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짧지만 심오하게 파고드는 시로 풍성해지는 마음

    <시를 읽는 오후> 작가의 말은 ‘오랫동안 시를 잊고 살았다. 내가 시를 놓을 무렵에, 시가 나를 불렀다’로 시작한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시인도 시를 잊는다지만 문득 ‘시를 읽어야 하는데…’라는 조바심이 들 때가 있다. 짧고 명료한 글로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싶기 때문이다.최영미 시인은 ‘생의 길목에서 만난 마흔네 편의 시’라는 부제가 달린 <시를 읽는 오후> 외에도 세계의 명시를 엄선해 담은 <내가 사랑하는 시>와 한국 작품을 다수 포함한 <최영미의 어떤 시, 안녕 내 사랑>을 출간해 시를 소개한 바 있다.<시를 읽는 오후>에 수록된 한국 시는 최승자 시인의 작품이 유일하다. 최영미 시인은 ‘서른 살 무렵에 그이의 시를 처음 읽고 나는 휘청거렸다. 함께 대학원을 다니던 H와 길을 가며 최승자의 시를 이야기하다 우리는 친해졌다. 이런 시가 있었네. 우리나라에.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페미니즘 세례를 받았던 우리는 여전사처럼 피투성이인 자신을 세상에 내던진 그녀를 사랑했다’며 최승자의 시 ‘개같은 가을이’를 소개했다.‘개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매독같은 가을./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로 시작하는 시는 저자의 말대로 휘청거리게 할 만큼 파격적이다.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뒤표지에 들어갈 추천사를 최승자 선생님께 받아 뛸 듯이 기뻤다고 부연했다. 아직 잔치가 끝나지 않은 시1994년에 출간한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대를 응시하는 처절하고도 뜨거운 언어로 한국 문단

  • 교양 기타

    함민복 시인을 울린 우편배달부 아저씨

    우표함민복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 막힌 날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 잔 시켜주고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손목 잡아주던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함민복 :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울 씨의 일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 출간.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 수상.요즘같이 어려울 때 마음에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 ‘우표’로 상징되는 우편배달부의 속 깊은 정이 애잔하면서도 따뜻하지요. 첫 줄에 나오는 ‘판셈’은 ‘빚잔치’를 말합니다. 남은 재산으로 빚돈을 모두 청산하고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죠.함민복 시인은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수도전기공고로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경주에 있는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일했지요. 이 시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라는 대목처럼 그는 월급을 아껴 집에 우체국 전신환을 또박또박 보냈습니다.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는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사이 우편배달부는 빚 독촉 우편물을

  • 교양 기타

    새해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가장 짧은 문장으로 가장 긴 여운을 주는 시(詩)! 시는 ‘영혼의 비타민’이자 ‘마음을 울리는 악기’입니다. 영감의 원천, 아이디어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학습에 바쁜 청소년에게 시는 ‘생각과 감성의 창’이기도 합니다. 생글생글은 이번주부터 고두현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시인)이 독자에게 매주 배달하는 ‘영혼의 비타민’을 연재합니다.첫 마음 정채봉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사랑하는 사이가,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첫 출근하는 날,신발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개업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여행을 떠나던 날,차표를 끊던 가슴뜀이 식지 않는다면,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정채봉(1946~2001) : 전남 순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등 출간.새해에 읽기 참 좋은 시죠?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 1년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초심(初心)의 초(初)는 옷 의(衣)와 가위 도(刀)를 합친 것이니 옷을 만드는 시초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불편한데 가고 싶은 편의점의 감동과 사랑

    ‘영상물이 넘쳐나는 시대에 누가 책을 보나.’이런 걱정이 넘쳐나지만 100만 부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가 매년 나오고 있다. 2010년대 출간한 책 가운데 열한 권이 밀리언셀러에 등극했고, 2020년대 들어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불편한 편의점>이 100만 부를 돌파했다.전염병에 경제난까지 겹친 데다 대립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 유쾌하지 않은 제목의 <불편한 편의점>이 각광받은 이유는 뭘까. <불편한 편의점> 1권은 2021년 4월, 2권은 2022년 8월 출간됐다. 1권은 코로나로 모든 게 불투명하던 상황에, 2권은 실외마스크 해제가 일부 시행돼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 나왔다. 등장인물들도 삶의 고난에다 코로나라는 이중고를 겪지만 따뜻함과 신뢰로 고난과 불편을 녹여낸다.김호연 작가 역시 <불편한 편의점>의 등장인물들처럼 고초를 겪다가 이 소설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 만화 기획자, 출판 편집자 등 다양한 일을 하다가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로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받으며 소설가가 되었다. 이후 발표한 몇 권의 소설과 산문집이 별다른 성과가 없어 힘든 시기를 보냈으나 <불편한 편의점>으로 ‘ALWAYS 편의점’ 사람들처럼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긍정의 힘이 마구 발산되는 곳<불편한 편의점>은 1권과 2권에 각각 8개의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각 장마다 중심인물이 바뀐다.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젖어들어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긍정의 힘이 마구 발산된다.서울역 근처 청파동에 위치한 소설 속 ‘ALWAYS 편의점’은 손님이 많지 않아 물건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상반된 시각과 통찰 통해 생각 근육을 키워라

    대한민국을 한 단어로 축약하라면 ‘대립’을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듯하다. 분명한 사실,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안 앞에서도 엇갈린 의견을 내며 얼굴 붉히는 정치인들을 날마다 목격하며 살기 때문이다. K컬처가 세계로 뻗어가고 있지만 한국의 토론문화만은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토론의 힘 생각의 격>은 제목처럼 토론과 생각으로 힘과 격을 기를 수 있는 책이다. 쉽지 않은 주제로 책을 쓴 허원순 저자는 33년의 기자생활 가운데 12년간 논설위원을 지낸 논객이다.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인 저자는 그간 기명 칼럼과 사설 등 논리를 앞세운 글을 1700여 편 썼으며 취재차 46개국을 방문한 이력을 갖고 있다.사설은 ‘특정 사안, 특정 시점 등 특정 계기에 밝히는 신문사의 평가 내지는 입장’을 담은 글이지만 <토론의 힘 생각의 격>에서 다룬 70가지 아젠다는 찬반 양쪽의 시각을 중립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논쟁의 포인트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저자가 논술탐구형 매체 <생글생글>에 기고한 글을 가치의 충돌, 경쟁과 규제, 고용과 노동, 성장과 복지라는 카테고리로 구분해 책으로 펴냈다. ‘촉법소년 연령 하향, 실효성이 있을까?’ ‘인구 감소 문제, 재정투입으로 풀 수 있을까?’ ‘최저임금, 해마다 반드시 올려야 할까?’ ‘취약계층 빚, 탕감해줘도 될까?’ 등 제목만 봐도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가 한눈에 들어온다.  3단계 전개로 논리력 기르기각각의 주제는 ‘사건이나 사태를 통해 생각해야 할 포인트’를 제시한 뒤 ‘찬성’과 ‘반대’ 의견을 피력한 다음 ‘생각하기’로 한 번 더 정리했다.많은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낯선 할머니와 함께 보낸 따뜻한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그린 꽤 많은 작품 가운데 영화로도 만들어진 단편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여러 사람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 오기 렌이 폴 오스터에게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잘 갈무리해 폴 오스터가 신문에 발표하자 웨인 왕이 읽고 ‘스모크’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 많은 사람이 즐겼기 때문이다.단행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는 웨인 왕의 서문, 단편소설, ‘스모크’ 제작 과정과 ‘스모크’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스모크’로 웨인 왕은 199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다. 1947년생인 폴 오스터는 ‘떠오르는 미국의 별’이라는 칭호를 받은 순수문학 작가로 대표작은 탐정 소설 형식으로 쓴 <뉴욕 3부작>이다. 유럽 문단, 특히 프랑스에서 주목받는 그의 작품은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다. 텅 빈 지갑을 남긴 도둑<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나는 이 이야기를 오기 렌으로부터 들었다’로 시작한다. 작가인 나는 브루클린 다운타운에 있는 시가 가게의 오기와 알고 지낸 지 11년이 되었다. ‘뉴욕타임스’에서 ‘크리스마스 아침 자에 실릴 단편소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오기에게 뭘 써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오기가 “점심을 사면 최고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제안한다.오기 렌은 “1972년 여름이었어”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열아홉 살쯤 된 아이가 가게에 들어와서 책들을 훔쳐 레인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기가 소리를 지르자 그는 산토끼처럼 달아나버렸고 도망하다가 떨어뜨린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음모론에 기초한 흥미진진한 여정

    많은 작가가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만든다. ‘하나의 소재를 서로 다른 장르에 적용해 파급효과를 노리는 마케팅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다. 초강력 베스트셀러들은 영화, 게임, 음반,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 장난감, 출판 등 다양한 장르로 퍼져나가 엄청난 부가가치를 올렸다.2003년 출간된 <다빈치 코드>는 첫해에 700만 부가 팔린 뒤 2012년 1억 부를 넘어섰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다빈치 코드’의 진위를 가리는 다큐멘터리도 제작됐다. <다빈치 코드 깨기>와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와 같은 <다빈치 코드>를 반박하는 서적이 출간되기도 했다.<다빈치 코드> 출간 당시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무섭고 복수심이 강한 미국인이 세계의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2006년 영화 <다빈치 코드>가 개봉될 당시 우리나라 개신교계에서 영화 관람 거부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성경’에 정면 도전하는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반발이 컸던 것이다.‘성경은 신의 작품이 아닌 인간의 작품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 아닌 놀라운 영향력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었을 뿐이다. 예수는 부활해 승천한 것이 아니라 막달레나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지금까지 그 가문이 이어지고 있다. 예수를 신처럼 묘사한 복음서만 골라 윤색한 것이 성경이다.’ 주인공과 함께 추리해보라이런 내용과 함께 가톨릭을 나쁘게 묘사해 책이 나오자마자 질타가 쏟아졌다. 소설에 나오는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해 다양한 장소와 그림을 정확히 묘사한 부분도 많지만 <다빈치 코드 깨기>에 보면 음모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치열한 삶 속에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질문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이 문장을 외우면서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예전 번역본의 ‘아프락사스’가 ‘압락사스’보다 훨씬 익숙하다면서.<데미안>이 세계적인 고전이 된 까닭은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간 내면의 혼란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열 살 때부터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이 되기까지 때마다 화두를 던지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혹은 혼자서 수많은 과정을 이겨낸다.헤르만 헤세는 1877년 태어나 1962년 세상을 떠났다. 목사의 아들인 헤세는 수도원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서점과 시계공장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자원했으나 부적격 판정으로 실전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대신 스위스에서 ‘억류자들을 위한’ 잡지를 22권이나 냈다.사회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헤세의 소설은 자신이 겪은 역사적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지만 시대 자체를 소설의 주제로 삼지 않고 ‘집단 인간’이 아닌 ‘개인 인간’을 조명한 소설을 썼다. 그로 인해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게 된 것이다. 데미안이 선물한 안전과 혼돈유복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열 살의 싱클레어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했다가 동급생 크로머에게 협박당하고 조종당하게 된다. 데미안이 나타나면서 크로머로부터 벗어나지만 사고 자체가 흔들리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