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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 '느림'

    "50분마다 한 사람씩 프랑스의 도로 위에서 죽어요. 저 사람들 보세요. 주위에서 차를 굴리고 있는 저 미친 사람들. 저들은 거리에서 어떤 할머니가 털리는 걸 보면 지극히 몸사리는 바로 그들이에요. 한데 어째서 운전석에 앉으면 두려움을 모르게 되는 걸까요?" 1968년 소련의 침공 이후 사회주의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가 조국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느림'은 첫 장에서 현대인의 이중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한다. 현대인은 일상적인 위험을 경험하며,그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운전석에 앉는 순간 일상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잊게 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불안을 안겨줌과 동시에 불안을 극복(?)하는 힘도 선물하였다. 쿤데라의 말에 따른다면, 그것은 '기묘한 결합'이다.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현재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 그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나이,자신의 아내,자신의 아이들,자신의 근심거리 따윌 전혀 알지 못하며,따라서 그는 두려울 게 없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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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학년도 중앙대 수시1학기 언어논술 문제

    다음 문제는 2006학년도 수시1학기 중앙대학교 언어논술 시험에 출제된 것이다. 중앙대는 최근 한국 일본 중국 정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전개된 과거사 청산문제와 '교과서논쟁'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곱씹어 볼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이 문제에서 파생되는 여러 질문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테스트하고 수험생들을 자극하려는 의도에서 출제됐다고 설명했다. [문제 1] 제시문 (가)와 (다)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을 답안지 7줄(151~175자)로 재구성하여 요약하시오.단,가능한 한 본문에 등장하는 어휘 및 표현을 그대로 반복 사용하지 않도록 유의하시오. [문제 2] 제시문 (가)의 관점에서 제시문 (나)가 옹호하는 역사관의 단점과 한계에 대하여 답안지 7줄(151~175자)로 설명하시오. [문제 3] 제시문 (다)의 주장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나라 중국 일본 정부 및 지식인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과서 분쟁'에 대한 견해를 답안지 7줄(151~175자)로 밝히시오. (가)역사 담론이란 이해 당사자가 자신을 위해 직접 과거를 조직해내는 방식이다. 역사란 기본적으로 특정한 사람,계급,집단이 자신들을 위해 경쟁적으로 과거의 해석을 자서전적으로 구성해내는 전쟁터이며 힘의 마당인 것이다. 이 마당에서는 과거에 대한 각각의 견해들이 각양각색으로 통합되고 배제되고 중심화되고 주변화된다. 역사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는 것은 그것이 권력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재정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항상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다. 왜냐하면 지배자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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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스 젠킨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 Keith Jenkins, Re-thinking History, 1991 ) 케이스 젠킨스는 영국 잉글랜드 남동부의 웨스트 서섹스(West Sussex)에 있는 치체스터 대학교의 역사담당 조교수다. 그는 '포스트모던' 역사연구 분야에서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다른 역사학 이론서를 제쳐두고 듣도 보도 못했을지도 모를 이 책을 읽을 것을 제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고전(古典)'이라는 딱지가 기존의 권위와 관습에 근거해 붙여진 이름이라면,바로 그러한 고전을 비판의 눈으로 상대화해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을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할 것이다. 적어도 논술의 필수적 구성요소로서 '비판'의 기능을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 질문 바꾸기 "그래서 이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누구'로 대체하고,'위하여'를 뒤에 덧붙여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바꾸어야 제대로 된 물음이 될 것이다.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역사란 다른 집단에는 상이한 의미를 갖는 논쟁적 용어 혹은 담론이며,따라서 역사는 필연적으로 문제투성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책은 질문에 대한 문제제기다. 질문은 답변의 범위와 가능성의 경계를 이미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잘못된 질문에 올바른 답변을 이끌어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바로 이 점이 젠킨스가 역사학 입문자에게 '조금은 낯선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야 했던 이유'인 것이다. ◆ 객관성과 주관성 역사가의 임무가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데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를 위한 역사'를 쓰는 역사가는 애초부터 바람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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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엔탈리즘과 배타적 민족주의는 닮은꼴

    [가] 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이야기를 좀 더 나눠 보고 싶군요. 제국주의 시기에 서양인들은 자원 착취와 시장의 확보라는 두 가지 목적으로 해외에 진출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 문화 지리 사상 등과 관련된 해외 원주민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죠. 이런 식으로 제국주의 시기에 서양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동양에 관한 지식의 체계가 '오리엔탈 스터디' 곧 '동양학'입니다. 그들은 세계를 서양 동양으로 나누고 '서양=문명,동양=야만'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양을 폄하했습니다. 그들은 불상에 대한 경배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 숭배나 미신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서양 종교가 정말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서양의 종교도 기적의 염원과 마술이 팽배했던 전통시대 의례와 관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잖아요. 향을 피우고 물을 뿌리고 하는 것들도 원래는 주술적인 관습들이 종교적으로 의례화된 것 아니겠어요? 그런 것들이 고등 종교로 발전하면서 세련되고 멋있게 보이는 것이지요. 이런 행위만이 문명적인 것이고,동양의 종교에서 향 피우고 절하는 것은 미개하거나 야만적인 우상 숭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서양의 동양관을 내면화해서 스스로의 문화와 사상을 미신,비합리,비과학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면화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엔 힘의 논리,강자의 억압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 작용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건대 서구적인 근대화에 몰입하다 보니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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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스웨덴의 스톡홀름 근교에 가면 방대한 규모의 아름다운 궁전을 만나게 된다. 드로트닝홀름이라는 이름의 이 궁전은 18세기에 건축된 왕궁과 넓은 정원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궁전을 거닐다 보면 재미있는 별궁이 나오는데 그 양식이 중국풍이다. 이 이국적인 궁전은 왕비를 위한 왕의 특별한 선물이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적어도 당시의 유럽에서 중국풍이라는 것이 대단히 고급스럽고 값비싼 '트렌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상 속의 동양 근대 초기 유럽의 예술과 사치품을 지배한 동방 취미 풍조를 일컫는 말이 '오리엔탈리즘'이다. 본래 이 말은 동양에 대한 유럽 사회의 동경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양의 동경 대상이었던 중국은 '실재하는' 중국이었을까? 스웨덴의 이 중국풍 궁전을 가까이 다가가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중국 건물이지만 기와는 없고(단지 기와 흉내를 내기 위해 지붕에 굴곡을 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류(적어도 동양에는 없는)와 용(서양의 불 뿜는 용)이 동양을 상징하는 동물로 벽에 조각돼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실제 중국이 아닌 그야말로 상상 속의 중국이다. 전해 들은 풍문으로 그려낸 중국이 실제 중국과 같을 리 없겠지만,이 상상 속에서 동양의 상을 조각한다는 오리엔탈리즘의 근본 동기는 실제 동양을 보고 온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을 보자. "벵골인의 신체조직은 여성과 같다고 할 정도로 유약하다. …여러 시대 동안 그는 용감하고 대담한 남자들에게 짓밟혀왔다. 용기,독립,정직과 같은 특질들은 그의 체격과 상황에는 한결같이 적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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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 해제

    다음 제시문 (가) (나) (다)에는 죽음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태도가 각기 다르게 드러나 있다. 이들의 다른 점을 기술하고,이를 논거로 활용하여 인간이 죽음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논술하라. ---------------------- [가] - 플라톤 '파이돈'에서 "오오 나의 벗이여"라고 소크라테스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하면 이제 인생의 여로의 마지막에 이르러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감에 있어,일생 동안 추구해 온 것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품을 충분한 이유가 있네. 그러므로 나는 큰 기쁨을 가지고 내 갈 길을 가는 걸세. 나뿐만 아니라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고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쁜 마음으로 이 길을 갈 걸세." "아주 옳은 말씀이외다"라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정화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즉 영혼이 모든 방면에서 육체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을 수습하고 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도,될 수 있는 대로 자기만으로 사는 습관을 붙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시 말하면 육체의 쇠사슬로부터 영혼이 해탈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그렇습니다."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고 해방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요." "참 철학자들만이 오로지 영혼을 이와 같이 해방시키려 하는 거야.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와 해방이야말로 철학자들이 특별히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의 상태에 가깝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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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

    1. 플라톤의 철학적 방법 플라톤의 '대화편' 속 주인공인 소크라테스(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라 해야 할 것이다)는 아무리 하찮은 사람의 이야기도 그냥 흘려 듣는 법이 없다. 그 사람이 아무리 멍청하고 우스운 질문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대화를 이끌어 나간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무뢰배,도통 귀를 닫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에게도 좌절하지 않는다. 장소와 사람은 다르지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본질을,이데아를 찾아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가 성공적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자신의 무지를 토로하면서 끝나는 대화편도 있고 모호한 결론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진정한 철학이란 바로 이런 플라톤의 태도에 있는 것 아닐까? 변하지 않는 진리에 대한 탐구라는 거창한 언명보다 내 삶에서 느끼는 문제를 토로하고 그것을 함께 고민해 주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의미일 것이기 때문에. 오늘 소개되는 플라톤의 '파이돈' 대화편은 상기론 증명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바로 이 파이돈 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이돈에 나타난 상기론 증명은 이데아론의 밑바탕 위에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상기론 증명을 살피는 일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인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2.파이돈에서의 이데아 파이돈 편의 대화는 감방에 갇힌 소크라테스가 죽기로 되어 있는 날 아침부터 죽기 바로 직전까지 이뤄진다. 대화의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는 대담하고도 평온한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슬퍼하는 그의 추종자들을 위로한다. 소크라테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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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고려대 정시 논제

    다음 네 개의 제시문에 공통되는 주제를 말하고 제시문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시오. 그리고 그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2005년 고려대 정시 논제) 1. 우리가 가진 근본 욕구들 중에는 도덕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큰 조직에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를 불가피하게 억압받고,조직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강요받는다. 그 규칙은 인간에 의해 고안되었지만 인간 자체는 아니다. 아무리 세심하게 만들어졌어도 거기에는 '사람의 손길(human touch)'과 같은 유연성이 없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조직의 구성원은 도덕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행동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게 된다. "미안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제가 받은 지시 사항입니다." 이처럼 큰 조직들은 아주 불량하고 부도덕하게,또는 아주 어리석고 비인간적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이는 그 구성원들이 본래 그래서가 아니라 그들이 조직의 크기에서 오는 하중을 받기 때문이다. 큰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지만 이런 비판은 마치 자동차가 배기가스를 배출한다고 해서 운전자를 나무라는 것과 같다. 천사라도 공기를 더럽히지 않고 차를 운전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결국 잘못은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있다기 보다는 조직의 크기에 있는 것이다. 개인들로 하여금 도덕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가진 사회는 부도덕하다. 조직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런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거대주의에 의한 합리화'에 중독된 현대인들은 너무 커진 규모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