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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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끝> 청년들이여, 기업가가 되라
스마트폰, 컴퓨터, TV, 집, 자동차, 마트?.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것들의 곳곳에 기 업가 정신이 배어 있다. 혁신적 기업가일수록 우리 생활에 크고 많은 혜택을 줘왔다. 한국 경제의 성공은 기업가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전자산업, 조선산업, 자동차산업 등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들은 대부분 기업가들이 일으키고 성공시켰다. 기업가들에 게 큰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다른 수많은 독립국들과 확연히 다르다.파키스탄이 망한 이유대다수의 신흥 독립국들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산업, 즉 국가기간 산업을 국영기업 방식으로 추진했다. 민간 기업이던 것들조차도 국유화시키는 일이 잦았다. 파키스탄은 눈에 띄는 사례다. 이 나라는 1950년대에 이미 미국의 GM, 포드와 합작으로 상당한 수준의 자동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드럼통을 펴서 ‘시발자동차’를 만들던 수준이었다. 1971년 인도와의 전쟁이 끝나자 부토 총리는 대기업들에 대한 국유화를 선언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철강, 석유화학 등 10개의 중화학 분야가 국유화돼 갔다. 기업가 자리는 공무원들로 채워졌다.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 파키스탄의 모습이다. 국유화된 거의 모든 산업은 끝없이 추락해 갔다.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파키스탄 기업은 찾기 어렵다.한국의 성공 비결은 민간기업 육성반면 한국은 전혀 다른 길을 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중화학공업 투자를 선언하고 기업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조선산업은 정주영(현대)이라는 사업가에게 맡겼고, 전자산업은 이미 해오고 있던 이병철(삼성)과 금성사(지금의 LG) 구인회를 앞세웠다. 자동차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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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농업 기업가,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
농업도 미래산업이 될 수 있다. 그러자면 위생적이고 맛있는 농산물을 낮은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좋은 일자리도 만들어내야 한다. 농민 기업가 김홍국은 쉽지 않은 그 일에 성공해서 하림그룹이라는 큰 기업을 일궜다. 닭 기르는 일 로 시작해서 연간 매출 6조원의 종합농식품 기업을 이뤄냈다. 미국 등 해외 진출은 물 론 최근에는 큰 해운회사를 인수해 국제 곡물거래 사업에도 진출했다. 협력농가들에 는 연수익 2억원에 육박하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초등학생 때 닭과 인연맺다김홍국의 농사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외할머니가 선물해준 병아리 10마리를 키우면서 시작됐다. 49년 전의 일이다. 홍국의 닭과 돼지 기르기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18세가 되던 해에는 본격적으로 사업자등록을 하고 농장을 세워 황동농장이라 이름도 붙였다. 돈도 잘 벌어서, 고등학교 때 이미 ‘학생 사장’으로 불렸다고 한다.양계-양돈업자였던 홍국은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으면서 농식품기업가로 성장하게 된다. 1982년 홍국이 25세 되던 해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했다. 사업을 확장한다며 겁 없이 가져다 쓴 빚이 문제를 일으켰다. 원리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쳤다. 홍국은 그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됐다. 돼지우리에까지 숨어들어갔지만 피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돼지 파동… 쓰러지다 …돼지우리를 나와 빚쟁이들을 찾아다녔다. 반드시 갚을 테니 기회를 달라고 읍소를 했다. 식품회사 영업사원을 해가며 빚을 갚아나갔다. 그러는 중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생고기값은 늘 오르내리기 마련이고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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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제빵왕 허영인 이야기
KBS TV가 2010년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김탁구라는 소년 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빵 굽는 비법을 배워서 아버지의 제빵 사업을 이어받는다는 줄거리였다. 가족 간의 갈등도 흥미진진했지만 제빵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로워 큰 인 기를 누렸다. 극중의 김탁구는 파리바게뜨(SPC그룹)의 허영인 회장을 모티브로 했다. 그럴 정도로 허영인은 어릴 적부터 빵에 미쳐 살았다.‘제빵왕 김탁구’의 실제 모델지금은 세계적 제빵기업이 됐지만 출발은 미미했다. 부친인 허창성이 방산시장 근처에 상미당이라는 작은 빵집을 차린 것이 1945년이다. 허창성은 무연탄으로 빵 굽는 방법을 개발해 빵의 제조원가를 낮춰, 고급식품이던 빵을 서민도 저렴하게 살 수 있게 했다. 이런 노력은 삼립식품이라는 본격적 제빵기업으로 꽃을 피웠다. 그 후 삼립크림빵, 아이차, 삼립호빵 등 히트작을 잇따라 내면서 기업 규모도 덩달아 커졌다.허창성은 삼립식품의 대부분을 큰아들에게 상속했다. 둘째 아들인 허영인에게 돌아온 것은 성남의 작은 빵공장이었다. 1981년의 일이다. 사실 영인은 대학 다닐 때부터 아버지의 빵공장 일을 했기 때문에 작은 빵공장 하나만 받은 것이 무척 서운했다고 한다. 이 같은 가족 스토리가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모티브를 제공한 셈이다.“공장빵 시대는 끝났다”하지만 영인은 서운함에 빠져 있지 않았다. 그 공장에서 나온 빵의 이름을 샤니로 붙이고 자기만의 사업을 시작했다. 빵에 캐릭터를 결합해서 포켓몬스터빵 국찐이빵 같은 제품을 출시했다. 대히트였다.영인은 아버지가 열어 놓은 공장빵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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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여성기업인들
한국에서 여성이 기업가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성공은 고사하고 기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일 그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져 왔다. 옛날엔 ‘여자가 집에서 밥이나 하지 무슨 사업을 하느냐’며 남자들에게 따돌림 당하기 십상이었다. 대한민국 여성기업인 1호 인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성공도 그런 서러움을 극복해낸 후에 가능했다.한국에서 여성기업가란애경그룹은 1954년 채몽인이 세운 애경유지공업에서 출발했다. 비누 제조 기업이었다. 사업은 잘됐다. 1970년에는 울산에 석유화학 공장도 세웠다.생각지 못한 불행이 닥쳤다. 채몽인 사장이 갑자기 숨을 거둔 것이다. 막내 아들을 출산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기업주가 사라지자 애경유지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부인인 장영신은 남편의 회사가 망해가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의 주식을 상속받은 그는 1972년 7월1일 무작정 회사로 출근했고 8월 사장에 취임했다. 남편의 형제들이 말렸다. 회사 임원들도 여자 사장을 보려 하지 않았다. 여자 밑에서는 회사를 다닐 수 없다며 아예 사표를 던지고 나간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학원을 다니면서 회계장부 공부부터 시작했다. 하나둘 직원들이 여자 사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1973년 7월 석유위기가 찾아왔다. 애경 계열사인 삼공화성도 생사의 기로에 섰다. 원료인 석유를 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장영신 사장은 걸프사 한국법인 대표를 찾아가서 자기를 믿고 일본 미쓰비시가스에 원료 공급 요청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부탁이었지만 자신감 넘치는 그의 태도에 감동한 걸프사 대표는 장영신 사장의 청을 들어줬고 원료를 확보해서 생산을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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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 등 신세계 이명희·홈플러스 이승한...복잡한 유통구조 개선해 생활혁명 일으켜"
낙후된 유통구조 이명희, 구학서, 이승한은 한국형 유통혁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이명희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의 막내딸이다. 8남매 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들 했다. 신세계백화점을 상속받은 그는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으로 새롭게 성공시키고 싶었다. 3500억원이라는 상속세를 곧이곧대로 납부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찾다가 미국의 프라이스클럽 등을 모델 삼아 대형할인점을 시작했다. 1993년 11월 테스트 상점으로 서울 도봉구 창동에 이마트 1호점을 냈다. 월마트·까르푸에 도전하다 그다음은 믿을 만한 사람을 고르는 일이었다. “믿지 못하면 쓰지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사람을 쓰는 철학이었다. 1996년 이명희는 젊었을 때부터 눈여겨봐온 구학서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맡겼다. 정기적인 보고조차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 무렵 월마트, 까르푸 등 외국계 대형마트들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후발주자로 살아남으려면 독특한 매력이 필요했다. 한국 소비자들이 창고형 매장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개별포장 제품을 늘리고 판매대의 높이를 낮췄다. 천장을 깔끔하게 단장해 백화점 느낌을 가미했다. 한국형 할인점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자국에서의 판매방식을 고집하던 월마트, 까르푸, 마크로 등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중 월마트는 2007년 12개 점포 모두를 이마트에 넘겼다. 외환위기는 이마트에는 도약의 기회였다. 다들 어떻게든 땅을 팔려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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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전문경영인 손길승
우리나라의 전문경영인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아마도 손길승일 것이다. 오너 가족이 아닌데도 1998년 SK그룹 회장이 됐 고, 2003년에는 전경련 회장으로도 선임됐다. 전경련은 대기업 오너, 즉 소유경영자들의 모임인데 전문경영자인 손길승을 회장으로 모 신 것이다.사업 파트너이자 동지1965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손길승은 중소기업인 선경직물(SK의 전신)에 입사했다. 대기업에도 충분히 갈 수 있던 그가 작은 방직공장을 선택한 것은 당시 부사장이던 최종현의 포부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최종현은 후일 SK를 세계적 기업으로 길러내는 창업 1세대 오너 기업가다(생글생글 5월22일자).손길승은 회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일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라고 말할 정도였다. 심지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1년 당시 선경그룹은 대연각호텔 건물(지금의 명동 입구 대연각타워)의 9~11층 건물을 임차해서 쓰고 있었다. 그해 12월25일 크리스마스에 호텔에 큰불이 났고 선경 사무실도 화염에 휩싸였다. 손길승은 선경직물의 경리과장이었다. 회사 서류들이 타버린다면 큰일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그는 불도 다 꺼지기 전에 사무실로 뛰어 올라가 금고와 서류들을 챙겨나왔다. 회사 일을 자기 목숨만큼 중히 여겼던 셈이다.최종현 회장은 그런 손길승을 사업 파트너이자 동지로 여겼다. 회사의 거의 모든 결정을 그와 상의해서 처리했다. 그렇게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일도 맡겼다. 섬유회사에 불과하던 선경이 자기보다 10배나 큰 공기업, 유공을 인수해서 종합에너지 기업으로 변신하는 과정,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고 세계 최초로 CDMA 방식 무선통신의 상용화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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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웅진그룹 윤석금
외판 사원으로 출발해서 큰 기업을 일으킨 기업가가 있다. 윤석금 웅 진그룹 회장이다. 웅진씽크빅, 웅진에너지 등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2012년 이후 사세가 많이 줄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30대 대기업 안에 들 었다. 1945년생인 윤석금은 26세 되던 1971년, 브리태니커라는 영국의 백과사전 판매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영어로 된 그 책을 팔아야 했다.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다.배고팠던 외판원 시절첫 고객 앞에서는 말도 한마디 못 꺼내고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단단히 마음먹고 고객을 설득해 나갔다. ‘독해지기’ 위해서 식사비도 없이 출장길에 나섰을 정도다. 배가 고파서라도 게으름을 부릴 수 없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용기가 자라났고, 요령도 생겼다. 9년 후 전 세계 54개국 브리태니커 영업사원 중 최고 판매 실적을 기록할 정도가 됐다. 판매왕이 된 것이다.승진도 했고 돈도 좀 벌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남의 나라 책이 아니라 한국어로 된 어린이용 도서를 만들어서 팔고 싶었다. 출판사를 만들자면 누군가로부터 투자를 받아야 했다. 어떻게 할까? 누구도 해보지 않은 방식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외국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무작정 일본 도쿄에 내렸다. 호텔을 잡은 후 전화번호부를 뒤져 출판사들로 전화를 돌렸다. 내가 대한민국의 판매왕 윤석금인데 출판업을 하려고 하니 투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모든 상대방들이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그 요청을 귀담아들은 출판사가 있었고 결국 투자를 받아냈다. 그렇게 해서 1983년 헤임인터내셔날이라는 출판사가 출범했다. 투자도 영업사원 방식으로 받아낸 셈이다.사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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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교보생명 신용호
광화문의 교보문고는 그야말로 서울의 명소가 됐다. 앉고 서서 책을 읽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물론 책도 온갖 종류가 다 있다. 교보문고를 세운 사람은 보험회사인 교보생명의 창업자, 신용호 전 회장이다. 1980년 광화문에 교보빌딩을 신축한 뒤 건물 지하에 큰 책방을 넣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신용호 회장이다. 하지만 큰 반대에 부닥쳤다. 임원들부터 반대였다.베이징에서 곡물회사책방은 보험회사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교보는 교육보험의 약자다). 감독관청인 재무부도 보험사의 도서유통업 진출에 강력 반대했다. 본업과 관련 없는 업종이기 때문이었다. 신 회장은 서적 유통이 사회공헌 사업임을 내세워 설득에 성공했다. 신 회장은 교보문고가 ‘남녀노소, 부자, 가난한 자 상관없이 그 누구라도 언제든지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 가 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정작 신용호 자신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생인데 집안에 항일 민족 지사들이 많아서 일본인 학교를 다니기 어려웠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포기할 수 없었다. 17세부터 작정을 하고 3년간 매일 책을 읽으면서 독학을 했다고 한다. 19세가 되던 1936년 청년 신용호는 만주로 가서 대련중학교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집안 어른인 신갑범의 소개로 시인 이육사를 만나게 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시작하는 그 시, <광야>를 쓴 시인 이육사 선생이다. 이육사는 그에게 민족자본을 만드는 일을 하라는 당부를 한다. 24세 되던 1941년, 돈을 벌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서 북일공사라는 곡물회사를 세웠고, 거기서 번 돈으로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