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모든 존재물은 운동이며 흐름이고 지속이다
1907년에 출판된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의 <창조적 진화>는 방대한 규모의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구축한 대작으로 베르그송 철학의 집대성이라 불린다.
베르그송은 이 책에서 현실과 괴리된 순전한 사변적 기초 위에서 이론을 전개하려 한 것이 아니라,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충실하면서도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철학적,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며,내용 자체도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담고 있어 사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독해해내기에 그리 쉬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으며,특히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철학 교과에서 필수로 다루어질 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시험에서도 거의 빠지지 않는 필독 독서로 등장하고 있다.
프랑스 학생들이 읽는다면 우리 학생들이라고 못 읽을 이유는 없다.
우리 학생들이 이 책에서 얻어야 할 것은 전문가 수준의 이해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세계를 바라보는 베르그송의 참신한,아니 혁명적 시각과 그 시각을 우주에 대한 통찰까지 확대하는 베르그송 사유의 방대한 스케일을 경험하면 족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글도 베르그송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왜 참신하고 혁명적이었는지를 소개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제논의 역설 중에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이 있다.
이 역설은 거북이가 먼저 출발한 상황에서 아킬레스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이러한 역설이 왜 생긴 것일까?
베르그송은 우리의 운동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역설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운동 자체를 보지 않고,운동을 대신하여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린 그 운동의 궤적을 운동 자체와 혼동하여,그 궤적이 사유 속에서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는 것처럼 실제 운동 자체도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설이 생긴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참신하고 혁명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들은 존재하는 것들은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고,또 어떠한 무한소들이 뭉쳐서 존재물들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그런 생각 대신에 존재물들은 일종의 흐름이며,운동이며,지속(duree)으로 생각하라고,더 나아가 이런 생각을 우주의 모든 존재물에까지 확대시켜 적용해 보라고 요구한다.
참신하다는 것은 그것이 이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사유 방식이라는 것이며,혁명적이라는 것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사유의 전환(revolution)을 보인 코페르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급격한 전환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는 결국 이런 '지속'이라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인간과 전 우주에 확대 적용하는 시도를 선보인 책이며,동시에 이런 시도를 통해 새로운 사유 방식이 타당함을 입증한 책이기도 한 것이다.
'진화'라는 것이 '지속'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특성을 지적한 말이라면,'창조적'이라는 것은 이런 연속적 변화 속에 '질적 비약'이 존재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 원문읽기
요컨대 수학자가 조작하는 세계는 매순간 죽고 다시 태어나는 세계,즉 데카르트가 연속적 창조에 관해 말했을 때 생각한 세계이다.
그러나 그렇게 상정된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를,즉 생명의 고유한 특성을 생각할 것인가?
진화,그것은 과거가 현재 속에 실제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것,지속이 그 연결 부호임을 함축한다.
다시 말하면 생명체,즉 자연적 체계의 인식은 지속의 간격 자체를 근거로 하는 인식이며,반면에 인공적 체계,즉 수학적 체계의 인식은 극단에만 관계한다.
변화의 연속,과거의 현재 안의 보존,진정한 지속,생명체는 이 속성들을 의식과 더불어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생명이 의식적 활동과 같은 발명이자 부단한 창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해설
데카르트는 과거의 순간과 지금의 순간 그리고 미래의 순간들이 하나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신에 의한 매순간의 창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세계가 불연속적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순간이 모여 시간을 구성한다는 생각은 암암리에 현대인의 사유방식에까지도 침투해 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이런 단절 대신에 연속과 지속으로 생명의 고유한 특성인 진화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길이와 폭을 가지고 있지 않은 '순간'이라는 관념을 간격 자체를 가지고 있는 '지속'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지속적 특징이 확연히 들어나는 곳이 의식과 기억이기에 베르그송은 전작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과 물질과 기억에서 의식과 기억의 문제에 집중했고,여기 <창조적 진화>에서는 이런 지속 개념을 생명 활동에 적용시키고 있다.
⊙ 원문읽기
우주는 지속한다.
우리가 시간의 본성을 심화시켜 볼수록 더욱 더 우리는 지속이 발명과 형태의 창조,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연속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의미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과학에 의해 한정된 계들은 단지 우주의 나머지에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이다.
물론 우주 그 자체 안에서도,'하강'운동과 '상승'운동이라는 두 대립된 운동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이미 준비된 두루마리를 펼치는 데 불과하다.
그것은 이완되는 용수철처럼 원칙적으로 거의 순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자는 성숙과 창조의 내적 작업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지속하며,자신과 분리되지 않는 전자에게 자신의 리듬을 부과한다.
▶ 해설
현대인은 열역학 제2법칙,즉 닫힌 계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신봉한다.
이런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생명 현상이라는 것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역행하는,아주 우연적이면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야말로 엔트로피의 법칙에 순응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시각을 달리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대변하는 '하강 운동'과 지속을 대변하는 '상승 운동'을 구분하고 있지만,이것들은 사실 분리되지 않는 지속의 흐름이며 단지 방향이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상승운동으로 표현된 생명의 지속이 이완될 경우 그 역방향으로 가는 운동이 물질의 운동일 뿐이다.
현대는 자연과학의 잣대로 생명현상에 접근하지만,베르그송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주의 본질적 모습은 생명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자연현상 역시 결국에는 이런 우주의 본질적 특징인 지속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원문읽기
기계론적 설명은 우리의 사유가 전체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시키는 체계들에 대해 유효하다.
그러나 전체 그 자체와 이 전체 속에서 그것의 이미지를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체계들을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시간은 무용하게 될 것이고,심지어 실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적 설명의 본질은 사실상 미래와 과거를 현재의 함수로 계산할 수 있다고 간주하고,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가설에서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초인간적 지성이 있다면,그는 단번에 과거,현재,미래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중략) 극단적 기계론은 실재 전체가 영원 속에서 통째로 주어지는 형이상학을 함축하며,거기서 사물의 명백한 지속은 단지 모든 것을 한 번에 알 수 없는 정신의 불구성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 속에서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에서,즉 의식에서 지속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지속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흐름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근본이며,우리가 잘 느끼고 있듯이 우리가 소통하는 사물의 핵심 자체이다.
보편학의 관점을 우리에게 강조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체계의 요구들에 경험을 희생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극단적 기계론을 배격한다.
▶ 해설
<창조적 진화>가 등장한 20세기 초는 이미 자연과학의 기계론적 설명 체계가 여러모로 공격받기 시작한 시기이다.
베르그송 역시 기계론의 공격에 가담하고 있는데,그 공격의 초점은 기계론이 잘못된 형이상학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 맞춰져 있다.
영원 속에서 과거,현재,미래가 통째로 주어진다는 것은 결국 기계론의 결정론적 시각을 말하는데,베르그송이 내세우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흐름인 지속은 결국 이런 결정론적 시각을 부정하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로 대변되는 지속은 '질적 비약'을 수반하는 연속적 변화이기 때문에 우리 존재들은 근원적으로는 예측불가능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베르그송이 자신의 주장의 경험적 근거를 의식에 두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란다.
베르그송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경험의 대상일 수 있는 의식,기억,그리고 생명 현상에서 우주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지속 개념을 찾아내고,그 지속 개념으로 우주 전체의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의 자그마한 전환이 어쩌면 '우리 세상'의 거대한 전환을 가져오는지도 모르겠다.
김훈회 S 논술 선임연원 toatopia@nonsul.com
1907년에 출판된 앙리 베르그송(1859~1941)의 <창조적 진화>는 방대한 규모의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구축한 대작으로 베르그송 철학의 집대성이라 불린다.
베르그송은 이 책에서 현실과 괴리된 순전한 사변적 기초 위에서 이론을 전개하려 한 것이 아니라,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등 당대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충실하면서도 과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철학적,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며,내용 자체도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담고 있어 사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독해해내기에 그리 쉬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으며,특히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철학 교과에서 필수로 다루어질 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시험에서도 거의 빠지지 않는 필독 독서로 등장하고 있다.
프랑스 학생들이 읽는다면 우리 학생들이라고 못 읽을 이유는 없다.
우리 학생들이 이 책에서 얻어야 할 것은 전문가 수준의 이해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세계를 바라보는 베르그송의 참신한,아니 혁명적 시각과 그 시각을 우주에 대한 통찰까지 확대하는 베르그송 사유의 방대한 스케일을 경험하면 족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글도 베르그송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왜 참신하고 혁명적이었는지를 소개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제논의 역설 중에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이 있다.
이 역설은 거북이가 먼저 출발한 상황에서 아킬레스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이러한 역설이 왜 생긴 것일까?
베르그송은 우리의 운동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런 역설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운동 자체를 보지 않고,운동을 대신하여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린 그 운동의 궤적을 운동 자체와 혼동하여,그 궤적이 사유 속에서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는 것처럼 실제 운동 자체도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설이 생긴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여기에서 우리에게 참신하고 혁명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들은 존재하는 것들은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고,또 어떠한 무한소들이 뭉쳐서 존재물들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그런 생각 대신에 존재물들은 일종의 흐름이며,운동이며,지속(duree)으로 생각하라고,더 나아가 이런 생각을 우주의 모든 존재물에까지 확대시켜 적용해 보라고 요구한다.
참신하다는 것은 그것이 이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사유 방식이라는 것이며,혁명적이라는 것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사유의 전환(revolution)을 보인 코페르니쿠스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급격한 전환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는 결국 이런 '지속'이라는 새로운 사유 방식을 인간과 전 우주에 확대 적용하는 시도를 선보인 책이며,동시에 이런 시도를 통해 새로운 사유 방식이 타당함을 입증한 책이기도 한 것이다.
'진화'라는 것이 '지속'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특성을 지적한 말이라면,'창조적'이라는 것은 이런 연속적 변화 속에 '질적 비약'이 존재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 원문읽기
요컨대 수학자가 조작하는 세계는 매순간 죽고 다시 태어나는 세계,즉 데카르트가 연속적 창조에 관해 말했을 때 생각한 세계이다.
그러나 그렇게 상정된 시간 속에서 어떻게 진화를,즉 생명의 고유한 특성을 생각할 것인가?
진화,그것은 과거가 현재 속에 실제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것,지속이 그 연결 부호임을 함축한다.
다시 말하면 생명체,즉 자연적 체계의 인식은 지속의 간격 자체를 근거로 하는 인식이며,반면에 인공적 체계,즉 수학적 체계의 인식은 극단에만 관계한다.
변화의 연속,과거의 현재 안의 보존,진정한 지속,생명체는 이 속성들을 의식과 더불어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생명이 의식적 활동과 같은 발명이자 부단한 창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해설
데카르트는 과거의 순간과 지금의 순간 그리고 미래의 순간들이 하나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신에 의한 매순간의 창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세계가 불연속적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순간이 모여 시간을 구성한다는 생각은 암암리에 현대인의 사유방식에까지도 침투해 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이런 단절 대신에 연속과 지속으로 생명의 고유한 특성인 진화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길이와 폭을 가지고 있지 않은 '순간'이라는 관념을 간격 자체를 가지고 있는 '지속'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지속적 특징이 확연히 들어나는 곳이 의식과 기억이기에 베르그송은 전작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과 물질과 기억에서 의식과 기억의 문제에 집중했고,여기 <창조적 진화>에서는 이런 지속 개념을 생명 활동에 적용시키고 있다.
⊙ 원문읽기
우주는 지속한다.
우리가 시간의 본성을 심화시켜 볼수록 더욱 더 우리는 지속이 발명과 형태의 창조,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연속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의미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과학에 의해 한정된 계들은 단지 우주의 나머지에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이다.
물론 우주 그 자체 안에서도,'하강'운동과 '상승'운동이라는 두 대립된 운동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이미 준비된 두루마리를 펼치는 데 불과하다.
그것은 이완되는 용수철처럼 원칙적으로 거의 순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자는 성숙과 창조의 내적 작업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지속하며,자신과 분리되지 않는 전자에게 자신의 리듬을 부과한다.
▶ 해설
현대인은 열역학 제2법칙,즉 닫힌 계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신봉한다.
이런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생명 현상이라는 것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역행하는,아주 우연적이면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야말로 엔트로피의 법칙에 순응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시각을 달리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대변하는 '하강 운동'과 지속을 대변하는 '상승 운동'을 구분하고 있지만,이것들은 사실 분리되지 않는 지속의 흐름이며 단지 방향이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상승운동으로 표현된 생명의 지속이 이완될 경우 그 역방향으로 가는 운동이 물질의 운동일 뿐이다.
현대는 자연과학의 잣대로 생명현상에 접근하지만,베르그송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주의 본질적 모습은 생명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자연현상 역시 결국에는 이런 우주의 본질적 특징인 지속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원문읽기
기계론적 설명은 우리의 사유가 전체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시키는 체계들에 대해 유효하다.
그러나 전체 그 자체와 이 전체 속에서 그것의 이미지를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체계들을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시간은 무용하게 될 것이고,심지어 실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적 설명의 본질은 사실상 미래와 과거를 현재의 함수로 계산할 수 있다고 간주하고,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가설에서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초인간적 지성이 있다면,그는 단번에 과거,현재,미래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중략) 극단적 기계론은 실재 전체가 영원 속에서 통째로 주어지는 형이상학을 함축하며,거기서 사물의 명백한 지속은 단지 모든 것을 한 번에 알 수 없는 정신의 불구성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 속에서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에서,즉 의식에서 지속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지속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흐름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근본이며,우리가 잘 느끼고 있듯이 우리가 소통하는 사물의 핵심 자체이다.
보편학의 관점을 우리에게 강조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체계의 요구들에 경험을 희생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극단적 기계론을 배격한다.
▶ 해설
<창조적 진화>가 등장한 20세기 초는 이미 자연과학의 기계론적 설명 체계가 여러모로 공격받기 시작한 시기이다.
베르그송 역시 기계론의 공격에 가담하고 있는데,그 공격의 초점은 기계론이 잘못된 형이상학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 맞춰져 있다.
영원 속에서 과거,현재,미래가 통째로 주어진다는 것은 결국 기계론의 결정론적 시각을 말하는데,베르그송이 내세우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흐름인 지속은 결국 이런 결정론적 시각을 부정하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로 대변되는 지속은 '질적 비약'을 수반하는 연속적 변화이기 때문에 우리 존재들은 근원적으로는 예측불가능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베르그송이 자신의 주장의 경험적 근거를 의식에 두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기 바란다.
베르그송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경험의 대상일 수 있는 의식,기억,그리고 생명 현상에서 우주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지속 개념을 찾아내고,그 지속 개념으로 우주 전체의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의 자그마한 전환이 어쩌면 '우리 세상'의 거대한 전환을 가져오는지도 모르겠다.
김훈회 S 논술 선임연원 toatopia@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