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제철소 만들어 봐!"라고 명령
자본·기술 없이 시작…박태준 "실패하면 죽자"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17)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17)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
■ 기억해 주세요^^

박태준은 “일본 식민지 시절 희생된 조상들의 피값으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자”고 직원들에게 말했고 결국 무에서 유를 이뤘다.

포항제철(포스코)은 위대한 기업이다. 미국 포천지가 발표한 ‘500대 기업’ 명단에서 2011년부터 6년 연속 200위 안에 들었다.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니다. 글로벌 철강전문 분석기관인 WSD 선정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철강사’에 9년 연속 1위에 선정됐다.

민간기업 못지않게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성장

[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17)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
포항제철이 더욱 특별한 것은 공기업으로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기업들은 대부분 민간 기업가들이 키웠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이 모두 그렇다. 대다수 국영기업이 부진을 면치 못한 데 반해 포항제철은 민간기업 못지않게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포항제철의 성공은 박태준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는 1968년부터 1992년까지 25년간 포항제철의 최고경영자였다. 맨땅에서 포항제철을 세웠고 성공시켰다. 박태준은 육군 대위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다. 대통령도 박태준을 가족처럼 믿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제철소를 건설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명령이기에 맡긴 했지만 사명감 외엔 가진 것이 없었다. 자본부터 구해야 했다. 국제기구에 손을 벌려 봤지만 거절당했다. 한국은 그렇게 큰 제철소를 건설해서 운영할 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것이 당시 한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객관적 시각이었다. 결국 일본으로부터 36년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금조로 받은 대일청구권자금 일부를 제철소 건설에 투입하게 됐다.

대일청구권자금 제철소 건설에 투입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종잣돈은 마련했지만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다. 제철소를 제대로 본 사람도 없는데 그 엄청난 용광로를 어떻게 만들어 낸단 말인가. 박태준은 주저하는 직원과 일꾼들을 설득하고 독려해야 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식민지 시절 희생된 조상들의 피값으로 짓는 제철소이니만큼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며 첫 삽을 떴다. 그 후로도 그들은 이것을 ‘우향우 정신’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만들어 낸 것이 포항제철이었다. 그 선봉에는 늘 박태준이 있었다.

제철소 건설을 시작한 지 5년째 되던 1973년 6월, 드디어 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무에서 유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1년 만에 매출 1억달러를 달성했다. 그 후로도 수십 년간 흑자행진을 이어갔다.

포항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1985년부터 광양만에 제2제철소를 짓기 시작해 1992년 완성했다. 그 결과 한국은 연산 2100만t 규모의 철강생산 능력을 갖추게 됐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가 35년 만에 1000만t 능력을 갖췄는데 포항제철의 박태준은 2100만t을 25년 만에 달성했다.

박태준 철저한 성격 … 품질에 양보없어

포항제철의 성공은 박태준이라는 인물과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 덕분으로 볼 수 있다. 박태준은 철저한 성격이었다. 품질에 양보가 없었다. 애써 만든 시설을 약간의 부실이 있다며 통째로 폭파시키기도 했고, 광양에서 수중시설을 만들 때는 작업자들과 같이 직접 물에 들어가 볼트의 조임을 확인했을 정도다. 관찰력도 뛰어나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문제들을 찾아내고 해결해 나갔다.

청탁과 압력을 거절한 것도 매우 중요한 성공 요소였다. 국영기업 또는 공기업 경영자들에게는 취직 청탁, 납품 청탁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청탁을 들어주다 보면 기업은 무능한 사람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조악한 원료와 중간재를 높은 값에 써야 하니 경쟁력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악습이지만 총리, 장관,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이 청탁해 오면 거절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를 믿고 청탁을 매몰차게 물리쳤다. 오직 포스코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만 전념한 덕분에 위대한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1992년 포항제철을 떠난 후 국회의원, 국무총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는 포항제철의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2011년 건강이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그 무렵부터 철강 수요가 위축되는 등 위기가 시작됐다. 박태준 같은 기업가가 다시 나오길 기대한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