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우위의 상실

비교우위의 상실정부와 업계 의뢰로 석유화학 재편 컨설팅을 맡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전남 여수산업단지 생산시설을 24% 줄여야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유지될 수 있다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과잉생산에 따른 업계 공멸을 막기 위해 현재 7개인 여수 에틸렌 공장 중 2~3개를 정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2025년 8월 11일 자 한국경제신문-
최근 국내 3위 에틸렌 제조업체인 여천NCC가 부도 위기를 맞으면서 석유화학 산업 위기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중동, 미국 등에서 들여온 석유를 정제, 가공해 휘발유와 경유 같은 연료부터 석유화학 제품의 기초가 되는 ‘산업의 쌀’ 나프타, 이를 통해 만든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다양한 석유화학제품을 만들어내며 한국을 제조업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것이 우리의 석화 산업이지요.
한때 석화 산업이 발전한 여수에선 “벌교에선 주먹 자랑 말고 여수에선 돈 자랑 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석화 산업은 ‘땅 짚고 헤엄치는’ 안정적인 산업의 대표 주자로 꼽히곤 했습니다. 그토록 강고해 보이던 석화 산업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수와 울산, 서산 등에 위치한 석화 산업 단지에 가보면 은빛의 철로 만들어진 수십 층 아파트 크기의 설비와 이를 혈관처럼 연결하고 있는 수십만 개의 배관으로 가득 찬 공장의 규모에 압도당하곤 합니다. 한국의 석유화학 업체들은 ‘세계 최대’, ‘동양 최대’ 규모의 설비를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막대한 투자금을 투입해 거대한 설비를 짓고, 장기간에 걸쳐 수익을 회수하는 ‘장치산업’이자 ‘규모의 경제’ 산업인 석화 산업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경제학적으로 석화 산업은 초기 투자비(고정비용)는 매우 높지만 한번 안정적으로 가동을 시작하면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한계비용’은 가동률이 높아질수록 점점 낮아지는 산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세계 최대, 동양 최대의 설비 구축에 목을 맨 것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서 석화 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규모의 경제를 통해 생산비를 낮추는 방법밖엔 없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이 공식은 2000년대까지도 통했습니다. 같은 설계 도면으로 공장을 지어도 한국 석화 플랜트의 생산성은 중국이나 일본 등 경쟁국을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한국의 경쟁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그간 석유 판매에 만족하던 중동 국가들이 값싼 원료비를 무기로 초대형 석유화학 단지를 건설하고, 제조업 굴기에 나선 중국이 막대한 정부 보조금을 쏟아가며 대량 증설에 나서면서입니다.
일례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중동 산유국들은 몇 해 전부터 원유에서 곧바로 나프타를 뽑아내는 정유·석유화학 통합 공장(COTC)을 짓고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이들 국가는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석화 엔지니어들을 거액을 주고 영입해 최대 약점으로 꼽히던 ‘생산 최적화’ 역량까지 갖췄다고 합니다.
그간 한국 기업은 산유국인 중동에 비해 원료 도입비는 많이 들지만 최적화된 생산 설비와 엔지니어들의 역량으로 단가를 맞춰왔습니다. 그런데 이젠 거액을 들여 원료를 운송할 필요가 없는 중동 업체들이 보다 최신식의 효율적인 공정까지 갖춰 물량 공세에 나서니 국내 기업으로선 당해낼 재간이 없는 셈입니다.
이는 경제학적으로 한국이 중동에 비해 갖고 있던 ‘비교우위’를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비교우위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에 특화하면 무역에서 이익을 본다는 이론입니다.
과거에도 중동산 석유화학 제품이 생산 단가 자체는 낮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출 산업화를 위한 투자 비용과 주요 시장인 아시아 지역으로 수출할 때 드는 운송비 등을 감안하면 중동 국가들은 원료를 수출하고, 한국은 이를 수입해 제품을 만드는 것에 각자 비교우위가 있었을 수 있지요. 중동의 석화 산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젠 중동이 ‘절대우위’를 갖는 국면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줄어든 비교우위가 ‘공급과잉’이란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 것입니다. ‘가동률을 낮추면 손해’라는 장치산업 특성 때문에 수요 부진과 글로벌 공급 과잉에도 국내 업체들은 섣불리 공급을 줄이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석화 업체들의 에틸렌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는 2020년 톤당 351달러에서 2024년 170달러까지 급락했으며, 현재도 200달러 안팎의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국내 업체들의 손익분기점이 톤당 250~300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이젠 ‘앉아서 돈을 잃고’ 있는 셈입니다.
전문가들은 경제 안보 차원에서 에틸렌 등 범용 제품의 생산 능력은 유지하면서도, 과거 물량 중심의 경쟁력에서 벗어나 친환경 소재 등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산업의 체질을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의 조선업도 한때 중국에 밀려 고사 위기에 처했지만, 미·중 갈등 속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지요. 지금의 한국을 만든 석화 산업이 지금의 위기를 이겨내고 되살아나길 기대해봅니다. NIE 포인트
![[수능에 나오는 경제·금융] 韓 석유화학 산업 '위기'…중동에 경쟁력 밀려](https://img.hankyung.com/photo/202508/01.41424605.1.jpg)
2. 과거 한국 석화 산업의 비교우위는 무엇이고, 최근엔 왜 상실했는지 분석해보자.
3. 석화 산업이 다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