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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주인을 자유로이 선출한다는 것은 주인이나 노예를 폐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속에서 자유 선택은 이들 상품과 서비스가 고통과 공포의 생활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지속시키는 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이론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일원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마르크스에 대한 재해석과 하이데거,프로이트의 영향을 바탕으로 '고상해진 노예들'의 사유 체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고 있는데,그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일차원적 인간'이다. '일차원적 인간'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과 자유가 진정한 행복과 자유인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일상은 선택의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어떤 옷을 입을까부터 시작해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어느 회사의 자동차를 구매할 것인지,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등 작은 일상에서부터 인간의 삶 전체는 선택의 연속이다. 물론 우리는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다. 즉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나의 선택에 대한 독립성을 보장받고,그러한 자유로운 선택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마르쿠제는 이러한 우리의 선택에 대해 진정 자유로운 선택이었는가,진정 주체적인 선택이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선진 산업사회의 현저한 특징은 해방을 추구하는 욕구를 효과적으로 질식시키면서 동시에 풍요한 사회의 파괴적인 힘과 억압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허용한다는 점에 있다. 이 사회에는 낭비물의 생산과 소비를 요구하는 압도적으로 강한 욕구,노동이 더 이상 실제로는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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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대학교 2006학년도 정시 논술 문제를 풀어 보자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라 [가] 인간이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다. 즉 거기에는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들이 포함돼 있다. 자기란 단순한 관계가 아니고,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바를 의미한다. 인간은 유한성과 무한성, 시간성과 영원성,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이란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인간은 아직 아무런 자기가 아니다. 양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관계 그 자체는 '부정적 통일'로서의 제삼자이다. 그들 양자는 관계에 대해 관계하는 것이며,그것도 관계 속에서 관계에 대해 관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이 영혼이라고 할 경우,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그와 같은 관계이다. 이에 반해 관계가 그 자신에 대해 관계한다면,이 관계야말로 적극적인 제삼자인 것이며,그리고 이것이 자기인 것이다. (註:여기서 부정적 통일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으로서의 종합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그와 같은 관계는 자기를 스스로 정립한 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정립된 것이거나 이 둘 중 하나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가 다른 사람에 의해 정립될 경우,물론 그 관계는 제삼자인 셈이지만 그러나 그 관계,즉 제삼자는 다시 또 모든 관계를 정립한 것과 관계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도출되어 정립된 관계가 바로 인간인 자기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이요,동시에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처럼 그렇게 타자와 관계하는 관계이다. (키에르케고르,'죽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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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틴 부버 '나와 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니'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상대한테 투자한 만큼(그것이 물질이든 감정이든 관계없다) 상대는 그 결과물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실망,혹은 배신이라는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상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한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의 대부분은 존재 자체가 아닌 좀더 유용한 거래를 위한 수단이다. 좀더 훌륭한 몸매를 위한 다이어트가 성행하고,좀더 매력적인 얼굴을 만들기 위한 성형 열풍이 불고,좀더 좋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학벌주의가 만연해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관계 맺기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모든 관계의 거래를 전제로 한다. 만드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고,고용하는 사람과 고용되는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인간과 신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시디즘에 기반을 둔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는 관계 맺기에 대한 실존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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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대학교 2000학년도 정시 논술 문제를 보자

    근대 이래 과학기술의 발달은 삶의 방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아래 제시문들은 그 중 하나를 공통된 주제로 삼고 있다. 제시문들의 내용을 유기적으로 파악하고 그 논지를 정리하고, 이러한 변화가 앞으로 인간의 삶에 어떤 문제를 초래할 것인지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1,600자) (1)하이네는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꾸어 놓은 숙명적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우리의 직관 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다.(중략) 이제 사람들은 세 시간 반 내에 오를레앙까지,그리고 같은 시간 내에 루앙까지 여행한다. 이 노선들이 벨기에와 독일까지 연결되고 또 그곳의 철도들과 연결된다면 어떤 일이 초래될 것인가! 내게는 모든 나라에 있는 산과 숲이 파리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미 독일 보리수의 향내를 맡고 있다. 내 눈 앞에는 북해의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일한 하나의 변화가 지니는 두 가지 모순적인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철도는 한편으로 이제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을 열어 놓았지만,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이의 공간을 없앴다는 점이다. 슈테른베르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럽의 창을 통해 보이는 전망은 그것이 지닌 심층적인 차원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것은 빙 둘러 서 있으며,어디나 채색된 평면뿐인 하나의 동일한 파노라마 세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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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 '느림'

    "50분마다 한 사람씩 프랑스의 도로 위에서 죽어요. 저 사람들 보세요. 주위에서 차를 굴리고 있는 저 미친 사람들. 저들은 거리에서 어떤 할머니가 털리는 걸 보면 지극히 몸사리는 바로 그들이에요. 한데 어째서 운전석에 앉으면 두려움을 모르게 되는 걸까요?" 1968년 소련의 침공 이후 사회주의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가 조국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느림'은 첫 장에서 현대인의 이중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한다. 현대인은 일상적인 위험을 경험하며,그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운전석에 앉는 순간 일상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잊게 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불안을 안겨줌과 동시에 불안을 극복(?)하는 힘도 선물하였다. 쿤데라의 말에 따른다면, 그것은 '기묘한 결합'이다.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현재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 그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나이,자신의 아내,자신의 아이들,자신의 근심거리 따윌 전혀 알지 못하며,따라서 그는 두려울 게 없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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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학년도 중앙대 수시1학기 언어논술 문제

    다음 문제는 2006학년도 수시1학기 중앙대학교 언어논술 시험에 출제된 것이다. 중앙대는 최근 한국 일본 중국 정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전개된 과거사 청산문제와 '교과서논쟁'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곱씹어 볼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이 문제에서 파생되는 여러 질문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테스트하고 수험생들을 자극하려는 의도에서 출제됐다고 설명했다. [문제 1] 제시문 (가)와 (다)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을 답안지 7줄(151~175자)로 재구성하여 요약하시오.단,가능한 한 본문에 등장하는 어휘 및 표현을 그대로 반복 사용하지 않도록 유의하시오. [문제 2] 제시문 (가)의 관점에서 제시문 (나)가 옹호하는 역사관의 단점과 한계에 대하여 답안지 7줄(151~175자)로 설명하시오. [문제 3] 제시문 (다)의 주장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나라 중국 일본 정부 및 지식인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과서 분쟁'에 대한 견해를 답안지 7줄(151~175자)로 밝히시오. (가)역사 담론이란 이해 당사자가 자신을 위해 직접 과거를 조직해내는 방식이다. 역사란 기본적으로 특정한 사람,계급,집단이 자신들을 위해 경쟁적으로 과거의 해석을 자서전적으로 구성해내는 전쟁터이며 힘의 마당인 것이다. 이 마당에서는 과거에 대한 각각의 견해들이 각양각색으로 통합되고 배제되고 중심화되고 주변화된다. 역사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는 것은 그것이 권력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재정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항상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다. 왜냐하면 지배자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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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스 젠킨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 Keith Jenkins, Re-thinking History, 1991 ) 케이스 젠킨스는 영국 잉글랜드 남동부의 웨스트 서섹스(West Sussex)에 있는 치체스터 대학교의 역사담당 조교수다. 그는 '포스트모던' 역사연구 분야에서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다른 역사학 이론서를 제쳐두고 듣도 보도 못했을지도 모를 이 책을 읽을 것을 제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고전(古典)'이라는 딱지가 기존의 권위와 관습에 근거해 붙여진 이름이라면,바로 그러한 고전을 비판의 눈으로 상대화해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을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할 것이다. 적어도 논술의 필수적 구성요소로서 '비판'의 기능을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 질문 바꾸기 "그래서 이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누구'로 대체하고,'위하여'를 뒤에 덧붙여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바꾸어야 제대로 된 물음이 될 것이다.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역사란 다른 집단에는 상이한 의미를 갖는 논쟁적 용어 혹은 담론이며,따라서 역사는 필연적으로 문제투성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책은 질문에 대한 문제제기다. 질문은 답변의 범위와 가능성의 경계를 이미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잘못된 질문에 올바른 답변을 이끌어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바로 이 점이 젠킨스가 역사학 입문자에게 '조금은 낯선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야 했던 이유'인 것이다. ◆ 객관성과 주관성 역사가의 임무가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데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를 위한 역사'를 쓰는 역사가는 애초부터 바람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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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엔탈리즘과 배타적 민족주의는 닮은꼴

    [가] 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이야기를 좀 더 나눠 보고 싶군요. 제국주의 시기에 서양인들은 자원 착취와 시장의 확보라는 두 가지 목적으로 해외에 진출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 문화 지리 사상 등과 관련된 해외 원주민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죠. 이런 식으로 제국주의 시기에 서양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동양에 관한 지식의 체계가 '오리엔탈 스터디' 곧 '동양학'입니다. 그들은 세계를 서양 동양으로 나누고 '서양=문명,동양=야만'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양을 폄하했습니다. 그들은 불상에 대한 경배나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 숭배나 미신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서양 종교가 정말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서양의 종교도 기적의 염원과 마술이 팽배했던 전통시대 의례와 관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잖아요. 향을 피우고 물을 뿌리고 하는 것들도 원래는 주술적인 관습들이 종교적으로 의례화된 것 아니겠어요? 그런 것들이 고등 종교로 발전하면서 세련되고 멋있게 보이는 것이지요. 이런 행위만이 문명적인 것이고,동양의 종교에서 향 피우고 절하는 것은 미개하거나 야만적인 우상 숭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렇게 만들어진 서양의 동양관을 내면화해서 스스로의 문화와 사상을 미신,비합리,비과학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면화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기엔 힘의 논리,강자의 억압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 작용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건대 서구적인 근대화에 몰입하다 보니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