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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30> 네이버 이해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쓰는 모바일앱은 아마도 카카오톡일 것 같다. 필자도 최소한 하루 한두 번은 들어가는 것 같다. 국내 가입자 수가 4300만 명(글로벌 포함 4900만 명)이니 5000만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가입돼있는 셈이다(2017년 6월 말 현재).통장을 털어 독립하다그런데 고개를 들어 세계 시장을 보면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네이버가 출시한 메신저 앱, 라인은 카카오를 훌쩍 뛰어넘는다. 누적 이용자 수가 10억 명을 넘었고 월 활성화 이용자 수는 2억1500만 명도 더 된다. 2016년 3월의 자료이니 지금은 더 많아졌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이용자가 많은데도 우리가 피부로 못 느끼는 것은 사용자들이 일본과 대만, 태국 등에 주로 분포하기 때문이다. 네이버는 모바일 메신저 앱으로 세계시장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다.카카오톡 김범수와의 인연네이버는 1999년 삼성SDS 직원이던 이해진이 세웠다. 다들 잘 알고 있듯이 그 출발은 PC 기반의 검색 엔진이었다. 그는 인터넷이 막 등장하던 시절 검색의 매력에 푹 빠져서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개발 결과를 바탕으로 사내 벤처 1호 기업을 만들고 이름을 ‘검색하는 사람, navigator’에서 따온 네이버(Naver)로 짓는다. 본인과 팀원들이 각자의 통장을 털어 3억5000만원을 만들었고, 삼성SDS로부터 1억5000만원을 투자 받아 자본금 5억원으로 독립 법인 네이버컴을 출범시켰다.사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다음, 야후, 라이코스 등 선발업체의 벽을 넘기 어려웠다. 트래픽을 늘려야 했다. 마침 친구이던 김범수의 한게임이 네티즌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2000년 4월 이해진은 네이버를 한게임 커뮤니케이션과 합병해 NHN을 설립했다. 김범수 한게임 사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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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미래에셋 박현주… 금융의 새 시대 열다

    ‘백할머니’를 만나다미래에셋을 세운 사람은 박현주다. 그는 1984년 내외증권연구소라는 초보적 형태의 투자자문사를 여는 것으로 금융업에 첫발을 디뎠다. 당시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주식투자를 직접해보기 위해 집에서 목돈으로 보내준 학비와 하숙비로 벌인 일이다. 이때 박현주의 멘토가 된 사람은 명동의 큰손 ‘백할머니’였다고 한다. 당시 대다수 주식투자자는 감이나 루머에 의존해 주식을 사고팔았는데 특이하게도 백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유망한 회사의 주식을 사서 2년이고 3년이고 묵혀 뒀다가 주가가 오르면 팔아서 큰돈을 벌곤 했다. 요즈음 말하는 ‘가치투자’를 그 당시부터 하고 있었던 셈이다. 박현주는 백할머니에게서 가치투자를 배웠다.1986년에는 내외증권연구소의 문을 닫고 동양증권에 입사했다. 1988년엔 동원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독특한 영업전략으로 약정실적 전국 1위를 달성했다. 그의 주변에는 많은 직원이 모였고 ‘박현주 사단’이라는 이름까지 등장하게 됐다.증권사 거쳐 창업투자사 설립1997년에는 동원증권을 나와서 투자자문사인 미래에셋창업투자를 설립했다. 박현주 사단의 멤버 상당수가 창업에 동참했다. 창업 직후 외환위기가 닥쳤지만 미래에셋에는 오히려 기회였다. 채권에 200억원을 투자해 50억원을 남겼고 벤처기업 ‘다음’에 24억원을 투자한 것이 1000억원으로 커져서 돌아왔다. 가치투자가 빛을 발한 것이다.1998년 법이 개정돼 간접투자가 허용됐다. 즉 남의 돈을 맡아서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박현주는 ‘박현주 1호’라는 한국 최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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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CJ그룹 이재현과 한국영화산업

    한국 영화가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국내 영화시장에서의 점유율만 봐도 알 수 있다. 1995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관객수 기준의 한국 영화 점유율은 20% 수준이었다. 국내 영화 관객의 80%는 한국 영화가 아니라 외국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스티븐 스필버그와의 만남그러던 것이 지금은 한국 영화가 50% 이상을 차지한다. 2016년을 예로 들면 한국 영화 점유율은 54%로 외국 영화 관객 비율 46%를 8%포인트나 앞섰다. 한국 영화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한국 영화를 인정하기 시작해서 액수가 많진 않지만 제법 수출도 이뤄진다.한국 영화의 수준이 높아지는 데 CJ가 큰 역할을 했다. 할리우드와의 합작을 통해 그들의 앞선 노하우를 들여왔고 영화 제작에 안정적인 자금을 댔다. 전국 곳곳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세웠다. 극장은 어둠침침하고 냄새 나는 곳이었는데 데이트하기 좋은 곳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관객도 늘었다. 이런 바탕이 마련되자 한국 영화인의 실력이 늘어갔고, 좋은 영화가 만들어졌다.CJ의 뿌리는 이병철 회장이 1953년 설립한 제일제당이다. 1993년부터 삼성그룹에서 분리 작업을 시작해 1996년 CJ그룹으로 출범했다. CJ가 영화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5년부터다. 당시 미국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드림웍스라는 영화사를 세우느라 투자자를 찾고 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CJ가 3억달러를 투자해 드림웍스의 대주주로 등장했다.‘본업’ 밖으로 눈을 돌리다3억달러면 당시 환율로 2300억원, 그룹 총자산 1조원의 23%에 해당했다. 그렇게 큰 금액을 설탕과 조미료 등 식품만 만들던 기업이 본업과는 전혀 무관한 영화에 투자한 것이다. 사운을 건 결단이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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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혁신적 음악기업가 이수만

    케이팝이 한국의 대표상품이 됐다. 프랑스에서도 이란에서도 남미 의 페루에서조차도 젊은이들이 한국 걸그룹, 보이그룹의 춤과 노래 와 모습에 열광한다.SM의 힙합 프로젝트K팝이 한국의 대표상품이 됐다. 프랑스에서도 이란에서도 남미의 페루에서조차도 젊은이들이 한국 걸그룹, 보이그룹의 춤과 노래와 모습에 열광한다.K팝의 뿌리에는 이수만이라는 기업가가 있다. 그는 주먹구구식 대중가요 산업에 체계적 예측과 투자 개념을 도입했다. 재능이 보이는 아이들을 뽑아서 매력적인 스타로 키워냈고 해외로도 진출시켰다. 외국 작곡가, 안무가들로 구성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적 감각의 음악을 생산했다. SM엔터테인먼트를 주식시장에 상장해 투자자들과 ‘윈윈’ 하는 채널도 만들어냈다.이수만은 원래 가수이자 방송진행자였다. 연예기획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정한 것은 1980년 미국 유학 중 음악 전문 케이블채널인 MTV를 보면서였다. 그전까지의 음악은 ‘듣는 것’이었는데 MTV는 그 음악들에 색채와 패션을 혼합해서 ‘보는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수만도 한국에서 ‘보는 음악’을 만들어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었다. 귀국해서 돈을 모은 후 1989년 연예기획사인 SM기획의 문을 열었다. 본격적인 첫 기획은 힙합 프로젝트였다. 이태원의 어린 춤꾼들이던 현진영, 강원래, 구준엽을 발탁해 ‘현진영과 와와’를 구성했다. 미국에서 인기 절정이던 바비브라운을 모델로 훈련을 시켜나갔다. 성공의 조짐이 보이던 차에 마약사건이 터져 물거품이 된다. 모든 투자금을 날리고 거의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한다. SM기획 소속 가수와 작곡가들도 모두 곁을 떠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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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 구자경과 구본무의 인화와 혁신

    ■ 기억해 주세요LG는 인화를 중시한다. 가족은 물론 임직원 사이가 좋아야 기업이 잘 된다는 경영철학이 깔려 있다. 대기업 경영권 승계도 이런 분위기 탓에 잡음 없이 이뤄져 왔다. LG의 제품 역사에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닌다. 라디오, TV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것도 LG다.해외출장을 다니다 보면 LG 로고가 찍힌 TV를 자주 보게 된다. 호텔 방에 갖춰 놓은 TV가 LG 제품인 경우가 많아서다. LG는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LG의 출발은 진주의 포목점이었다. 창업자는 구인회이고 포목점의 이름은 구인회상점이었다.창업자 구인회 ‘최고 기업 만들자’해방 후 부산에서 화장품, 플라스틱 제품 사업으로 성공을 거뒀고 라디오,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해서 대기업이 됐다. 구인회가 창업해 국내의 최고 기업을 만들었다면 그의 장남인 구자경과 또 다시 그의 장남인 구본무는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키웠다.구자경은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학교 선생님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친 구인회의 엄명으로 락희화학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공장 직공들과 같이 기름밥을 먹고 뒹굴며 기업 생활을 익혔다. 1969년 창업자 구인회가 6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인 구자경이 럭키금성그룹(LG그룹의 옛이름) 회장직을 승계했다. 구자경의 나이 45세였다.럭키금성이 국내에서는 1~2위를 다퉜지만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음 단계의 도약을 위해서는 좁은 국내를 벗어나야 했다. 구자경은 수출을 늘리는 동시에 생산기지 자체를 해외에 만들기 시작했다. 1982년 미국의 헌츠빌에 TV공장을 세웠고 1987년 독일, 1988년에는 영국과 멕시코, 태국, 필리핀 현지에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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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23) 정몽구와 품질 기적

    ■기억해 주세요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현대자동차는 미국에서 품질이 나쁜 차로 알려져 있었다. 미국의 까다로운 소비자를 만족시키려면 품질을 끌어 올려야 했다. 정몽구 회장은 품질 혁신에 사활을 걸었고 그 결과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다.1998년 현대자동차는 현대그룹에서 분리됐다. 정몽구가 새로운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이 됐지만 기쁨에 취할 수만은 없었다. 현대자동차의 품질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신차 품질조사를 하면 현대자동차가 단골 꼴찌였다. 코미디의 소재가 될 정도로 품질이 형편없었다.‘현대차가 80마일 이상 달릴 수 있나’미국의 인기 토크쇼 데이비드 레터맨 쇼의 진행자 데이비드 레터맨은 다음과 같은 말로 현대차를 조롱했다. “현대자동차를 80마일(128㎞) 이상 달리게 하는 방법은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것뿐이다.”이러다가는 미국 시장을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회장이 되자마자 전 직원에게 품질 경영을 선언했다. 품질을 경영의 최우선으로 삼았다.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불량이 발견되면 생산라인 전체를 멈추게 하는 제도였다. ‘오피러스’의 소음을 잡기 위해 수출품 선적을 40일간 미루기까지 했다.정몽구는 자동차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맡은 첫 일이 전국을 돌며 고장 난 현대차를 고쳐주는 것이었다. 나중에 사장직을 맡았던 것도 현대자동차서비스였다. 자동차가 왜 고장이 나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현장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 경험을 가지고 그는 생산현장을 누볐다. 사장과 고위 임원들에게도 현장으로 내려가서 노동자들과 호흡을 같이하게 했다.그러면서 한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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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이건희와 초일류 삼성

    삼성전자는 세계적 초일류 기업이 됐다. 인터브랜드 발표에 따르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459억달러로 세계 7위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보다는 낮지만 GE와 BMW, 아마존보다 높다. 한국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탄생한것이다.‘위기’ 속 찾아온 ‘기회’삼성을 이렇게 만든 주역은 이건희 회장이다. 이병철은 삼성을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었고 그의 아들인 이건희는 세계 최고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지휘봉을 넘겨받은 것은 1987년. 당시 회사는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문제는 반도체였다. 1983년 이후 막대한 투자가 계속됐다. 그 덕분에 기술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선발 주자들을 상당히 따라잡았지만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적자의 연속이었다. 반도체 부문에서의 적자 때문에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그러던 중 뜻밖에 행운이 찾아왔다. 1988년 반도체 대박이 터진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 붐 덕분이었다. 컴퓨터는 원래 집채만큼 큰 물건이었는데 스티브 잡스 같은 미국의 천재들이 책상 위에 올려놓을 정도로 크기를 줄이는데 성공했다. 컴퓨터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부품인 반도체 역시 날게 돋친 듯 매출이 늘었다.한 해 동안 반도체로 벌어들인 이익이 그동안의 적자를 다 메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삼성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올라섰다.과감한 사업 구조조정그다음 사업은 자동차였다, 아버지 때부터 시도했지만 정부가 허가를 안 내줘서 숙원사업이 됐다. 김영삼 정부 때 어렵사리 허가를 받아 자동차사업에 착수했다. 닛산과 합작으로 출시한 SM5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외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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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쓰러진 기업들

    서울 종로2가 사거리에서 남산 쪽으로 걷다 보면 3·1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청계천 위에 걸쳐진 다리다. 사실은 그 길의 이름 자체가 3·1로다. 그리고 그 다리 입구에 서 있는 건물의 이름은 3·1빌딩이다. 층수도 지상 31층, 1971년 지어진 건물인데 근 1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이 건물을 지은 건축주는 삼미그룹이었고 오랫동안 삼미그룹의 사옥으로 쓰였다. 삼미가 도산하는 바람에 건물 주인도 바뀌었다. 현재는 홍콩의 스몰락인베스트먼트 소유다.30대 대기업 중 16개 쓰러져삼미그룹은 특수강 분야에 전문화해서 크게 성공한 기업이었다. 특수강이란 철판에 크롬, 니켈 등을 섞거나 열처리를 해서 만든 금속이다. 스테인리스가 대표적 특수강이다. 1990년대 초반에는 세계 특수강업계 2위에 오를 정도로 사업이 잘됐다. 그러나 경기는 위축되었고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무너졌다.기업도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한편에선 생겨나고 다른 쪽에선 죽는다. 특히 1997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많은 기업이 죽었다. 30대 재벌기업 중에서 16개가 도산하거나 해체됐다. 삼미뿐만 아니라 기아자동차그룹, 한보그룹, 쌍용그룹, 쌍방울그룹 등이 그 이름이다. 오늘은 그들의 이야기다.한보그룹도 철강에 투자했다가 무너졌다. 한보는 세무서 직원을 하던 정태수가 세웠다. 대치동의 쓸모없어 보이는 땅에 아파트를 지었는데 대박이 났다. 지금의 은마아파트다.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사업을 벌려서 돈을 벌었다. 1990년대 초부터 충남 당진에 대규모의 제철소를 세우기 시작했는데 1997년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도산했다. 사업 중 문제가 생기면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해결하곤 했다. 실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