽고 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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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 전, 장사는 천한 '말업' 큰 돈 벌면 장사 '끝'…개화 후, 큰 돈 벌어서 기업 이어가면서 '확장 경영'

    박승직, 김성수, 김연수, 박흥식 등 초기의 기업가들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연재했다. 이들 개화기의 기업가들이 초기의 본격적 기업가들이기는 하지만 최초라고 말하긴 어렵다. 조선조에도 이미 원초적 형태의 기업가, 즉 상인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본격적인 기업가라고 말하긴 어렵다. 박승직부터 시작되는 개화기의 신흥 상인들과는 행동 방식이 많이 달랐다. 그 차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기억해 주세요^^기업가 정신이 우리나라에 생기기 시작한 것은 갑오개혁 이후부터입니다. 이전에 상업은 천한 직업으로 홀대받았어요.개처럼 번 뒤 정승처럼 폼내면서 살다조선조 상인의 대표 격은 철종 때의 임상옥이다. 소설가 최인호가 그의 일생을 상도(商道)라는 소설로 출간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중국과의 인삼거래로 큰돈을 벌었다.임상옥이 박승직, 김연수 등 개화기의 상인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돈을 번 후의 행동이다. 박승직 등은 돈 버는 데에 성공한 후에도 그 성공을 기반삼아 사업을 더욱 크게 키워나갔다. 자식들에게도 물려줬다. 반면 임상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단 큰돈을 벌자, 장사를 그만 두고 벼슬길에 나섰다. 수재 의연금을 낸 공으로 곽산 군수가 되었고, 더 이상 승진이 안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안빈낙도의 생활을 시작했다. 좋은 집을 지어 놓고 선비들을 두루 불러 세상을 논했고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다.장사는 천한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버려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벌면 양반 족보와 벼슬을 사서 어떻게든 팔자를 바꾸려 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갑오개혁 이후 사농공상&r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