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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기타

    (20) 대림그룹 창업주 이재준

    재계 순위 18위인 대림그룹은 부림상회라는 목재소에서 출발했다. 일본 건설업자들이 광복과 함께 떠나자 건설 사업에 기회가 있다고 보고 창업주는 건설업에 뛰어들었다.서울 D타워의 D는?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뒤편으로 특이하게 생긴 빌딩이 하나 생겼다. 서로 다른 색깔의 블록을 쌓아 만든 듯한 모양! 이 재미있는 빌딩의 이름은 광화문 D-타워다. D는 Daelim의 첫자에서 따왔다. 대림그룹이 지었기 때문이다. 대림은 건설업으로 성공한 기업이다. 원래 대림그룹 사옥은 근처 미국 대사관 뒤편의 허름해 보이는 건물이었는데 초현대식 건물을 지어서 이사했다.대림의 창업자는 이재준이라는 사람이다. 1917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 정미소를 하던 부친이 둘째 아들인 재준의 사업가 기질을 알아보고는 대학도 안 보낸 채 밑에 두고 사업을 배우게 했다. 청년 이재준의 첫 사업은 1939년 부평에 차린 목재소 부림상회였다. 사촌형과 같이 시작했는데 풍림산업으로 분가해 나가고 부림상회는 이재준이 독자 경영을 하게 된다.이재준의 사업은 번창했다. 서울을 놔두고 부평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인천에 공업단지가 들어설 것을 내다봤기 때문이었다. 그 예상은 들어맞았고 부림상회를 찾는 손님이 많았다. 그냥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기보다 고객이 원하는 바를 먼저 물어서 맞춰주다 보니 더욱 손님이 많이 들었다. 수금할 때도 머리를 썼다. 외상값을 받으러 낮에 찾아가면 사람을 만나기 어려우니까 새벽에 찾아다녔다. 이 덕분에 외상값을 떼이는 일이 그만큼 줄었고 가게 형편도 좋았다.태국 고속도로 공사 수주광복 후 2년째인 1947년 이재준은 건설업을 시작했다. 일본인 건설업자들이 떠난 상태라 건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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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효성그룹 세운 조홍제

    경남 의령군에는 정암리라는 마을이 있다. 솥 정(鼎)자에 바위 암(岩)자, 솥바위마을이 그 뜻이다. 실제로 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 물 가운데 솥 모양의 바위가 서 있다. 솥뚜껑을 세 개의 다리가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솥은 부의 상징이어서 예부터 솥다리가 뻗은 방향대로 세 명의 큰 부자가 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정말로 세 명의 큰 부자가 났다.의령군 정암리와 세 부자 ‘신화’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은 근처 의령에서 났고, LG그룹의 창업자 구인회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승산리 사람이다. 두 사람은 1923년 같은 해에 지수보통학교 같은 반의 급우이기까지 했다. 또 다른 한 명의 큰 부자는 효성그룹을 창업한 조홍제다. 한때 재계 랭킹 5위까지도 했던 대단한 기업의 창업자다. 조홍제 역시 솥바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군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조홍제의 첫 직장은 1940년 군북금융조합장이었지만 큰 사업을 한 것은 1948년부터였다. 해방이 되자 삼성상회를 하던 이병철이 무역회사를 하자며 조홍제를 찾았다. 조홍제는 이병철의 형과 친구 사이였으니 이병철이 고향 선배를 찾은 셈이었다. 그렇게 둘은 삼성물산공사를 세우고 이병철은 사장, 조홍제는 부사장이 돼 사업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 서로 뜻이 안 맞아 1962년 조홍제가 삼성을 나왔다. 조홍제의 나이 56세였다.삼성 나온 뒤 자기 사업 시작삼성을 나온 조홍제의 손에 들려진 것은 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일론의 주식이었다. 그것을 밑천으로 그는 효성물산을 새로 세웠다. 56세! 당시로선 자리를 내놓고 여생을 즐기기 시작해도 이르지 않을 나이에 새 사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호는 만우, 늦을 만(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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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수송왕’ 조중훈과 한진그룹

    ■ 기억해 주세요^^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은 독특하게 수송 부문에서 사업 기회를 포착했다. 대한항공, (주)한진, 한진고속은 대한민국의 물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산증인’이다.우리나라의 성공한 기업들은 대개 제조업이 주력이다. 삼성과 LG는 전자제품이 주력이고 현대는 건설과 더불어 자동차와 조선을 주력으로 했다. 독특하게도 한진은 수송부문을 전문화해서 성공했다. 대한항공, 진에어, (주)한진, 한진관광 같은 곳이 한진그룹 계열사들이다. 한진해운, 한진고속 같은 운송회사도 한진그룹 소속이었는데 2000년대 이후 분리 또는 매각됐다.제조업이 아니라 수송업?한진그룹을 세운 기업가는 조중훈이다. 일제 강점기 때 트럭 엔진 수리하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 그때 번 돈으로 트럭을 한 대 사서 운수업을 시작했다. 회사 이름은 한진이라 붙였다.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뜻이었다.한진의 본격적인 도약은 미군과의 비즈니스에 성공하면서 시작되었다. 6·25전쟁으로 많은 미군이 이 땅에 들어왔지만 물자 수송은 한국인에게 맡기지 않았다. 미군들은 한국인이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달리는 트럭에 뛰어올라 물건을 훔쳐낼 정도였다고 한다. 조중훈은 미군에 책임 수송제를 제안했다. 수송 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모든 것을 책임져 줄 테니 안심하고 맡겨달라고 청했다. 반신반의하던 미군 담당자에게서 일감을 받아냈다. 1956년의 일이었다. 조중훈은 철저하게 약속을 지켰고 그 덕분에 미군 장교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미군 장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정성껏 차린 미국식 요리를 대접했다. 조중훈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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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

     ■ 기억해 주세요^^박태준은 “일본 식민지 시절 희생된 조상들의 피값으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자”고 직원들에게 말했고 결국 무에서 유를 이뤘다.포항제철(포스코)은 위대한 기업이다. 미국 포천지가 발표한 ‘500대 기업’ 명단에서 2011년부터 6년 연속 200위 안에 들었다.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니다. 글로벌 철강전문 분석기관인 WSD 선정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철강사’에 9년 연속 1위에 선정됐다.민간기업 못지않게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성장포항제철이 더욱 특별한 것은 공기업으로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기업들은 대부분 민간 기업가들이 키웠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이 모두 그렇다. 대다수 국영기업이 부진을 면치 못한 데 반해 포항제철은 민간기업 못지않게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포항제철의 성공은 박태준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는 1968년부터 1992년까지 25년간 포항제철의 최고경영자였다. 맨땅에서 포항제철을 세웠고 성공시켰다. 박태준은 육군 대위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다. 대통령도 박태준을 가족처럼 믿었다.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제철소를 건설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명령이기에 맡긴 했지만 사명감 외엔 가진 것이 없었다. 자본부터 구해야 했다. 국제기구에 손을 벌려 봤지만 거절당했다. 한국은 그렇게 큰 제철소를 건설해서 운영할 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것이 당시 한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객관적 시각이었다. 결국 일본으로부터 36년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조로 받은 대일청구권자금 일부를 제철소 건설에 투입하게 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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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한국을 산유국으로 만든 최종현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 한국인들이 자원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음을 한탄하는 푸념이었다. 그러나 이젠 잘 안 맞는 말이다. SK이노베이션은 페루 베트남 등에서 매일 5만9000배럴의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 직접 개발해서 소유하고 있는 유전들이다.■기억해 주세요^^SK의 전신인 선경직물은 옷감을 짜는 회사였다. 부친이 갑자기 별세하자 경제학자의 꿈을 접고 귀국해 회사를 성장시켰다. 장학사업에 뜻을 두고 인재를 키우는데 크게 기여했다.경제학 박사가 꿈 … 형 돕기 위해 귀국이것이 가능하게 만든 사람은 SK의 전(前) 회장 최종현이다. 그는 SK가 옷감 짜는 회사(선경직물)였을 때 옷감 원료인 석유를 생산하는 비전을 세우고 이뤄냈다. 최종현은 원래 경제학자가 되려 했다.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귀국했다. 그런 그에게 형인 최종건이 선경직물(SK의 전신)에 들어와서 일을 도와달라고 청을 했다. 회사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형은 불도저처럼 일을 벌이기는 잘했지만 차분함은 부족했다. 치밀하고 생각이 깊은 동생의 도움이 절실했다. 최종현은 회사의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만 돕겠다며 일을 시작했다. 1962년의 일이다.두 형제가 힘을 합치자 회사가 다시 살아났다.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고 홍콩에 수출도 할 수 있게 됐다. 일본 기업의 투자를 받아서 옷감의 원료인 폴리에스터 생산 공장까지 세우는 데 성공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최종현은 경제학 박사의 꿈을 자연스럽게 접어야 했다. 그러던 중 1973년 형인 최종건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슬퍼할 사이도 없이 최종현은 선경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때 ‘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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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대우신화 김우중 회장

    서울역 정문을 나서면 붉은색 정사각형 건물이 시각을 압도한다. 서울스퀘어다. 지금은 싱가포르 알파인베스트먼트의 소유이지만 1999년까지 대우그룹 본사 건물이었다. 재계 2위까지 올랐던 대단한 기업이었지만 갑자기 무너졌다. 대우그룹을 세우고 키워냈던 김우중. 그의 사업 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해외 지향성과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이것이 다른 누구와도 다른 김우중 식 사업방식의 핵심이었다.■ 기억해 주세요^^재계 순위 2위였던 대우그룹은 20세기 말에 불어닥친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해체됐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던 김우중 회장의 대우신화는 마치 신기루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싱가포르 다니며 옷장사···판매 ‘귀재’1967년 김우중은 대우실업을 세우고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지에 ‘트리코트’라는 옷감을 팔러다녔다. 낯선 외국의 바이어(구매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산 옷감을 잘도 팔았다. 그는 판매의 귀재였다. 주문량이 늘어나자 공장들을 사들여서 직접 제조에 나섰다. 내수판매는 하지 않았다. 국내 기존 중소기업들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시장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수출 기업이 많았지만 대부분 주력은 내수시장이었다. 국내 판매에서 성공한 뒤에 해외시장으로 나아갔다. 김우중은 독특하게도 해외 수출로 사업을 시작했고 그것으로 성공했다.1970년대 중반 김우중은 건설업으로 진출했다. 그 무렵 정주영의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지구 최대의 단일공사라는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자극받은 다른 재벌기업도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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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스틱 빗과 바가지 팔아 사업 밑천 마련…라디오사업 위기 이겨내고 전자·화학 성공 일궈

    1961년 새해가 밝았지만 구인회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라디오 사업을 접어야 할 것 같았다. 플라스틱 사업을 잇는 차세대 먹거리로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애써 만든 라디오가 팔리지 않았다. 생산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적자로 쌓여갔다. 이러다간 플라스틱으로 번 돈을 모두 날릴 수도 있었다.■ 기억해 주세요^^지금의 LG와 GS칼텍스는 라디오를 만들었던 금성사와 플라스틱 바가지를 제조했던 락희화학에서 시작됐습니다. 국내 4대 그룹에 드는 LG도 시작은 미미했습니다.플라스틱 사업의 ‘운’구인회는 6·25 전쟁 중에 플라스틱 사출성형 기계를 도입해서 엄청난 성공을 이뤄냈다. 원래는 화장품 병뚜껑을 만들려고 들여왔는데 막상 사용해보니 별 것을 다 만들 수 있는 기계였다. 플라스틱 빗, 플라스틱 바가지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나오자 아낙들이 열광했다. 대나무로 만든 참빗, 박의 열매로 만든 바가지와는 편리함과 내구성이 비교도 안될 정도였다. 구인회의 락희화학은 세기도 힘들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그런데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기업세계의 철칙이다. 돈이 좀 벌린다 싶으면 경쟁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플라스틱 사업에도 경쟁자들이 등장했다. 가격 경쟁이 벌어져서 락희화학의 수익성이 떨어져갔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그러던 차에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이 라디오였다. 선진국을 둘러보면서 라디오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미국이나 독일, 일본 같은 나라들은 바야흐로 라디오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라디오를 만들어본 기술자가 없었다. 기술이라봤자 외국산 라디오를 수리하는 정도의 능력이었다. 그래도 도전하기로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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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기업가 이병철·정주영·구인회·김종희·서성환…6·25전쟁 폐허와 피난 속에서 사업 기회를 찾았다

    현재의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그룹 소속이지만 1997년 이전까지는 독립된 자동차 기업이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원래의 기아차를 세우고 성공시킨 김철호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에 가서 사업을 배우고 돈을 벌어 한국에 기업을 일으킨 청년의 이야기다.`■ 기억해 주세요^^▶이병철: 탄피와 고철 모아서 번 돈으로 설탕사업 시작▶구인회: 플라스틱 제조기계 들여와 화학산업 일구다▶정주영: 미군공사 하면서 쌓은 건설실력으로 해외진출▶김종희: 피난지 부산에서 미군화약 관리용역으로 돈 벌어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남한을 침략했다. 한국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모든 땅을 뺏기고 낙동강 방어선 이남만 남았다. 부산은 몰려든 피난민으로 몸살을 앓았다. 모든 것이 부족했다. 집, 먹을거리, 입을 옷···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고통조차도 기회로 바꾸어낸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은 피난지의 기업가들 이야기다.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도 부산에서 성공한 사람이다. 대구에서 삼성상회로 무역업을 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서울에 삼성물산을 세우고 수출입업을 시작했다. 돈이 제법 벌리던 차에 전쟁이 터져서 빈손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피난길에 대구에 들렀는데 양조장을 맡아 운영해주던 친구가 그동안 벌었다며 뜻하지 않은 돈을 건넸다. 이병철은 그 돈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다시 열었다. 수출할 상품을 찾던 중 기막힌 것을 발견한다. 전장 터에 버려진 탄피와 고철들이다. 이병철은 탄피와 고철들을 모아서 일본 등에 수출했다. 수출대금으로는 설탕과 옷감, 종이, 약품 같은 것을 수입해서 팔았고 큰돈을 벌었다. 1953년에는 그 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