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사·교양 기타

    지진에 흔들리는 글로벌 공급망… 히나구 단층이 남긴 경고

    히나구(日奈久).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햇살(日)이 오래(久) 머문다’는 뜻을 품은 듯 이름부터 더없이 평화롭다. 일본 규슈 서부 구마모토현의 히나구는 600년 역사를 지닌 고즈넉한 온천 마을이다.이 따스한 지명 아래에 일본에서 가장 위태로운 지층 중 하나인 히나구 단층대가 숨죽이고 있었다. 2016년 4월 이곳에서 이틀 간격으로 발생한 규모 6.5와 7.3의 강진으로 270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당시 히나구 단층 북부에서 시작된 충격은 이웃한 후타가와 단층으로 전이되며 대참사를 불렀다. 단층대 양쪽이 수평으로 엇갈리면서 지반이 흔들렸고, 건물 붕괴 등으로 이어져 큰 피해를 냈다.이때 약 81㎞에 달하는 히나구 단층대의 남쪽 구간은 힘을 흩트리지 않은 채 ‘미파열 구간’으로 남아 있었다. 10년간 에너지가 쌓여가는 압축의 시간을 보낸 히나구 단층이 결국 다시 폭발하며 지표면을 강타했다. 규모 7.1의 강진으로 최소 28명이 사망하고, 8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전력과 교통 인프라도 크게 손상됐다. 여진도 200회 넘게 이어지고 있다.2016년 지진 이후 10년간 규슈는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변모했다. 대만 TSMC를 비롯해 소니, 르네사스 등 글로벌 기업이 몰리며 ‘실리콘 아일랜드’로 부활했다. 일본 반도체 부흥의 상징이 된 구마모토가 활단층 지대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단층 하나의 움직임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즉각적인 균열을 낼 수 있음을 확인해준 사건이다.글로벌 기업은 풍부한 용수와 전력에 더해 숙련된 인력을 갖춘 이곳을 택하면서도 지진 위험에 대비해 내진 설계에 막대한 돈을 썼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강진으로 정상 조업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 시사·교양 기타

    튤립에서 AI까지… 꼬리 무는 ‘순환금융’이 키우는 거품

    역사상 가장 유명한 투기 광풍으로 꼽히는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파동’의 주인공은 꽃이 아니었다. 땅속에 묻힌 튤립 구근을 나중에 인도받는 권리를 적은 계약서가 거래의 실체였다. 미래의 기대를 현재의 수요로 끌어당긴 최초의 금융 버블 중 하나였다.1990년대 말 닷컴 버블 때도 비슷한 그림이 반복됐다. 미국 통신장비업체 루슨트테크놀로지는 신생 통신회사에 거액을 대출해주고 장비를 파는 거래로 실적을 올렸다. 이른바 ‘벤더 파이낸싱’(판매자 금융)이다. 고객이 빌린 돈이 루슨트의 매출로 돌아왔다.하지만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면서 고객이 줄줄이 파산하자 외상채권은 대규모 손실로 이어졌다. 1999년 말 84달러까지 치솟았던 루슨트 주가는 2002년 55센트로 폭락하며 동전주로 전락했다.내 돈을 쥐여주고 물건을 팔아치우는 오래된 장사법이 AI 붐을 타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번에는 ‘순환금융(circular financing)’으로 불린다.구조는 훨씬 복잡하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엔비디아와 오픈AI의 거래가 단적인 예다. 엔비디아는 소프트뱅크가 짓는 데이터센터를 오픈AI가 임차하도록 최대 2500억달러까지 지급보증한다. 오픈AI는 그 신용으로 빌린 돈으로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산다. 소프트뱅크는 오픈AI의 투자자이면서 동시에 데이터센터 임대사업자다.오라클이 오픈AI에 팔기로 한 컴퓨팅 파워 대금도 이 신용에 기대고 있다. 외신이 이 구조를 자신의 꼬리를 물고 도는 신화 속 뱀 ‘우로보로스’에 빗댄 이유다.순환금융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초기에는 모두의 매출과 기업가치를 키우는 혁신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 AI 생태계 안에서 돈이 잘 돌고 소

  • 시사·교양 기타

    장병 호르몬 검사 의무화한 트럼프 정부… ‘테토스테론 정치’의 명암

    최근 한 TV 연애 프로그램에서 ‘에겐남, 테토녀’ 특집을 다룬 적이 있다. 씩씩한 여성들과 수줍은 남성들, 전통적인 성(性) 이미지와 다른 이들이 짝을 찾는 과정이 재미있었지만 용어 자체도 흥미로웠다.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여성이라는 테토녀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풍부한 남성을 뜻하는 에겐남이라는 용어 말이다.200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초식남, 육식녀’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우리의 테토남 에겐녀가 MBTI를 잇는 나와 상대의 정체성 구분법이라면,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등장한 초식남은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와 달라진 사회 구조를 반영한 단어라서다.연애와 결혼을 기피하는 초식남의 확산은 저출생과 맞물리며 큰 사회 문제로 인식됐다. 당시 일본 정부는 청년들의 이성 접촉 기피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을 꼽았다. 실제로 대졸 취업률이 98%인 요즘은 초식남 용어 사용이 뜸해졌다.테스토스테론은 라틴어 ‘testis(고환)’와 ‘sterol(스테로이드 알코올)’의 합성어로 남성을 남성답게 한다는 성호르몬이다. 여성에게도 소량 분비되긴 하지만 근육 증대, 골밀도 증가 등에 관여해 남성에게는 필수 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다. 30대 이후부터는 매년 1%씩 자연 감소된다고 한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핵심 각료와 30세 이상 미군 장병에게 매년 남성 호르몬 검사를 받게 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수치가 낮으면 테스토스테론 투입 요법(TRT)도 시행할 방침이다. “장병의 지속적인 투쟁에 필요한 생물학적 기반을 확보하는 일”이라는 게 피터 헤그세스 전쟁부 장관의 설명이다. 백신 음모론자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

  • 시사·교양 기타

    실용주의 한계 넘어선 중국… 필즈상 2명 배출로 증명한 기초과학의 힘

    “과학 분야에서 중국은 갈릴레이보다는 다빈치에 가까웠다.”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은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중국의 과학 전통을 르네상스 천재의 모습에 빗대 묘사했다. 실용적 성과는 뛰어났지만 기초 원리 탐구에는 무심했다는 진단이다.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헬리콥터, 탱크 같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대를 빛낸 탁월한 성과지만 과학 원리의 발견과는 결이 다르다. 중국 문명도 종이와 나침반, 화약을 발명했지만 기초 과학 연구에 취약했다.중국의 기술과 수학은 당장의 필요를 해결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를 두고 19세기 프랑스 수학자 루이 세디요는 “중국은 수학에서 가치 있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수학과 계측을 정교하게 활용하는 ‘수량화 혁명’은 중국에선 발생하지 않았다. 기초 연구를 등한시한 중국이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에서 뒤처진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임기응변식 실용주의는 한계가 분명했다. 전통시대 중국의 기술 성과는 겉만 번지르르한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10~12세기) 때 중국의 연간 철 생산량은 15만t으로 18세기 영국의 철 생산량의 두 배나 됐다. 하지만 철의 순도와 경도는 제각각이었다. 당시 중국의 철은 무기와 건축자재, 농기구, 식칼 등의 용도에 맞춰 생산되지 못했다. 정밀한 품질이 요구되지 않는 종과 탑, 불상 같은 과시 용품에 철이 과소비됐다.‘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의 올해 수상자 네 명 중 두 명이 중국 베이징대 동기동창이어서 눈길을 끈다. 덩위 미국 시카고대 교수와 왕훙 뉴욕대 교수가 중국 국적자로는 처음으로 필즈상을 받는다.왕 교수는 100년 넘은 수

  • 시사·교양 기타

    후계자 찾지 못해 늙어가는 중소기업… 세제 지원의 시급함

    19세기 영국에서는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됐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수성가한 기업가의 자식은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에서 전통 토지귀족의 가치관을 거의 그대로 흡수했다. 토머스 칼라일과 찰스 디킨스로 대표되는 반(反)산업주의 정서는 기업가 자식들에게도 유행처럼 번졌다.2세 경영자들은 혁신과 이윤 추구보다 여가를 즐기는 지주 문화에 매료됐다. 젊은 기업가 중에는 공장을 물려받길 꺼리고 교외 생활을 동경한 부류가 적지 않았다. 이즈음 영국의 전성기도 저물었다.선대의 맥을 잇는 ‘승계’는 오랫동안 모든 인류의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기독교 성경에 ‘아담은 셋을 낳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는 게난을 낳는’ 식의 계보학적인 내용이 가득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역사 교육이라고 하면 ‘태정태세문단세~’와 같은 통치자 명단을 순서대로 외우는 것으로 여기던 시절도 있었다.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왕자의 난’은 모두 승계를 다투다가 벌어진 일이다.승계에 대한 열망은 사회가 선진화하면서 강도가 옅어졌다. 풍요를 맛본 세대는 부모처럼 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기를 꺼렸다. 고령화와 인구 구조 변화는 이런 현상을 증폭시켰다. 미국과 일본 산업현장에선 ‘베이비붐 세대’(1946~1965년 출생)와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가 은퇴하면서 ‘후계자 대란’이 빚어졌다.정부가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해 문을 닫는 중소기업을 줄이는 사업을 적극 지원한다는 소식이다. 가칭 ‘인수합병 등을 통한 중소기업 승계 시 양도소득세 특례’를 마련해

  • 시사·교양 기타

    ‘메이드 바이 휴먼’의 시대… AI 홍수 속 인간의 손길을 찾는 법

    인간이 손으로 빚은 도자기에는 미세한 굴곡이 있다. 사람이 하는 수제 가죽 제품의 바느질도 완벽하게 간격을 맞추지는 못한다. 기계로 작업했다면 명백한 결함으로 보일 수도 있는 흔적이다.하지만 일률적이며 별 개성도 없는 제품의 홍수 속에 이런 불완전함은 ‘사람의 손길’을 증명하는 표식이 되곤 한다. 최근 인공지능(AI) 시대의 콘텐츠 시장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AI는 순식간에 글을 쓰고 그림과 음악, 영상을 만든다. 인터넷상에는 그럴듯하지만 비슷비슷한 AI 생성물이 넘쳐난다. 이른바 ‘AI 슬롭(slop·질 낮은 콘텐츠)’이다. 미국 뉴스레터 플랫폼 서브스택은 최근 게시물에 AI가 사용됐는지를 검사하는 탐지 도구를 도입했다. 앞서 미국작가조합은 사람이 썼다는 의미로 ‘인간 작가(human authored)’ 로고를 도입했다. ‘AI에 의한 것이 아닌(not by AI)’과 같은 표시 문구도 등장했다.유기농 식품이 재배 방식에 가치를 두는 것처럼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의 손길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완벽한 제품보다는 사람의 경험과 감정, 개성을 더 귀한 가치로 평가하는 ‘메이드 바이 휴먼’ 운동이다.그러나 지금 시대에 100% 인간 제작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의문은 남는다. 사람이 컴퓨터로 글을 쓰고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순간 이미 수많은 기술의 도움을 받게 된다. AI를 통해 일부 자료를 찾거나 초안을 다듬었다면 인간 창작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닐까. 어디까지가 인간의 창작이고, 어디까지가 AI 창작인지의 구분도 모호하다.AI 사용 여부를 판별하는 일도 완벽할 수 없다. 대안으로 어떤 도구를 이용했고 무엇을 수정했는지 제작

  • 시사·교양 기타

    170년 백화점 역사에 드리운 그늘… 변화의 바람에 쓰러진 향토 유통

    1853년 6월 1일 프랑스 파리에 의류 판매업자 아리스티드 부시코가 기존 의류·잡화점을 대대적으로 고쳐 봉마르셰(Bon Marche)라는 대형 종합 상가를 열었다. 화려하고 큰 건물에서 정찰제로 상품을 판 봉마르셰는 ‘소비의 궁전’으로 불렸다. 대량으로 물품을 들여온 덕에 일반 소매점보다 가격이 15~20% 저렴했고 반품도 자유로웠다. 지금의 백화점이 탄생한 순간이다.백화점은 빠르게 세계로 퍼져나갔다. 파리의 갤러리라파예트와 프랭탕, 런던의 해러즈와 셀프리지, 뉴욕의 메이시, 도쿄의 미쓰코시 같은 화려한 백화점은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도 1929년 미쓰코시백화점을 필두로 미나카이, 히라다, 조지야 등 일본계 백화점이 들어섰고 한국인이 처음 세운 화신백화점도 곧이어 문을 열며 성업했다.산업화 이후 백화점은 지방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1980~1990년대 지방 거점도시 중심지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백화점이 자리했다. 부산의 태화·미화당·세원·신화·리베라백화점, 울산의 주리원·황태자백화점, 대전의 대전·동양백화점, 전주의 전주코아·전풍백화점, 광주의 태산·화니백화점 등이 고객의 발걸음을 붙잡았다.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역 상권을 발판 삼아 거침없이 사업을 확장하던 향토 백화점 대다수는 갑작스럽게 닥친 외환위기의 충격에 힘없이 쓰러졌다. 백화점 업계는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됐다. 살아남았어도 위기는 이어졌다. 대형마트와 복합쇼핑몰, 아울렛이란 버거운 경쟁자가 연이어 등장했다. 온라인 쇼핑 확산은 향토 백화점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82년 역사의 대구백화점이 기로에 섰다. 최근 10년

  • 시사·교양 기타

    대통령 SNS까지 초고속 베팅 대상...월가의 '1밀리초' 경쟁

    ‘째깍’하는 시계 초침 한 번에 1초가 흐른다. 일상에서는 더 쪼갤 필요 없는 짧은 시간이지만, 미국 월가는 이를 1000분의 1초로 나눠 베팅한다. 이른바 ‘밀리초’(ms·1000분의 1초)의 전쟁이다. 고성능 컴퓨터가 정보를 읽고 자동으로 거래하는 초단타매매(HFT·high frequency trading)는 초 단위 경쟁을 밀리초, 마이크로초의 세계로 끌고 갔다.뉴욕과 시카고 사이에는 광케이블과 마이크로파 통신망이 놓여 있다. 뉴욕 일대의 주식, 상장지수펀드(ETF) 시장과 시카고의 주가지수선물 시장 간 가격 정보를 조금이라도 빨리 전달하기 위해서다. 시카고에서 S&P500 선물이 먼저 오르면 뉴욕의 관련 ETF와 주식도 따라 움직인다. 두 시장에서 순간적으로 가격이 차이 날 때 싼 쪽을 사고 비싼 쪽을 팔면 이익이 생긴다.이 속도 경쟁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등장했다. 트루스소셜 SNS를 운영하는 트럼프미디어가 트럼프 대통령의 게시물을 일반 이용자보다 밀리초 단위로 먼저 확인할 수 있는 ‘트루스 API’ 유료 서비스를 다음달 출시하기로 결정하면서다. 가격은 월 최대 10만달러, 약 1억5000만원이다.트럼프의 SNS 게시물 하나에 원자재 가격이 춤추고, 증시가 폭락과 폭등을 오가는 점을 감안하면 월가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펀드스트랫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S&P500 ‘최고의 날’과 ‘최악의 날’ 상위 다섯 거래일은 모두 트럼프의 발언과 게시물이 갈랐다. 전문기관이라면 개인이 SNS를 읽기도 전에 인공지능(AI) 알고리즘에 따라 정보를 분석한 뒤 주문을 체결할 수 있다. 뉴스가 대중에게 도달할 때는 이미 거래가 끝난 상태다.HFT의 밀리초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