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13) 구인회와 전자제품시대
1961년 새해가 밝았지만 구인회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라디오 사업을 접어야 할 것 같았다. 플라스틱 사업을 잇는 차세대 먹거리로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애써 만든 라디오가 팔리지 않았다. 생산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적자로 쌓여갔다. 이러다간 플라스틱으로 번 돈을 모두 날릴 수도 있었다.
(13) 구인회와 전자제품시대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플라스틱 빗과 바가지 팔아 사업 밑천 마련…라디오사업 위기 이겨내고 전자·화학 성공 일궈](https://img.hankyung.com/photo/201704/AA.13742593.1.jpg)
지금의 LG와 GS칼텍스는 라디오를 만들었던 금성사와 플라스틱 바가지를 제조했던 락희화학에서 시작됐습니다. 국내 4대 그룹에 드는 LG도 시작은 미미했습니다.
플라스틱 사업의 ‘운’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플라스틱 빗과 바가지 팔아 사업 밑천 마련…라디오사업 위기 이겨내고 전자·화학 성공 일궈](https://img.hankyung.com/photo/201704/AA.13744281.1.jpg)
그런데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기업세계의 철칙이다. 돈이 좀 벌린다 싶으면 경쟁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플라스틱 사업에도 경쟁자들이 등장했다. 가격 경쟁이 벌어져서 락희화학의 수익성이 떨어져갔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이 라디오였다. 선진국을 둘러보면서 라디오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미국이나 독일, 일본 같은 나라들은 바야흐로 라디오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라디오를 만들어본 기술자가 없었다. 기술이라봤자 외국산 라디오를 수리하는 정도의 능력이었다. 그래도 도전하기로 결단을 했다.
1958년 금성사를 설립하고 라디오 수리공인 김해수에게 제조팀을 꾸리게 했다. 1959년 우여곡절 끝에 한국산 라디오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만들어놓은 라디오들이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여갔다. 보통 사람들은 라디오를 들을 일이 없는 데다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외국산 라디오를 선택했다. 한국산 품질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자가 쌓여갔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1961년이 되었다.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었다. 이러다간 망할 수도 있었다.
라디오 사업 ‘위기와 기회’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플라스틱 빗과 바가지 팔아 사업 밑천 마련…라디오사업 위기 이겨내고 전자·화학 성공 일궈](https://img.hankyung.com/photo/201704/AA.13742658.1.jpg)
금성사는 라디오의 성공을 밑천 삼아 첨단제품들을 국산화해가기 시작했다. 선풍기 흑백TV 냉장고 등 금성사가 만들어내는 전자제품은 모두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지금의 LG그룹이라는 이름은 락희화학의 L과 금성사(Gold Star)의 G를 따서 만들었다.
금성사는 또다시 강력한 경쟁자를 맞게 되었다. 이병철의 삼성전자였다. 본래 둘은 어릴 때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같은 초등학교(진주의 지수보통학교)를 다녔고 구인회의 아들과 이병철의 딸을 결혼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1968년 어느 날 이병철은 구인회에게 자기도 전자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구인회는 이병철의 그런 행동을 도리에 어긋난 것으로 봤고, 그 뒤로 구인회와 이병철은 서로 안보는 사이로 지냈다.
강력한 맞수의 등장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플라스틱 빗과 바가지 팔아 사업 밑천 마련…라디오사업 위기 이겨내고 전자·화학 성공 일궈](https://img.hankyung.com/photo/201704/01.13750844.1.jpg)
한편 구인회는 정유사업에도 진출해서 성공시켰다. 1965년 공모를 통해 사업권을 따냈고 그 결과는 호남정유였다. 우리나라 석유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GS칼텍스가 지금의 모습이다. 구인회는 이렇게 대한민국 화학산업과 전자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1969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