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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단순 스토리에 담긴 오묘한 은유와 넘치는 지식

    <모비 딕>은 완독하고 나면 스스로를 칭찬하게 되는 작품이다. 7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인 데다 내용이 쉽지 않으니 다 읽고 나면 뿌듯함이 밀려오면서 높은 자존감을 맛보게 된다.얼마 전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예비 고등학생에게 <모비 딕>을 선물하자 국내 도서 사이트에서 실시간 인기 도서 1위에 올랐다. 2년 전 높은 시청률을 올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가 읽은 소설도 <모비 딕>이었고, 당시에도 이 소설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모비 딕>은 전 세계 수많은 유명 인사가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유명하다. 하워드 슐츠가 커피를 좋아하는 차분한 성격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에 매료되어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니, 소설 속 인물들이 궁금할 만하다.힘든 삶을 작품으로 승화해 위대한 작가가 된 예는 수없이 많다. 허먼 멜빌 역시 13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은행이나 상점의 잔심부름, 농장일 등을 전전했다. 20세에 상선의 선원이 된 그는 22세에 포경선을 타게 된다. 그가 5년여 동안 포경선의 선원과 미 해군으로 남태평양을 누빈 경험이 <모비 딕> 집필의 바탕이 됐다.<모비 딕>이 1851년에 출간되었다는 점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리얼리즘이 강세이던 19세기에 멜빌은 20세기를 풍미한 모더니즘을 앞서 구현하며 다양한 은유로 미국과 불합리한 여러 제도를 비판했다. 멜빌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나 탄생 100주년이던 1919년, 컬럼비아대학교 레이먼드 위버 교수의 극찬으로 역주행이 시작됐다. 현재 멜빌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모비 딕>은 세익스피어의 <햄릿>, 단테의 <신곡>과 어깨를 나란히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절망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우정·사랑

    <키친>은 요시모토 바나나가 24세 때인 1988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이 작품으로 카이엔 신인문학상과 이즈미 쿄카상을 받았으며, 세계 18개국에서 번역되어 250만 부가 넘는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일상 언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문체에 친밀감 있는 표현’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주목받으면서 ‘요시모토 바나나 현상’이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했다.<키친>은 세 개의 단편 ‘키친’, ‘만월’, ‘달빛 그림자’로 구성되었다. ‘만월’은 ‘키친’의 주인공들이 몇 달 후에 겪는 일을 그려 ‘키친’과 ‘만월’은 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부엌’인 사쿠라이 미카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가 죽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속에서 지낸다. 할머니는 결국 휴학 중인 미카게의 곁을 떠나고 만다. 부엌에서 절망하며 뒹굴뒹굴 자고 있을 때 “기적이 찹쌀 경단처럼 찾아온 그 오후”,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한 살 아래 남자가 나타난다.다나베 유이치가 아르바이트하던 꽃집에 할머니가 자주 들러 꽃을 사 갔다고는 하지만 “당분간 우리 집에 와 있으라”는 제안 앞에서 미카게는 어안이 벙벙하다. 그날부터 미카게는 유이치와 그의 어머니 에리코와 함께 지낸다. 미카게는 6개월간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거실의 푹신한 소파에서 잠들며 조금씩 슬픔을 이겨낸다. 인생이란 한 번은 절망해봐야 알아유이치를 혼자 키우며 힘든 일을 많이 겪은 에리코는 미카게에게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뭘 기르는 게 좋아.

  • 교양 기타

    '닥터 지바고' 영화를 그대로 압축한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겨울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눈보라가 휘몰아쳤지.세상 끝에서 끝까지 휩쓸었지.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여름날 날벌레 떼가날개 치며 불꽃으로 달려들듯밖에서는 눈송이들이 창을 두드리며날아들고 있었네.눈보라는 유리창 위에둥근 원과 화살들을 만들었고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 비친 천장에는일그러진 그림자들엇갈린 팔과 엇갈린 다리처럼운명이 얽혔네.그리고 장화 두 짝바닥에 투둑 떨어지고촛농이 눈물 되어 촛대서옷 위로 방울져 떨어졌네.그리고 모든 것은 눈안개 속에희뿌옇게 사라져 갔고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촛불 날리고유혹의 불꽃은천사처럼 두 날개를 추켜올렸지.십자가 형상으로.눈보라는 2월 내내 휘몰아쳤지.그리고 쉬임없이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 러시아 시인이자 소설가.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닥터 지바고>를 그대로 압축해놓은 듯하죠?이 시 ‘겨울밤’의 배경은 암흑 속의 러시아 혁명기입니다. ‘눈보라’는 시베리아까지 휘몰아친 혁명의 소용돌이를 상징하지요. ‘촛불’은 시대의 광풍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개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엇갈리는 ‘운명의 그림자’는 소설 주인공인 유리와 라라를 닮았습니다. 당국 압박에 노벨상도 거부해야 했던…비운의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삶도 그랬지요. 그의 본업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습니다. <닥터

  • 교양 기타

    생업(生業)이 직업(職業)보다 숭고한 이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생업                                윤효종로6가 횡단보도원단두루마리를 가득 실은 오토바이들이숨을 고르고 있었다.신호총이 울렸다.장애물을 요리조리 헤치며동대문시장 안 저마다의 결승선을 향해순식간에 사라졌다.좀처럼 등위를 매길 수 없었다.모두 1등이었다.* 윤효: 1956년 충남 논산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참말> <배꼽> 등 출간. 편운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풀꽃문학상 등 수상.벌써 12월 말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 짧으면서도 강렬한 시 ‘생업’을 소개합니다.생(生)은 윤효 시인의 문학적 화두 중 하나입니다. 생이란 ‘생명’과 ‘목숨’의 비밀을 여는 열쇳말이죠. 나무로 치자면 가장 큰 가지, 풀꽃으로 치면 가장 실한 줄기가 곧 생입니다. 갑골문에서 ‘생(生)’은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날 생(生)이고, 낳을 산(産)입니다. 이 글자는 살 활(活)과 있을 존(存)의 뜻까지 아우르지요.생업(生業)은 목숨 걸고 집중하는 일이 가운데 생업(生業)은 우리가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집중하는 일입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는 직업(職業)과 다르죠. 윤효 시인은 분초를 다투며 원단을 실어 나르는 시장통 오토바이 짐꾼들을 보면서 ‘생업’이라는 시를 썼습니다.이 시에는 ‘숨을 고르고’ 잔뜩 긴장해 있다가 ‘땅’ 하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튀어 나가는 달리기 선수들의 속도가 응축돼 있습니다. ‘장애물을 요리조리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사유의 힘' 강조한 사색집

    1662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블레즈 파스칼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단연 ‘천재’다. 12세에 유클리드기하학의 32번 명제를 증명했으며, 몇 년 뒤 파스칼 정리를 담은 수학 논문 ‘원추곡선론’을 발표했으니 당연한 찬사다.근대 확률이론의 기초를 세운 천재 수학자, 자동차나 비행기 기술에 꼭 필요한 ‘파스칼의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자,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 파스칼을 오늘날까지 기억하게 하는 데에는 <팡세>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팡세(Penses)란 ‘사색집’이란 뜻으로, 파스칼의 <팡세>는 924편의 짧고 긴 글로 구성되어 있다.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 파스칼은 28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여동생마저 수녀원에 들어간 후 깊은 고뇌와 비통에 빠졌다. 초대 신앙의 영적 순수성과 내면적 도덕의 엄격성을 강조하는 장세니스트들이 예수회와 대립할 때 장세니스트 편에 서서 변호하기도 했다. 일련의 일을 겪은 파스칼은 자유사상가와 무신론자에게 기독교의 진리성을 변증하기 위해 <기독교 호교론〉 집필에 들어갔고, 이 호교론이 <팡세>의 주요 내용이다.36세부터 건강이 나빠진 파스칼은 〈호교론>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39세에 별세했다. 그가 사망한 후 몇 편의 과학 논문, <은총론>을 비롯한 수기와 소품, 그리고 <기독교 호교론>을 위한 수기들이 발견되었다. 1669년에 이 단장들을 모아 출간했지만, 파스칼의 글은 거의 2세기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그 너머를 바라보라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파스칼에 대한 관심이 차츰 일기 시작했고, 20세기 중엽 각종 연구 끝에 파스칼이 남겨놓은 상태 그대로를 복원, 널리 읽히는 고전 <

  • 이근미 작가의 BOOK STORY

    슈퍼 개인의 시대…콘텐츠로 세상을 바꿔보라

    ‘따라 하면 결과가 따라오는 SNS 마케팅 성공 공식’이라는 부제를 단 <1등은 당신처럼 SNS 하지 않는다>는 ‘SNS를 이렇게 운영하라’고 말하는 대신 수많은 사례를 보여주는 책이다. 기업이나 관공서, 개인이 어떻게 SNS를 활용하는지 진솔하게 풀어나가는 가운데 ‘나도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법칙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만든다.정진수 저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인스타그램 마케팅과 SNS 트렌드 분석 내용을 집필한 인물이다. 교육업, 홍보대행업, 외식업을 하면서 직접 경험한 일을 바탕으로 강의하며 SNS 분야 도서 12권을 출간했다. 현재 인스타그램, 블로그, 스마트스토어, 페이스북,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그를 사람들은 ‘SNS 강사들의 롤모델’이라 부른다.요즘 대부분의 기업과 개인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스마트스토어 등을 활용해 광고나 홍보를 한다. TV, 라디오, 신문, 잡지 같은 전통 매체를 제쳐두고 바로 뉴미디어 채널로 홍보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공중파 프로그램에 유명 SNS 인플루언서가 출연하는 일은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는 시대다.바뀐 세상은 또 하나의 기회다저자는 기업들이 인플루언서를 통해 커뮤니티와 팬덤을 끌어들이고 있다며 “이제는 커뮤니티를 가진 슈퍼 개인의 시대”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몸값 높은 연예인만 등용하던 랑콤도 제니피끄 세럼 광고에 인플루언서 5인(리정, 하누, 조은, 다샤, 김다인)을 모델로 내세웠다.우선 ‘세상이 너무 바뀌어 적응하기 힘들다’는 탄식보다 ‘구독자에 그칠 게 아니라 나의 콘텐츠로 세상을 바꿔보자’는 각오로 <1등은 당신처럼 SNS 하지

  • 교양 기타

    이해인 수녀가 암을 이긴 비결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장 거룩한 것은장재선겨울 끝에서 봄이 일어나는 것처럼명랑 투병으로 희망을 일으킨다는당신,웃는 얼굴이 떠오릅니다.단정한 시를 쓰는 분이그렇게 말이 빠를 줄은 몰랐지요.암을 다스리는 분이그렇게 많이 웃을 줄도 몰랐지요.교도소 담장 안의 이들과편지를 나눈 이야기를 하다가세상 떠난 이들이 사무쳤던당신,끝내 눈시울을 붉혔지요.가장 거룩한 신앙은가장 인간적인 것임을 알려준당신,웃다 울다 하는 모습이예뻤어요.* 장재선: 1966년 전북 김제 출생.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기울지 않는 길>, <시로 만난 별들> 등 출간. 서정주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등 수상.장재선 시인은 문학 담당 기자이기도 합니다. 암 투병으로 고생하던 이해인 수녀를 만나고 나서 ‘가장 거룩한 것은’이라는 시를 썼다고 해요.‘시 쓰는 수도자’ 이해인 수녀에게 암이 발병한 것은 2008년 여름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한 것과 달리, 정작 그는 ‘명랑 투병’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만큼 밝고 명랑했지요. 이 시의 첫 구절 ‘겨울 끝에서 봄이 일어나는 것처럼’ 맑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명랑 투병? 하하. 제 이름이 명숙이에요”‘명랑 투병’이란 표현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이해인 수녀가 문화부 기자인 장재선 시인에게 들려준 얘기는 이렇습니다.“명랑 투병? 하하. 제 주민등록상 이름이 명숙이에요. 밝을 명, 맑을 숙. 암센터에서 진단받았을 때 의사 선생님이 수술 먼저 하겠느냐, 방사선 치료 먼저 하겠느냐고 묻더군요.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즉시 표정을 밝게 하고 답했지요. 60여 년 살았으니까 됐어요. 선생님 좋은 대로 하셔요. 이후의 결과에

  • 교양 기타

    그가 집착에서 벗어난 비결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기심을 내려놓다(息機)이색이미 지나간 아주 작은 일들도꿈속에선 선명하게 생각이 나네.건망증 고쳐 준 사람 창 들고 쫓아냈다는그 말도 참으로 일리가 있네.아내를 놔두고 이사했다는 것 또한우연히 한 말은 아닐 것이라 싶네.몇 년간 병든 채로 지내온 지금기심(機心)을 내려놓는 것이 약보다 낫네.*이색(李穡, 1328~1396): 고려 시인, 대학자오늘은 고려 말기 시인이자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를 읽습니다. 그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추앙받은 인물이지요. 14세 때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원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해 양국 관리를 겸할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건망증 고쳐준 사람을 쫓아내다니그런 그도 여말선초 격변의 역사 속에서 몇 차례나 유배와 추방을 당했습니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살해되는 고통까지 겪었지요.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아 한때 제자였던 정도전과 조준 등이 겨눈 칼날 앞에 서야 했습니다.새 정권의 권유를 뿌리치고 낙향했지만, 아들들의 죽음 때문에 결국에는 깊은 병을 얻었죠. 시골집에 은거한 지 2년 만에 부인이 죽고, 그로부터 2년 뒤엔 그도 세상을 떠났습니다.그가 남긴 시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기심을 내려놓다(息機)’의 행간은 더없이 쓸쓸하고 애잔합니다. 마지막 구절 “기심(機心)을 내려놓는 것이 약보다 낫네”에 주제가 함축돼 있지요.기심이란 무엇일까요?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마음, 책략을 꾸미는 마음을 말합니다.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싫으니 따지는 마음을 내려놓고 정신을 쉬게 해야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