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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항일 동맹 휴학, 그 시절 소녀들은 용감했다

    요즘 엔저 현상에다 거리마저 가까워 해외여행객의 30%가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 일본 국민에게 세계 여러 도시 중 가장 가고 싶은 곳을 물었을 때 서울이 1위, 부산이 4위에 올랐다. 양국 국민이 서로의 나라를 찾아 즐기고 있지만 과거사를 돌아볼 때면 일본에 호의적일 수만은 없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독립군의 치열한 투쟁은 소설이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통해 많이 소개됐지만 중·고등학생의 항거를 담은 작품은 흔치 않다. 여학생들이 부당한 일본인 선생에게 대항하는 내용을 담은 <은명 소녀 분투기>는 범상치 않은 스토리로 눈길을 끈다.신현수 작가는 10여 년 전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의 항일 동맹 휴학을 접하고 충격을 받아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1920년대 중후반, 일제의 교육 행태에 저항하기 위해 집단으로 등교 또는 수업 거부를 하는 동맹 휴학이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됐다.이 소설은 1927년 5월부터 9월까지 경성 수송동에 있던 숙명여고보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항일 동맹 휴학을 모티브로 삼았다. 새로 부임한 일본인 학감과 재봉교사가 자행한 일본화 교육에 저항해 전교생 400명이 분연히 일어났고, 학부모와 졸업생은 물론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연대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모든 과정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학생들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관철됐고, 후일 광주항일학생운동의 디딤돌이 된 저항운동이다. 일본인 선생들의 횡포<은명 소녀 분투기>의 주인공 혜인과 경성은행장의 외동딸 애리, 장차 일본으로 유학 가서 화가가 될 꿈을 꾸는 금선은 늘 어울리는 2학년 삼인방이다.

  • 교양 기타

    '세한도 정신'의 유안진 시인 별명은 뜻밖에 '숙맥'

    세한도 가는 길유안진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오십령 고개부터는추사체로 뻗친 길이다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닳고 터진 알발로뜨겁게 녹여가라신다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유안진: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달하> <월령가 쑥대머리> <다보탑을 줍다> <거짓말로 참말하기> <둥근 세모꼴> <숙맥 노트> 등 출간. 정지용문학상, 목월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수상.‘세한도(歲寒圖·사진)’는 추사가 제주 유배 시절 그린 수묵화입니다. 초라한 토담집 한 채를 사이에 두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서 있는 겨울 풍경을 묘사했지요. 갈필로 거칠게 붓질한 이 작품에는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정신의 품격이 새겨져 있습니다.추사는 그림 발문에 선비의 지조와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이 그림을 준다고 밝혔어요. 그러면서 ‘논어’의 한 대목인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추위가 닥친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를 인용했지요.유안진 시인은 절해고도에 유배된 추사를 떠올리며 스스로 유배자가 되어 자신을 채찍질하는 마음을 시 ‘세한도 가는 길’에 담았습니다. 제목이 ‘세한도 가는 길’인 것은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곳이 유배의 섬(島)이고, 그 여정이 곧 길(道)이라는 의미겠지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라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합니다.이렇게

  • 교양 기타

    추사는 수선화를 왜 그리 좋아했을까

    수선화(水仙花) 김정희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그윽하고 담백한 기풍 참으로 빼어나다.매화나무 고고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맑은 물에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김정희(1786~1856) :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화가.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혹한 속에 수선화가 피었습니다. 제주 한림공원에는 수십만 송이나 피었습니다. 제주에 자생하는 ‘제주수선화’보다 하얀 꽃받침에 금빛 망울을 올린 ‘금잔옥대 수선화’가 더 많군요. 눈발 속에서 여린 꽃잎을 피웠으니 설중화(雪中花)라 할 만합니다. 똑같이 눈 속에 피는 꽃이지만 매화나 동백과 달리 몸체가 가녀려서 더욱 마음이 끌립니다. 8년 넘는 유배생활의 반려식물추사 김정희가 유배 살던 대정읍 일대에도 수선화가 만발했습니다. 대정향교에서 안덕 계곡까지 이어지는 추사유배길 또한 길쭉한 수선화밭으로 변했지요. 추사는 54세 때인 1840년 이곳에 와 8년 넘게 유배생활을 했습니다.그 외로운 적소의 밤을 함께 보내고, 간난의 시간을 함께 견딘 꽃이 수선화였죠. 그는 수선화를 워낙 좋아해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문집에 담긴 시 ‘수선화(水仙花)’에서는 ‘해탈신선’이라고 극찬할 정도였죠.그가 수선화를 처음 본 것은 24세 때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연경(베이징)에 갔다가 이 꽃의 청순미에 매료됐다고 해요. 43세 때에는 평안감사인 아버지를 만나러 평양에 들렀다가 중국에 다녀온 사신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수선화를 달라고 해서 남양주의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선물했습니다.다산은 감탄하며 ‘어린 손자는 처음 보는지라 부추 잎 같다고 하고/어린 여종은 마늘 싹이 일찍 피었다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K컬처와 마셜아츠의 선봉 태권도, 그 시작과 성공

    <태권, 그 무극의 길>은 ‘2022 무예소설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그동안 나온 무예 소설은 역사적 전쟁이나 무사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 국기인 태권도의 태동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현대 인물 이준구를 중심으로 펼쳤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충호 작가는 무예를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사료를 발굴해 한 줄 한 줄 역사서를 쓰는 마음으로 집필했다는 작가는 “우리의 전통 무예인 태견의 뿌리에서 싹을 틔워 세계 마셜아츠의 정상에 우뚝 선 위대한 태권도의 역사를 오래전부터 소설로 쓰고 싶었다”고 소회를 밝혔다.이충호 작가의 이력을 살피다 보면 강호를 평정한 무림의 고수가 스르륵 떠오른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대학에서 강의하며 지난한 태권도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우선 놀라게 된다. 단어 암기의 신기원을 이룬 <영단어 자동연상암기법>의 저자이기도 한 이충호 작가가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면서 시, 소설, 수필, 평론 당선이라는 등단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는 사실도 경이롭다. 정년퇴직할 때까지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해 한국소설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서울시인상,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 등 수많은 상을 받으며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등 다양한 협회에서 활동했다. 그가 흥사단 세계빈민돕기운동 대표로 활약한 사실까지 알고 나면 ‘롤모델로 삼기에 벅찬 인물’이라는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미국 심장부에 태권도를 심다<태권, 그 무극의 길>이 무예 소설이자 다큐멘터리 소설인지라 책을 읽는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짧지만 심오하게 파고드는 시로 풍성해지는 마음

    <시를 읽는 오후> 작가의 말은 ‘오랫동안 시를 잊고 살았다. 내가 시를 놓을 무렵에, 시가 나를 불렀다’로 시작한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시인도 시를 잊는다지만 문득 ‘시를 읽어야 하는데…’라는 조바심이 들 때가 있다. 짧고 명료한 글로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싶기 때문이다.최영미 시인은 ‘생의 길목에서 만난 마흔네 편의 시’라는 부제가 달린 <시를 읽는 오후> 외에도 세계의 명시를 엄선해 담은 <내가 사랑하는 시>와 한국 작품을 다수 포함한 <최영미의 어떤 시, 안녕 내 사랑>을 출간해 시를 소개한 바 있다.<시를 읽는 오후>에 수록된 한국 시는 최승자 시인의 작품이 유일하다. 최영미 시인은 ‘서른 살 무렵에 그이의 시를 처음 읽고 나는 휘청거렸다. 함께 대학원을 다니던 H와 길을 가며 최승자의 시를 이야기하다 우리는 친해졌다. 이런 시가 있었네. 우리나라에.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페미니즘 세례를 받았던 우리는 여전사처럼 피투성이인 자신을 세상에 내던진 그녀를 사랑했다’며 최승자의 시 ‘개같은 가을이’를 소개했다.‘개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매독같은 가을./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로 시작하는 시는 저자의 말대로 휘청거리게 할 만큼 파격적이다.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뒤표지에 들어갈 추천사를 최승자 선생님께 받아 뛸 듯이 기뻤다고 부연했다. 아직 잔치가 끝나지 않은 시1994년에 출간한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대를 응시하는 처절하고도 뜨거운 언어로 한국 문단

  • 교양 기타

    함민복 시인을 울린 우편배달부 아저씨

    우표함민복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 막힌 날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 잔 시켜주고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손목 잡아주던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함민복 :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울 씨의 일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 출간.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 수상.요즘같이 어려울 때 마음에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 ‘우표’로 상징되는 우편배달부의 속 깊은 정이 애잔하면서도 따뜻하지요. 첫 줄에 나오는 ‘판셈’은 ‘빚잔치’를 말합니다. 남은 재산으로 빚돈을 모두 청산하고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죠.함민복 시인은 어려서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수도전기공고로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경주에 있는 월성 원자력발전소에서 4년간 일했지요. 이 시의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라는 대목처럼 그는 월급을 아껴 집에 우체국 전신환을 또박또박 보냈습니다.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는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지요. 그사이 우편배달부는 빚 독촉 우편물을

  • 교양 기타

    새해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가장 짧은 문장으로 가장 긴 여운을 주는 시(詩)! 시는 ‘영혼의 비타민’이자 ‘마음을 울리는 악기’입니다. 영감의 원천, 아이디어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학습에 바쁜 청소년에게 시는 ‘생각과 감성의 창’이기도 합니다. 생글생글은 이번주부터 고두현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시인)이 독자에게 매주 배달하는 ‘영혼의 비타민’을 연재합니다.첫 마음 정채봉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사랑하는 사이가,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첫 출근하는 날,신발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개업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여행을 떠나던 날,차표를 끊던 가슴뜀이 식지 않는다면,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정채봉(1946~2001) : 전남 순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등 출간.새해에 읽기 참 좋은 시죠?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 1년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초심(初心)의 초(初)는 옷 의(衣)와 가위 도(刀)를 합친 것이니 옷을 만드는 시초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불편한데 가고 싶은 편의점의 감동과 사랑

    ‘영상물이 넘쳐나는 시대에 누가 책을 보나.’이런 걱정이 넘쳐나지만 100만 부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가 매년 나오고 있다. 2010년대 출간한 책 가운데 열한 권이 밀리언셀러에 등극했고, 2020년대 들어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불편한 편의점>이 100만 부를 돌파했다.전염병에 경제난까지 겹친 데다 대립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 유쾌하지 않은 제목의 <불편한 편의점>이 각광받은 이유는 뭘까. <불편한 편의점> 1권은 2021년 4월, 2권은 2022년 8월 출간됐다. 1권은 코로나로 모든 게 불투명하던 상황에, 2권은 실외마스크 해제가 일부 시행돼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 나왔다. 등장인물들도 삶의 고난에다 코로나라는 이중고를 겪지만 따뜻함과 신뢰로 고난과 불편을 녹여낸다.김호연 작가 역시 <불편한 편의점>의 등장인물들처럼 고초를 겪다가 이 소설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 만화 기획자, 출판 편집자 등 다양한 일을 하다가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로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받으며 소설가가 되었다. 이후 발표한 몇 권의 소설과 산문집이 별다른 성과가 없어 힘든 시기를 보냈으나 <불편한 편의점>으로 ‘ALWAYS 편의점’ 사람들처럼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긍정의 힘이 마구 발산되는 곳<불편한 편의점>은 1권과 2권에 각각 8개의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각 장마다 중심인물이 바뀐다.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젖어들어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긍정의 힘이 마구 발산된다.서울역 근처 청파동에 위치한 소설 속 ‘ALWAYS 편의점’은 손님이 많지 않아 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