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

1889년 독일 바덴주(州)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웠다.

1923년 마르부르크대학교 교수,1928년 현상학으로 유명한 후설 교수의 뒤를 이어 프라이부르크대 교수,1933∼1934년 총장을 지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후에 한때 추방당했다가 후에 다시 복직하였다.

그의 사색의 대부분은 슈바르츠발트의 산장(山莊)에서 이루어졌다.

※참고 도서:Heidegger,Martin,Sein und Zeit,Tubingen 1993

(이기상 옮김,존재와 시간,서울,까치,2000)

반갑습니다.

생글생글 독자 여러분.먼저 퀴즈 하나! 여기 한 개의 사과가 있습니다.

사과의 본질은 눈앞에 놓여 있는 사과 그 자체일까요,아니면 노란 사과,파란 사과,썩은 사과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사과'라는 추상 개념일까요? 그리스의 플라톤 할아버지는 본질은 개별적인 사과가 아니라 개별적인 사과의 특성을 모두 포함하는 추상성으로서의 사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감각하는 것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으로 가상에 불과할 뿐이고,그 현상의 배후에 참다운 '본질'인 이데아가 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하이데거 교수님은 본질과 현상에 대한 플라톤의 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봅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보이는 구체적 현상이 바로 세계이고 '현상의 배후에 숨겨진 그 어떤 것'은 없다고 생각하십니다.

♣하이데거와 실존주의

하이데거는 20세기 독일 실존주의를 대표한다.

실존주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는 여러 철학자들(하이데거,야스퍼스,키에르케고르,샤르트르 등)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주제들을 일컫는 말이다.

실존주의는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구체적인 삶 속에서 자기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는 어느 누구나,신을 포함한 다른 무엇에도 자신의 삶을 의탁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이다.

샤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영향으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이데거의 실존에 대한 분석은 정신분석과 문예론,신학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망치와 나

손에 쥐고 못을 박던 망치를 떨어뜨렸다.

과학자는 이 현상을 망치가 지구 중심 방향으로 중력 때문에 떨어졌다고 설명한다.

뉴턴이라면 지구와 망치의 질량과 거리를 측정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적용하여 서로 끌어당기는 힘의 크기를 계산해 보일 것이다.

과학자는 자연에 '본질'이 있다는 믿음으로 보편적 자연법칙을 이끌어냈다.

망치를 보편적 법칙에 넣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망치와 나의 관계,망치의 재료나 색깔 등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학에서 다루고 있는 망치는 내가 못을 박기 위해 실제로 '사용'하는 망치가 아니다.

모든 개별적 특성이 사라진 망치는 과학자의 앞에 이론적 관찰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이제 대상화한 세계를 법칙을 통해 파악하고 지배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과학적 인식이 인간이 망치를 대하는 근원적인 방식일까?

근대 이후 과학은 절대 진리로 우리의 삶에 파고들었다.

그 결과 과학적 세계관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란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과학은 존재하는 것에 드리워진 신비의 베일을 벗겨내고 계산하고 조작할 수 있는 부분을 확실하게 내세운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이 움직이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 현대인의 과학에 대한 맹신을 비판한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 문명의 근원은 서구의 전통 형이상학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데 있다고 본다.

그 결과 하버마스 식으로 말하자면 과학의 세계가 우리의 삶의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있다.

과학의 세계를 세계 자체로 간주하는 한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세계는 과학에서 파생한 불완전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과학의 세계가 일상의 세계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지적하여 현대인의 전도된 시각을 바로잡으려 한다.

<존재와 시간>은 바로 삶을 과학의 논리로부터 해방시켜 삶의 풍요로움을 회복하려는 하이데거의 노력이 담긴 책이다.

2.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

◆원문읽기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이라는 낱말로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존재'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 당혹스러움에라도 빠져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선 무엇보다도 다시금 이 물음에 대한 이해를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다.

(위 책,1쪽)

◆해석=꽃,고양이,삼각형,수,천사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자이다.

신 또한 존재자이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려면 '존재'를 통해야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는 서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존재론은 변화하는 현상의 근저에 놓인 변하지 않는 것을 '실체(實體)'라 부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진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실체 또한 존재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존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면서 시들해졌다.

하이데거는 지금까지 존재에 대한 물음에 '존재자'로 답해 왔으므로 존재 물음을 새롭게 불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에서 니체에 이르는 전통 형이상학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방식으로 있는 것'을 존재로 간주해왔다.

따라서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는 과거와 미래가 없고 변화하거나 운동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망각한 '실체 형이상학'을 해체하고 참된 존재론을 구성하려 하였다.

전통 형이상학이 존재와 시간을 분리된 것으로 사유하였다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함께 사유한다.

'지금 실존하고 있는 존재'라는 실존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3.도구와 그들

하이데거는 존재 물음을 풀어가지 위해서 막연하게나마 존재 이해를 가지고 있는 인간,즉 현존재(Dasein)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주:하이데거는 인간 대신 현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데카르트는 인간과 세계를 서로 분리하였으나 하이데거는 이에 반대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세계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즉 세계-내-존재이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서 존재해야 하는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의 독특한 있음을 '실존'이라 부른다.

◆원문읽기

일상적인 서로 함께 있음에 우선 대개 '거기에 있는'…그 누구는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아니고,사람들 자신도 아니며,몇몇 사람들도 아니고,모든 사람의 총계도 아니다.

그 '누구'는 중성자[불특정 다수]로서 그들[das Man,세인(世人)]이다.

…대중의 교통수단을 사용하면서,정보매체(신문)를 이용하면서 타인은 모두 같은 타인이다.

이러한 서로 함께 있음은 고유한 현존재를 완전히 '타인들의' 존재양식 속으로 해체해 버리며 그래서 타인들의 차별성과 두드러짐이 더욱 더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눈에 안 띔과 확정할 수 없음 속에서 '그들'은 그들의 본래적인 독재를 펼친다.

우리는 남들이 즐기는 것처럼 즐기며 좋아한다.

우리는 남들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읽고 보며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 판단한다.

우리는 또한 남들이 그렇게 하듯이 '군중'으로 물러서기도 한다.

남들이 격분하는 것에는 우리도 '격분한다.'(위 책,126쪽)

▶해석=사람들은 흔히 일상의 세계에서 '그들'이 하는 대로 따라할 뿐이다.

여기서 '남들',즉 타인은 특정한 타인이 아니라 눈에 뛰지 않는 타인,나도 바로 그 타인 속에 속하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타인이다.

우리는 '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그들'의 세계에 태어나서 '그들'의 지배 속에 살다가 '그들'처럼 죽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논리에 안정감을 느낀다.

일상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불안'이다.

우리가 정신없이 바쁠 때에 불안은 생기지 않고 그 결과 자신을 망각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불안을 그 자체로 마주쳐야 할 용기,즉 불안에 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은 삶의 모든 일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죽음의 문제를 삶 속에서 끌어들일 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존재는 존재자의 현상을 통해 슬그머니 얼굴을 드러낸다.

인간은 불안에 직면하여 자신의 삶을 어떤 존재자에게 의탁하지 않고 그저 죽음이 주는 무(無) 위에 자신의 삶을 얹어 놓을 때 자유로울 수 있다.

이미 주어진 도덕이나 종교를 좇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구축하고 만들어 갈 때 실존이 나에게 열린다.

결단을 내려서 자기 자신으로 살려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위대한 사람으로 철학자,예술가,정치가를 든다.

즉 위대한 사람이란 역사적 사명을 깨닫고 결단하여 그 국가와 민족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사람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는 나치의 등장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생각 속의 나치와 실제의 나치가 달랐기에 하이데거는 10개월 만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총장직을 사임한다.


많이 어려웠나요? 독일 철학이 원래 어렵고 <존재와 시간>을 읽기 위해서는 이전에 많은 철학적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지금 혹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해도 좌절하지 마세요.

나중에라도 "아! 그 이야기"라고 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은희 S·논술 압구정점 원장 polaris@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