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퍼는 '이성(reason)'에 대한 과신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때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합리적 추론 능력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된 이성',다시 말해 하나의 관념체계를 말한다.

추론된 세계관을 하나의 고정불변하는 절대가치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포퍼는 그런 세계관의 하나로 역사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주의를 예로 들었다.

포퍼가 서구 지성사에서 만악의 근원으로 꼽고 있는 사상의 원조는 전편에서 보았듯이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현실의 세계는 진리의 모사일 뿐이며 진실한 세계는 조잡한 현실의 너머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라고 말했다.

이 '이데아'가 이상국가론이 되고,여기에 역사 개념이 들어가면서 헤겔의 변증법이 되고,변증법의 종착역이 마르크스의 공산사회가 되는데 바로 이것이 닫힌 세계라는 것이 포퍼의 고발이다.

역사에 종착역이 있다고 보는 이런 관점은 굳이 포퍼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매우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역사는 무언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혹은 정해진 노정에 따라 진행되며 인간은 그 역사의 무대에서 무언가 엄중한 사명을 받아 수행하는 존재라는 생각은 너무도 광범위한 것도 현실이다.

포퍼는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민족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원문 읽기

헤겔은 프러시아의 전체주의적 민족주의의 편을 들었다. 민족주의는 본래 종족적 본능과 정념과 편견에 호소하며 개인적 책임을 집단적 책임으로 대치함으로써 그 책임이 안겨 주는 긴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우리의 욕망에 호소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와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열린사회와 대립되는 비합리적인 집단주의적 운동이다.

▶해석

포퍼의 글을 읽다보면 민족주의가 너무도 강한 한국의 현실이 발가벗겨지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리게 된다.

"개인의 책임을 집단의 책임으로 대치한다"는 언명은 더욱 그렇다.

일본 역시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중화주의를 다시 들고 나오는 중국 역시 이런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역사를 민족 대 민족의 대립항쟁으로 보는 관점은 20세기 전체를 지배했고 특히 게르만족의 민족적 사명을 내세운 나치즘은 그 절정이었던 셈이다.

민족을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개인 대 개인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열린사회에 대해 포퍼가 그토록 열심이었던 것은 그의 시대가 역시 거대한 민족적 열풍이 몰아쳤던 비극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원문 읽기

현대 전체주의의 하나인 파시즘은 헤겔의 사상과 19세기 유물론을 결합한 것이다. 헤겔이 수집한 권위주의적 운동을 위한 무기 창고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품목이 들어 있다. (a)국가는 국가를 창조하는 민족정신의 화신이라는 역사주의적 성격을 지닌 민족주의,즉 하나의 선택된 민족은 세계를 지배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b)한 국가는 다른 국가의 천적이므로 전쟁에서 자기의 존재를 주장해야 한다. (c)국가는 어떤 종류의 도덕적 의무로부터 면제되어 있다.

역사적 성공이 유일한 심판관이다. (d)오래된 국가에 대한 신생국의 전쟁 도발(전면전)은 윤리적이다. (e)위대한 인간에 대한 개인숭배. (f)영웅적 삶의 철학.

▶해석

나치즘의 뿌리가 바로 이 헤겔적 역사관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흔히 히틀러가 아무런 역사적 배경도 뿌리도 없이 갑작스레 등장한 괴물처럼 보는 경향이 있고 지금의 독일인들도 그렇게 주장하지만 독일 철학사에 있어서 그 뿌리는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었다.

위의 항목들을 읽다보면 왜곡된 민족주의의 파괴적 사고가 어떻게 조성되는지 알 수 있다.

◆원문 읽기

증명된 위대한 철학자로서 위로부터 권력에 의해 임명된 헤겔은 대머리에 무미건조한,구역질 나는,무식한 허풍장이였다.

그는 지랄 같은 얼빼는 난센스를 갈겨 놓고,그것을 이리저리 퍼뜨리는 데 용맹스럽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이 난센스는 금전적 이익을 탐하는 추종자들에 의해 불멸의 지혜로 떠들썩하게 처받들어졌으며 모든 어리석은 자들에 의해 얼른 받아들여졌다.

그 어리석은 자들은 이미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경탄의 합창을 불러댔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헤겔에 마련해주었던 폭넓은 정신적 영향력은 한 세대 전체를 지적 부패에 빠뜨리게 하였을 뿐이다.

… 정부는 철학을 그들의 정부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학자는 그것을 하나의 장사거리로 삼고 있다.

▶해석

위의 글은 포퍼가 인용한 쇼펜하우어의 헤겔 비판이다.

고매한 철학자들도 이런 험한 말로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하는 이야기이니 생글 독자들은 따라 하지 말 것.특히 앞부분의 '지랄 같은' 따위는 절대로….

◆원문 읽기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주의의 가장 순수하며 정교한 하나의 형태다.

헤겔 좌파인 마르크스주의와 헤겔판 파시즘은 그 사상적 원천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는 인도주의적 충동이 강렬하게 넘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와 다르다.

사회과학과 사회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은 근본적으로 실천적 관심이다.

진리탐구에 대한 그의 진지성과 그의 지적 성실성은 위선과 표절에 항거하여 투쟁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그를 부각시켰다.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방법론이다.

그것은 사회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려는 하나의 과학적 방법임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온당한 평가는 방법론적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일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과학적 예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래가 미리 결정되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과학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고 엄격한 결정론을 신봉했다.

그런데 그런 엄격한 결정론은 그가 살던 시대의 과학적 지식의 한계의 산물이다.

오늘날에는 물리학에 있어서조차 엄격한 결정론은 과학적 증거들에 의해서 반증되고 있다.

엄격한 결정론은 과학적 예측의 필수적 전제조건이 아니다.

엄격한 결정론을 채택하지 않고서도 과학적 탐구는 수행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과학적 예측과 거시적인 역사적 예언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양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과학적 예측을 지원해 주는 논거를 역사적 예언을 지원해주는 논거로 취급할 수 없다.

▶해석

과학철학의 논리를 전공한 포퍼 다운 마르크스 비판이다.

마르크시즘은 도덕적 호소력은 있지만 결코 과학적 대안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가장 잘 펼쳐져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 도덕적 호소에 따라 20세기의 대부분을 보낸 소련 등 공산주의 사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원문 읽기

나는 폭군의 치하에서 다른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 폭군 살해를 인정하며,폭력혁명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가르친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기독교 사상가들과 신념을 같이한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혁명은 민주주의 수립을 그것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내가 의미하는 민주주의는 '백성의 통치'라든가 '다수의 통치'와 같은 애매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통치자들에 대한 공적 통제를 허락해 주며 그 통치자들을 피통치자들이 해고할 수 있게 하며,또한 통치자들의 의사에 반하는 개혁을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피통치자들이 할 수 있게 하는 일련의 제도적 틀(특히 총선거,즉 정부를 교체할 국민의 권리와 같은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폭력의 사용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개혁을 불가능하게 하는 폭군의 치하에서만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폭력 없이 개혁을 가능케 하는 사태를 조성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해석

민주주의 원리와 역사주의적 혁명론을 비교하고 있다.

닫힌 사회와 열린사회의 비교이기도 하다.

열린 사회는 자기 교정이 가능한 사회를 말한다.

마치 과학의 명제가 그렇듯이 언제라도 부정될 수 있고 반증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열린 사회다.

하나의 지도원리 만이 관철되고 요구되며 대중은 지도받는 존재일 뿐인 그런 이상국가는 오히려 닫힌 사회가 되고 만다.

한산동 생글생글i 연구원 hansandong@ed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