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카롤린 봉그랑 <밑줄 긋는 남자>
누군가가 줄을 그어놓은 책을 읽을 때면 그 문장이 마음에 가기 마련이다. 연속적으로 그어 놓은 문장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을 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밑줄 긋는 남자>는 프랑스 작가 카롤린 봉그랑이 1993년에 출간한 두 번째 작품이다. 2000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후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 2008년 문고판이 나왔고, 2017년 표지를 바꾸고 열린책들 블루 컬렉션으로 다시 선보였다. 카롤린 봉그랑은 자신의 책을 읽는 한국인에게 경탄을 금할 수 없다며 아홉 번째 소설을 썼다는 소식과 함께 “누군가와 조금이라도 삶을 공유할 수 있다면, 서로 잘 이해하고 좋은 시간을 은근하게 나눌 수 있다면 소설적 환상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카롤린 봉그랑이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말한 <밑줄 긋는 남자>의 주인공 콩스탕스. 로맹 가리를 좋아해 그의 책이라면 갖가지 판형을 모조리 사들인다. 25세 콩스탕스의 고민은 가리가 쓴 책이 31권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관심을 갖기 위해 빌려온 책 맨 마지막 장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을 읽으라는 글씨를 발견한다.본 적도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다<노름꾼>의 줄거리도 마음에 드는 데다 줄이 그어진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에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게 순종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같은 문장에 끌리고 만다.
친구의 아이를 봐주고 간혹 잡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무료하게 지내던 콩스탕스는 밑줄 그은 사람이 같은 층에 사는 이웃집 남자일 수도 있고 프랑스 대통령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며 점점 빠져든다. <노름꾼> 맨 마지막 페이지에 추천해놓은 로제 니미에 <이방의 여인> 주인공도 자신과 같은 10월생이라는 점에서 이상한 확신까지 갖게 된다.
누구를 보든 밑줄 긋는 남자와 연관시키게 된 콩스탕스는 급기야 밑줄 그어진 문장에 답변이 될 만한 문장을 찾아 자신도 밑줄을 긋고, 질문을 써넣기까지 한다. 어느 순간 본 적도 없는 밑줄 긋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집을 꾸미고 대화를 나누고 선물까지 마련한다.
그러다 앙드레 지드 <여인들의 학교>를 읽고 자기 행동이 “아주 그럴싸하지만, 너무 허황된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다시 성미 고약한 여자로 돌아와 답답하게 지내던 콩스탕스는 도서관 직원 지젤에게 그간의 일을 솔직하게 담은 편지를 쓴다. “받을 만한 이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 덕분인지 얼마 후 “제가 당신을 꿈꾸듯이 저를 꿈꾸십시오”라는 달콤한 편지가 도착한다.
둘은 만나게 되고 몇 번 데이트하지만 콩스탕스는 클로드가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클로드도 지젤이 별 뜻 없이 보라고 준 편지를 읽고 연락했다며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고 고백한다.현실이 상상보다 훨씬 만족스러울 수 있다콩스탕스에게 사랑을 고백한 클로드는 그녀를 위해 밑줄 긋는 남자를 찾아주기로 결심하고 수많은 도서 대출증을 검토하려고 나선다. 그 과정에서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진다. 소설의 맨 마지막은 밑줄 긋는 남자가 보라고 한 로베르 사전 126페이지의 단어가 장식한다. 콩스탕스가 예전에 찾았던 사전과 다른 단어가 적혀 있는 이유는 뭘까.
<밑줄 긋는 남자>의 문장들은 실제 도스토옙스키, 가리, 니미에,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음악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소설이다.
특히 이세욱 번역가의 매끄러운 번역문 곳곳에 맛깔스러운 단어가 선물처럼 배치되어 있다. ‘가리사니, 엇겯다, 마디다, 시뻐하다, 손방, 강샘, 후무리다, 드레지다, 눈비음’ 같은 단어의 뜻을 찾아보며 격조 높은 표현법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카롤린 봉그랑은 주인공 콩스탕스가 깨달은 바를 “진정한 삶은 그다지 실망스럽지 않고, 더 나아가 현실의 삶이 상상의 삶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로 정의했다. 완벽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현실을 한결 행복하게 여기게 된다니, 일단 신비로운 구름 위로 초대하는 <밑줄 긋는 남자> 속에 빠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