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받는 현대인, 상상속의 디스토피아만은 아니다?

[고전속 제시문 100선] (93) 조지 오웰 <1984년> (下)
《1984년》에서 '존재'라는 말의 의미는 극히 기만적이다.

당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날조된다.

당이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공표하면 비록 진실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실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숨 막힐 것 같은 현실에 윈스턴은 반발한다.

그는 자신의 언어를 토하며 일기를 써내려 가고,막연하기만 하던 그의 불만과 의문을 점차 구체적으로 다듬는다.

또한 감시의 눈을 피해 쾌활한 줄리아와 연애하면서 사랑을 금지하는 체제를 비웃고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생각을 나눈다.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당당히 쓴다.

"자유란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것이 용납된다면,그 밖의 다른 모든 것도 이에 뒤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잠시,밀월을 즐기던 현장에서 윈스턴은 줄리아와 함께 체포당해 애정성(愛情省)으로 끌려가 고문과 세뇌를 받는다.

놀랍게도 세뇌 담당자는 윈스턴이 한때 반체제주의자라고 믿어 마음을 터놓았던 오브리엔이다.

애정성이라는 역설적인 명칭의 감옥 안에서 윈스턴과 오브리엔은 실재와 가공,권력과 인간에 대해 논쟁을 벌이지만 고문을 앞세운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 대립의 한 축이던 윈스턴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만다.

⊙ 원문 읽기

"자넨 겸손하지도 않고 자기 훈련을 하지도 못해 이 꼴이 되었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복종도 하지 못했어.

정신 이상이 되어 단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소수파가 되려고 했지.

오직 훈련된 사람만이 실재를 볼 수 있는 거라네 윈스턴.

실재(實在)란 객관적이고 외적이며 그 나름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자네는 믿고 있어.

실재의 본질은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자네가 잘못 알고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다른 사람들도 자네와 똑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윈스턴,말해 두겠네만 실재는 외적인 것이 아니야.

실재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니야.

그것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네.실재는 어떤 경우에든 곧 소멸해 버릴 개인의 마음 속이 아니라 오직 집단적이고 불멸인 당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네.

당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진실이지.

당의 눈을 통해 보지 않고는 실재를 볼 수 없어.

윈스턴,이것이 바로 자네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이네.

여기에는 자기파괴 행위와 의지의 노력이 필요해.

자네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려면 우선 겸손해야 해."

해석

오세아니아에서는 경험의 타당성뿐 아니라 외적 실재(實在)의 존재 자체도 교묘히 부정된다.

과거와 외적 세계는 모두 마음 속에서만 존재하고,권력은 그 마음 자체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이 그때그때 원하는 바에 따라 진리는 만들어지고 변형된다.

물론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는 개인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에게 충성하기 위해서는 오브리엔이 표현한 대로 '자기파괴 행위'가 필요하다.

개인의 인식과 사고는 불필요하며,이성은 극복의 대상일 따름이다.

오로지 당의 의지만이 중요하고 오직 당의 의사만이 존재한다.

당이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할 때,거기에 감히 반기를 들고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하면 이단으로 몰려 처형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국은 이단자를 그저 처형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 어떠한 탈선도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당국은 이단자의 속마음까지 철저히 장악하기를 원한다.

잘못된 생각이 무력하고 비록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용인할 수 없으므로 이단자가 반항하는 한은 처형하지 않는다.

이단자의 두뇌를 완전히 개조해 새 사람으로 만든 다음에야 죽인다.

지워야 할 흠집,씻어 버려야 할 오점이던 윈스턴은 고문과 세뇌 끝에 둘 더하기 둘은 셋이 될 수도 있고 다섯이 될 수도 있다고 외치며 '새 사람'으로 탄생한다.

자기 의지를 버리고 전향한 윈스턴에게 오브리엔은 점점 더 당의 철학을 주입한다.

⊙ 원문 읽기

오브리엔은 말을 멈추고 재주 있는 학생에게 질문을 하는 선생의 표정을 다시 지었다.

"어떻게 하면 타인에 대하여 권력을 주장할 수 있겠나."

윈스턴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대답했다.

"타인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바로 그거야. 그들을 괴롭힘으로써야. 복종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그들이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자네의 뜻에 따르고 있는지 어떤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권력이란 고통과 모욕을 주는 데 있는 거지.

권력이란 인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은 다음, 그것을 다시 한데 모아 자네가 선택한 모습으로 만드는 데 있는 거야.

그러면 자네는 우리가 창조하려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이제는 알겠나?

그것은 과거의 개혁자들이 상상하던,바보 같은 쾌락주의적 유토피아와는 정반대지.

공포와 반역과 고문의 세계야.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이며,다듬을수록 더욱 더 무자비해지는 세계일세.

우리 세계에서의 진보란 고통을 향한 진보일세.

예전의 문명은 사랑과 정의를 기반으로 해서 세워졌다고 주장하지만,우리의 문명은 증오를 기반으로 해서 세워졌어.

우리의 세계에선 공포,분노,승리,자기비하 외에는 어떠한 정서도 없을 것일세.

그 밖의 모든 것을 우리는 파괴할 걸세. 모든 것을.

이미 우리는 혁명 이전까지 존재했던 사고방식을 폐기하고 있어.

우리는 이미 자식과 어버이,동료,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어져 있는 선을 절단했지.

그 누구라도 아내나 자식이나 친구를 이제는 감히 믿지 않아.

(중략) 당에 대한 충성심을 빼놓고는 어떠한 충성심도 없게 돼.

그리고 위대한 동지,큰 형에 대한 사랑을 빼놓고는 어떠한 사랑도 없게 돼.

웃음조차도 패배한 적들에 대한 승리감의 웃음만이 있을 뿐이지.

따라서 예술도,문학도,과학도 없을 거야.

우리는 전능하므로 과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미와 추에는 차이가 없고,호기심도 생에 대한 즐거움도 없네.

이와 맞먹는 모든 쾌락도 파괴될 걸세.

그러나 윈스턴,이걸 잊지 말게.

그곳에는 언제나 끊임없이 증가하고 끊임없이 미묘해지는 권력에의 도취감이 있을 것이네.

언제나,어떤 순간이나 승리감이 주는 전율,무력한 적을 짓밟는 감각이 있을 걸세.

해석

'짓밟힌' 윈스턴은 당의 철학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고문과 세뇌로 그의 생각을 포기했을지언정,당국을 증오함으로써 마지막 자유를 지키고자 한다.

증오감을 품고 죽음으로써 윈스턴의 이단적인 사상은 영원히 당국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며 당국의 완전무결성에는 오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포낭 안에 단단히 감싸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려 한 증오마저 윈스턴은 고스란히 내던져 버리고 만다.

감옥에서의 어느 날 연인 줄리아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잠에서 깨어난 그는 지적인 면에서는 새 인간이 되었으나,감정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불결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고문을 받는다.

줄리아에 대한 마음만은 절대 내놓을 수 없다던 윈스턴은 그가 본능적 공포심을 가지는 쥐떼들이 얼굴을 파먹을 것이라고 위협받자 마지막 저항조차 포기한다.

고문 위협 앞에서 윈스턴은 줄리아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자기 대신 제발 줄리아를 고문하라고 절규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모든 의지를 완벽히 잃어버린다.

더 이상 사랑도 증오심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1984년》은 다음과 같은 암담한 구절로 끝을 맺고 있다.

⊙ 원문 읽기

그는 애정성에 들어가 모든 것을 용서받고 자기 영혼을 눈처럼 깨끗이 하였다.

피고석에 앉아 모든 것을 자백하고 모든 사람을 연루시켰다.

그는 햇빛 속을 걷는 기분으로 하얀 타일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무장한 간수가 나타난다.

오랫동안 소망해오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힌다.

그는 '위대한 동지'의 커다란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 검은 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는 데 그는 40년이 걸렸다.

오,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오,저 사랑이 가득 찬 품 속을 떠나 고집부리며 스스로 취해온 방랑의 족적이여!

술 냄새 나는 두 줄기 눈물이 코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은 좋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에 대한 승리를 얻었다.

'위대한 동지,큰 형(Big Brother)'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해석

책장을 덮고 나면 현실의 1984년이 조지 오웰이 묘사한 '1984년'이 아니었음에 안도한다.

그러나 《1984년》은 어느 특정 연도가 아니라 그가 소설을 완성한 1948년의 끝 숫자 둘을 뒤집어서 표현한 추상적인 미래이다.

그래서 우울하게도 《1984년》은 언제 어디서라도 가능한 미래를 상징한다.

조지 오웰이 병상에서 소설을 탈고한 때로부터 그간 우리 사회의 감시체계가 얼마나 고도로 발달해 왔는지를 떠올리면 디스토피아의 가능성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홍보람 s.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