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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김하경 한국경제신문 기자
그래픽=김하경 한국경제신문 기자
계속되는 내수경기 침체에 미국발 관세전쟁의 여파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등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경제와 삶의 현장에서 이들의 하소연은 끊이지 않습니다. 정부가 경기를 살리기 위한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마련하면서 이들의 빚을 아예 없애주거나 큰 폭으로 깎아주는 부채 탕감 계획을 마련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경안에 나타난 빚 탕감 규모는 놀라운 수준입니다. 약 1조5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123만여 명에 이르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빚 22조6000억원가량을 덜어준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선 2000년대 초 김대중 정부 이후 거의 매 정권에서 빚 탕감이 이어졌는데요, 이번이 역대 최대 규모입니다. 빚이 5000만원 이하인데 7년 이상 연체된 사람이라면 완전히 빚을 없애줍니다.

더욱 관심을 모은 것은 이재명 대통령의 언급입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일 대전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채권자 입장에선 (부실채권은) 장부에 쓰인 숫자에 불과하다”라며 빚을 탕감해주는 게 형평성에 맞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 듯하면서도 ‘장부에 쓰인 숫자’라는 말은 잘 이해가 안 가지요?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사람들은 괜한 일을 한 건지 고개가 갸웃해지기도 할 겁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식의 대규모 빚 탕감은 앞으로 성실하게 원리금을 갚지 않으려는 풍조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과연 대규모 빚 탕감은 정의로운 시도인지 등을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정권 바뀔 때마다 등장한 '빚탕감' 정책
패자부활 효과에도 도덕적 해이 조장 비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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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탕감(蕩減)’이란 말부터 낯설지요? 요즘은 어려운 한자를 잘 사용하지 않지만, 금융회사 등에 진 빚이나 세금, 벌금 등을 깎아주거나 없애줄 때는 이 단어를 꼭 씁니다. ‘넓을 탕(蕩)’에 ‘덜 감(減)’ 자를 합쳐, 넓게 덜어준다는 뜻입니다. 이는 빚과 관련한 구제 제도의 역사가 깊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고대 유대사회엔 ‘희년(禧年, Jubilee Year)’ 제도란 게 있었습니다. 안식년이 7번 지난, 50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해입니다. 이때엔 사람 사이의 모든 부채를 탕감해주고,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이들도 해방시켜줍니다.

희년제도에서 개인회생제도까지

현대에 와서는 나라마다 비슷한 성격의 ‘개인회생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빚으로 파탄 지경에 몰린 개인 채무자가 법원의 조정 아래 일정 기간(주로 3년) 소득에서 생계비를 제외한 금액을 성실하게 갚으면 남은 채무를 탕감받을 수 있게 해주는 제도입니다. 일명 ‘빚잔치’라 불리는 파산과 달리, 채무자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지 않고 미래의 소득을 활용해 재기를 돕는 채무조정 절차입니다. 회생을 원하는 사람이 법원에 신청하면 법원이 심사 후 절차 개시 결정을 내립니다. 일정한 소득이 있더라도 빚이 워낙 많아 감당이 어려운 사람, 소득이 전혀 없거나 채무 한도를 넘어선 사람은 법원의 인가를 받지 못할 수도 있어요. 이때 마지막 수단으로 정부가 ‘빚 탕감 정책’을 폅니다. 정부의 특별한 구제 정책으로, 최종적인 사회안전망 역할을 합니다.

배드뱅크 설립 통한 ‘빚 탕감’

우리나라에서 ‘빚 탕감’이 처음 이슈가 된 것은 1987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농어촌 부채 탕감’을 공약으로 내세운 때였습니다. 이후 농어민을 위한 부채 탕감은 선거 때마다 단골 공약이 됐었죠. ‘소 파동’ ‘마늘 파동’ 등 당시엔 농산물 가격이 급락하며 빚더미에 앉은 농민이 많았던 때라 그랬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이후인 2000년대 초 17조5500억원 규모의 농가 부채 탕감 정책을 폈습니다. 이때는 외환위기 직후여서 탕감을 호소하는 어려운 계층이 많기도 했습니다.

배드뱅크(Bad Bank)가 나온 것도 이즈음부터입니다. 이 기구는 은행 등이 갖고 있는 부실화된 대출을 싼 값에 인수해 정리하는 전문 기관입니다. 은행이 부실 대출을 털 수 있으면, 자연히 빚을 진 개인은 원리금 감면 등 혜택을 받게 됩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신용카드 대란이 발생한 이후, 그 수습을 위한 배드뱅크가 설립됐어요. 당시엔 ‘3개월 이상, 1000만원 이하를 연체한 채무자’에게 원금의 30~50%를 감면해줬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최대 50%까지 빚을 깎아줬습니다. 윤석열 정부 때인 2022년엔 감면 폭을 60~90%로 대폭 높여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빚을 내서 주식이나 가상자산 등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청년층도 구제해주겠다고 해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번 정부의 빚 탕감 규모는 역대 최대여서 더욱 관심을 모읍니다.

‘기회의 균등’ 과연 맞는가?

이상의 빚 탕감 정책은 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즉 결과의 평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기회의 평등’은 보장하는 사회가 정의롭다는 것이죠. 자신의 남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경제 여건이 너무 나빠 버티지 못한 계층의 빚은 정부가 나서서 돕는 게 옳다는 생각입니다. 일종의 패자 부활이 가능하게 하는 사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은 주는 사회가 평등과 정의의 이념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유대사회의 ‘희년 제도’도 50년에 한 번씩 모든 이를 새로운 출발선에 똑같이 서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인류의 지혜인데요, 이게 현대 국가의 부채 구조조정, 개인회생제도 등으로 나타난 겁니다.

물론 대의에는 공감하면서도 성실히 빚을 갚은 개인에 대한 형평성 논란, 경제의 부실을 털어내지 않고 그대로 가져가 결국 경제 전체의 효율을 떨어트리는 문제 등은 여전히 숙제로 남습니다. NIE 포인트 1. 금융회사의 부실 채권은 ‘장부에 쓰인 숫자’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일까?

2. 배드뱅크의 기능과 구조에 대해 알아보자.

3. 존 롤스는 ‘빚 탕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토론해보자. 탕감은 성실하게 빚 갚은 사람 역차별
건전한 경제질서 위해 극히 예외로만 써야
 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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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빚 탕감’ 정책의 근거와 논쟁점에 대해 알아봅시다. 이재명 대통령은 “금융기관이 10명 중 1명은 빚을 못 갚을 것으로 보고 9명한테 이자를 다 받고 있는데, 못 갚은 한 명을 끝까지 쫓아가 받으면 부당이득”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금융회사가 못 받은 원리금을 청구하는 것(추심)을 “(상환을) 이중으로 받는 것”이라며 “이걸 정리해주는 게 형평성에 맞는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신용이 낮은 사람에겐 대출금리를 낮춰줘야 한다는 주장과 근본 철학이 같아 보입니다. 일반적인 경제원리로는 신용도가 높은 사람에게 낮은 대출금리, 신용도가 낮은 사람에겐 높은 대출금리를 적용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신용도가 낮은 사람은 사회적 약자이고, 이들의 어려움을 사회가 포용해주는 게 정의롭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정부가 나서야” vs “도덕적 해이 심각”

한편으론 은행이 세계적 물가상승기에 나타난 고(高)금리에 편승해 이익을 막대하게 남기고도 어려운 소상공인 등의 빚은 깎아주지 않는다는 비판적 시각이 있는 듯합니다. 은행의 ‘탐욕’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더 늘어난다면 국가적으로 큰 부담이고, 이는 사회적 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적은 비용으로 큰 파국을 막으려면 정부가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대통령도 “소상공인이 빚쟁이가 됐으니 정부가 이제 책임져야 하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일단 빚을 성실하게 갚아온 사람들로선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이들에게도 혜택을 주겠다고 하지만 상대적 박탈감이 치유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또 빚을 안 갚고 버티면 나중에 탕감해준다는 생각이 고착되면 실제로 빚을 갚지 않으려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경제학에선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만큼 은행의 대출은 더 부실해지겠죠? 은행이 이런 경우에 대비해 금리를 더 올리는 식으로 대응하면 결국 빚을 잘 갚고 있는 사람에게 피해가 돌아갑니다. 정부가 ‘정책’을 내놓으면 시장은 ‘대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책은 시장의 대책 앞에 무기력해지는 경우가 많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경제위기 등을 내세워 빚 탕감을 되풀이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기업의 경우 빚 탕감은 부실을 연장하는 통로가 돼 경제가 건전하게 다시 살아나는 데 방해물이 되곤 합니다.

신용위험 관리는 은행업의 본질

이번엔 경제의 원리와 금융업의 본질을 통해 빚 탕감 정책을 살펴보겠습니다. 은행은 예금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대출을 통해 자금을 운용합니다. 대출이자를 예금이자보다 높게 책정해 그 차이인 예대금리차를 만들고, 이것을 은행의 주된 수익원으로 삼습니다. 예대금리차를 만드는 것은 돈을 빌린 사람이 원리금을 갚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은행은 돈 빌린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대출 손실이 발생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게 신용위험(대출 손실 발생 위험)을 관리하는 일인데, 이게 바로 은행업의 본질입니다.

은행은 신용위험을 잘 통제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노하우를 쌓아왔습니다. 자신의 여윳돈을 은행에 예금으로 맡기는 것은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신용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정보의 비대칭성’이라고 하죠. 은행이란 제도가 발전하게 된 결정적 배경은 이런 정보의 비대칭을 줄여주는 심사 능력에 있습니다. 우수한 심사 능력은 은행 경쟁력의 핵심이죠. 사법제도를 통한 구제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은행은 갚을 능력을 잃은 차입자를 신용파탄자로 지정해 일체의 금융거래를 중단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차분히 따라가 보면 빚 탕감 정책은 아주 특별한, 인위적 조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실하게 빚을 갚은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건전한 금융시스템을 위해서도 ‘빚 탕감’ 정책은 극히 예외적으로 적용하고, 탕감 수준도 사회가 수용 가능한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NIE 포인트 1. 신용도와 여신 금리 간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2. ‘도덕적 해이’의 정확한 경제학 개념을 공부해보자.

3. ‘정보의 비대칭’과 신용위험 관리의 관계에 대해 정리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