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유토피아는 어떻게 그려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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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속 제시문 100선] (91)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下)
나는 남의 돈을 좀 훔쳤다고 해서 목숨을 뺏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재산도 생명에 버금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형벌이 돈을 훔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법을 위배하고 정의를 침해한 것에 대한 것이라고 하면,"극단적 법은 극단적 불의"라는 법언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어떤 사소한 일로 법을 어긴다고 하여 죽음으로 처벌한다는 만리우스의 법을 용인해서는 안 되고,또한 모든 범죄는 동일하다고 보아 절도와 살인은 형평상 완벽하게 상이한데도 불구하고 양자 간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하는 스토아적인 계율에 근거한 법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

토머스 모어는 궁지에 내몰려 어쩔 수 없이 도적이 되는 사람들을 사형으로 다스리는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엄벌주의로 일관하는 영국의 가혹한 법제는 범죄 형평성과 처형의 효과 측면에서 부당하다는 것이다.

모어 스스로 법학을 공부하면서,그리고 법관 생활을 하면서 피부로 생생하게 느꼈을 사법제도의 모순을 논리적으로 지적한다.

범죄의 경중에 따른 책임의 비례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절도에 대한 처벌도 사형이고 살인에 대한 처벌도 사형이라면 절도에 그칠 자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정의롭지 못한 사회현실은 나 몰라라 도외시하면서 그러한 현실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을 범죄는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하게 처단하는 비정한 제도에 대해서 분개한다.

그리고 '극 중 라파엘'은 사법제도 비판에 연이어 사유재산의 폐지 및 공동 소유제도를 거침없이 주장한다.

이에 대해 소심한 '극 중 토머스 모어'는 그게 과연 가능이나 할 일이겠느냐며 부정하지만,'라파엘'은 자신이 실제로 관찰한 유토피아에서는 충분히 가능하였다면서 본격적인 유토피아 묘사가 시작되는 제2부의 이야기로 이끈다.

'유토피아' 제2부는 라파엘이 경험한 유토피아 사회가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묘사는 우선 유토피아의 크기와 지역 편제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 유토피아는 그 섬의 크기가 잉글랜드의 면적과 비슷하고,54개의 도시로 이뤄진 지방 조직은 당시 잉글랜드의 53개 주와 수도 런던을 합친 54개 지역과 숫자가 정확히 일치한다.

이처럼 유토피아와 영국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겹친다.

꿈은 현실의 쌍둥이기 때문이다.

꿈은 현실이고,현실은 곧 꿈이다.

그래서 상상이라는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서로의 모습은 닮을 수밖에 없다.

'유토피아'의 제1부가 거울의 이쪽을 살피는 것이었다면,제2부는 거울의 저쪽을 바라본다.

⊙ 원문 읽기

유토피아에서는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농사에 종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아동에 대한 교육의 일부입니다.

학교에서 농사의 원리를 배우고,도시 부근의 농장에 정기적으로 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농사를 견학할 뿐 아니라 연습 삼아 스스로 농사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종사해야 하는 농사 외에 각자 그 자신의 일을 배우게 됩니다.

모직이나 면직의 기술을 익히거나 또는 석공,철공,목수가 될 수 있습니다.

(중략) 유토피아에서는 하루 24시간 중 6시간만 일합니다.

즉 오전에 3시간 일한 뒤 점심식사를 하고 2시간 휴식을 취한 뒤 오후 3시간을 일하고 저녁 식사 전에 일을 마칩니다.

노동과 수면 및 식사 이외의 시간을 각자 좋을 대로 자유롭게 보냅니다만,이는 그 시간을 포식이나 태만으로 허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주로 지적 추구에 이용합니다.

따라서 매일 아침 일찍 공개강좌가 열리는 것이 신성한 풍습입니다.

(중략) 모든 도시는 똑같은 규모의 4개 구(區)로 구분되며,각 구에는 그 중심지에 시장이 있습니다.

각 가정의 생산품은 이 시장의 창고에 저장되며,물품의 종목에 따라 분배됩니다.

가정의 가장은 자신이나 가족에게 필요한 물품이 있을 때는 시장 안의 해당 상점으로 가서 그것을 청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그는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가져오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물품이 풍족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청구해서 가져갈 필요성은 없습니다.

어떤 물건이든 항상 풍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어느 누가 필요 이상의 물품을 쌓아 두겠습니까?

해석

유토피아는 건전한 노동에 기반한 공유제 사회이다.

구성원 모두가 어릴 때부터 노동을 생활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당연히 받아들인다.

사회 전원이 노동에 참여하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6시간의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의 사회 생산성은 매우 높다.

6시간의 노동시간으로 과연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제대로 생산할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는 '극 중 토머스'의 우려에 '극 중 라파엘'은 여타 사회는 무수한 사람들이 노동에 일절 참여하지 않아 근로자들이 그렇게 긴 시간을 짐승이나 노예처럼 비참하게 혹사당하고도 생산성이 낮은 것이라고 타박한다.

수많은 도둑과 거지들,지주들이 전혀 일을 하지 않기에 일부 구성원만 과로한다는 것이다.

사회 전원이 생산에 참여한다면 사회의 풍요는 짧은 시간의 노동으로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유토피아인들은 매매행위가 필요 없는 공유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화폐가 전혀 필요 없으며,귀금속을 보물로 여기지도 않는다.

희소가치라는 어리석은 생각만 제외한다면 금이나 은의 진가는 철의 진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은 분명한데 누가 그 본질상 쓸모가 없는 금을 좋아하겠느냐며 라파엘은 반문한다.

유토피아인들은 보석은 아이들의 완구로 활용할 뿐이다.

또한 라파엘은 토머스와의 대화에서 "유토피아 사람들이 더욱 더 황당해하고 혐오하는 것은 그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신세도 진 적 없는 부자에게 거의 신주 모시듯 굽실거리는 인간의 바보짓"이라며 배금주의 세태를 비판한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놀랍기 짝이 없는 유토피아의 결혼 풍습으로 옮겨간다.

⊙ 원문 읽기

여성은 18세가 되어야,그리고 남성은 22세가 되어야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성관계를 가지면 엄중하게 처벌되고,시장이 처벌선고를 취소하지 않는 한 결혼자격을 영원히 박탈당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발생한 가정의 부모들도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망신을 당합니다.

유토피아 사람들이 이에 대해 특별히 엄격한 이유는 결혼 이외의 성 관계를 철저히 막지 않는다면 평생 한 사람의 배우자와 함께 지내면서 결혼에 따르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이겨나가려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이상하게 보이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 사람들에게는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되는 절차입니다.

예비 신부는 처녀든 과부든 간에 존경할 만한 기혼 부인이 입회한 상태에서 장래의 신랑 앞에서 나체로 선을 보여야 하고,또한 신랑 후보도 품행이 바른 보호자의 입회 하에 장래의 신부에게 나체로 선을 보여야 합니다.

해석

사람들은 배우자의 도덕성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육체는 아름다운 결혼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유토피아 사람들의 솔직한 결혼관이다.

유토피아 사람들이 보기에,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말 한 마리를 살 때에는 사소한 차이에 온갖 주의를 기울이며 이미 벌거벗고 있는 말의 모든 곳을 꼼꼼히 뜯어보고 난 후에야 구입을 하면서 일생을 계속할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는 너무나 소홀하게 판단한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철저한 사전주의로 상대방의 '위장'에 속아 결혼하는 것을 방지해 후회 없는 일부일처제를 엄격하게 준수한다.

책이 쓰여진 시기가 500년 전의 엄숙한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놀랍고 과감한 발상이다.

유토피아 사람들의 솔직한 면모는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다.

유토피아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은 전적으로 쾌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쾌락을 진정한 자연적 쾌락과 사이비 쾌락으로 나누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이비 쾌락은 혐오하고 지양한다.

쾌락은 자연이 선사한 것인데,그것을 거부하고 어리석게도 자신을 학대하는 것은 자연의 은총에 대한 배은망덕한 태도라는 것이다.

당대 유럽의 관점에서는 충격적인 라파엘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극 중 토머스 모어'는 라파엘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지만 유토피아의 생활상은 아무래도 이상하고 맹랑하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쏟아질 세간의 비난이 두려워 미리 방어막을 쳐두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을 다시 이어, 유토피아에서 무엇인가 배울 점도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자신의 본심을 그리 속이지만도 않는다.

라파엘이라는 방패 뒤로 쌩긋 웃는 토머스 모어의 미소가 책의 마지막 장에 살짝 팔락거린다.

그가 21세기에 유토피아를 집필하였다면 과연 어떤 사회를 그려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