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머지않다'는 시간, '멀지 않다'는 거리에 써야죠

    ‘아가 아가 우지마라, 비야 비야 오지 마라, 저기 가서 노자….’ 1930년대 암울하던 일제치하에서 우리 국민을 일깨운 것은 브나로드운동이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주도한 이 계몽운동으로 비로소 한글의 대량 보급이 가능해졌다. 당시 문자보급 교재로 쓰인 <한글공부>(1933년 동아일보사)를 보면 우리말의 변천 과정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많다. 위의 구절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머지않아’는 한자어 ‘불원간’과 같은 뜻우선 눈에 띄는 게 ‘우지마라, 오지 마라, 노자’ 같은 말이다. 각각 ‘울다, 말다, 놀다’가 활용한 모습이다. 모두 ‘ㄹ탈락 용언’인데 현행 맞춤법에 따른 표기와는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ㄹ탈락 용언은 활용할 때 어미 ‘-네, -세, -오, -ㅂ니다’ 앞에서 ㄹ받침이 탈락하는 게 원칙이다(한글맞춤법 제18항). 뒤집어 말하면 ‘울다’ ‘놀다’는 어미 ‘-지/-자’ 앞에서 어간이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울지’ ‘놀자’가 현행 표기 규범인데, 당시만 해도 이를 ‘우지’ ‘노자’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이는 역설적으로 예전부터 ‘ㄹ받침 용언’이 ‘ㅈ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ㄹ받침이 탈락하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 “홍도야 우지마라~”의 표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규범상으론 ‘울지 마라’가 바른 표기다.이런 ㄹ탈락 현상이 예외적으로 굳어져 단어로 인정된 게 있다. ‘마지못하다(←말+지+못하다)’ ‘마다하다(←말+다+하다)’ ‘머지않다(←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열두째'는 차례…수량 말할 땐 '열둘째'죠

    헷갈리는 수의 세계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자. “왼쪽에서 (열두째/열둘째)에 있는 사람이 나야.” “이번 시험은 만점자가 많군. 이 답안지가 벌써 (열두째/열둘째)야.” 두 문장에 쓰인 ‘열두째’와 ‘열둘째’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첫 문장은 ‘열두째’, 둘째 문장은 ‘열둘째’라고 해야 한다.둘째, 셋째, 넷째는 차례.수량 아울러 써‘열두째’는 맨 처음에서 열두 번째라는 뜻이다. 차례, 순서를 말한다. “위에서 열두째 줄을 읽어 보아라”처럼 쓴다. 이에 비해 ‘열둘째’는 열두 개째란 뜻이다. 지금까지 모두 해서 몇 개째임을 말한다. “이 라인에서 발견된 불량품이 오늘만 벌써 열둘째다” 식으로 쓴다. 표준어 규정 제6항 얘기다.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거나 줄어들어 형태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제6항은 발음 변화에 따른 표준어 사례를 담았다. 두 개의 비슷한 발음 중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만을 표준어로 삼았다. 단수표준어의 사례다.예전엔 ‘두째, 세째’와 ‘둘째, 셋째’를 구별해 썼다. ‘두째, 세째’는 차례를 나타낼 때, ‘둘째, 셋째’는 수량이나 개수를 나타낼 때 썼다. 하지만 언어 현실에서 이 같은 구별이 쉽지 않고 다소 인위적인 측면도 있어 이를 ‘둘째, 셋째’로 통합했다(네째/넷째도 넷째로 통일). 따라서 지금은 ‘둘째, 셋째, 넷째’가 차례와 수량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쓰인다. 바꿔 말하면 우리말에 ‘두째, 세째, 네째’ 같은 말은 없다는 얘기다.하지만 예외가 있다. 십 단위 이상에서는 ‘열두째, 스물두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서너 명'이 옳고 '세네 명'은 틀리죠 ~

    우리말 수의 세계는 들여다볼수록 오묘하다. 그동안 ‘맞춤법 바로 알기’를 통해 우리말 수사에 한자어 계열과 고유어 계열이 있다는 것을 살펴봤다. 하나, 둘, 셋 등이 고유어 수사고 일(一), 이(二), 삼(三) 같은 게 한자어 수사다. 고유어 수사는 관형어로 쓸 때 ‘한, 두, 세’ 식으로 또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더 복잡하다. 뒤에 오는 단위명사가 무엇이냐에 따라 ‘서 말’과 ‘석 자’ ‘세 명’ 식으로 구별해 쓰기도 해야 한다.서 돈, 서 말은 돼도 석 돈, 석 말은 안 써표준어규정 17항은 이들을 구별하는 까닭을 담고 있다. 요약하면, ‘의미는 같되 비슷한 발음으로 몇 가지가 쓰일 경우 그중 더 널리 쓰이는 하나를 표준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선택된 게 ‘돈, 말, 발, 푼’ 앞에서는 ‘서-’다. ‘세-/석-’은 쓰지 못한다. ‘냥, 되, 섬, 자’ 앞에서는 ‘석-’을 쓰고 ‘세-’는 버렸다. ‘서-’는 당연히 못 쓴다. ‘넷’의 관형형인 ‘너-’와 ‘넉-, 네-’를 구별해 쓰는 요령도 같다. ‘돈, 말, 발, 푼’ 앞에서는 ‘서-, 너-’가, ‘냥, 되, 섬, 자’ 앞에서는 ‘석-, 넉-’이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그 외의 단어가 올 때는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무엇이 더 널리 쓰이는지를 보면 된다. 예컨대 ‘(보리) 서/너 홉’, ‘(종이) 석/넉 장’과 같이 쓸 수 있다. ‘세/네’는 비교적 널리 통용된다. 따라서 이를 ‘세/네 홉’, ‘세/네 장’이라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모든 단위명사를 분류해 제시할 수는 없기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장광설'은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이죠

    말의 세계는 깊고도 오묘하다. 별의별 단어들이 다 있다. 지난 호들에서 살핀 ‘주책’ ‘엉터리’ 등은 아예 뜻이 반대로 바뀌어 쓰이는 사례다. 세월이 흐르면서 말의 의미와 쓰임새가 달라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장광설’도 그중 하나다. 쓸데없이 장황하게 말을 할 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고 한다.유창한 부처님 설법 뜻하던 ‘장광설’인류 역사에서 장광설을 가장 잘 늘어놓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석가모니다. 그는 이 말이 태어나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사연을 알아보기 전에 짧은 문답풀이를 하나 해보자. ‘천동설, 감언이설, 대하소설, 성선설, 횡설수설, 장광설.’ 모두 ‘-설’로 끝나는 복합어다. 이 중 특이한 ‘-설’이 하나 있다. ‘장광설’이다. 길게 늘어놓는 말을 가리키니 ‘말씀 설(說)’을 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혀 설(舌)’자다. 나머지는 모두 ‘말씀 설’이다.그 앞에 ‘긴 장(長), 넓을 광(廣)’이 붙었다. ‘길고도 넓은 혀’란 뜻이다. 여기에서 ‘길고 줄기차게 잘하는 말솜씨’란 의미가 나왔다. 이 장광설은 석가모니의 신체적 특징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장광설은 중생을 계도하는 진실한 설법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중국 북송 때 최고 시인인 소동파가 남긴 시구 ‘溪聲便是長廣舌…’에 본래 의미의 장광설이 나온다. ‘계곡 물소리가 곧 부처의 유창한 설법이네…’란 뜻으로, 폭포소리에서 얻은 깨달음을 담은 표현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말이 일상의 단어로 자리 잡으면서 원래 의미가 퇴색했다. 대신에 ‘길고 지루하게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엉터리"와 "엉터리없다"는 같은 말이죠

    지난 호에 이어 우리말 부정어 생략 현상을 좀 더 살펴보자. “그 사람 엉터리야.” 이때의 ‘엉터리’도 ‘엉터리없다’에서 바뀌었다. ‘엉터리’는 본래 ‘사물이나 일의 대강의 윤곽’을 뜻하는 말이다. “1주일 만에 겨우 일의 엉터리가 잡혔다”처럼 썼다. 그래서 이를 부정해 ‘엉터리없다’라고 하면 ‘정도나 내용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이 된다. ‘엉터리없는 수작’ ‘엉터리없는 생각’처럼 쓴다.‘대강의 윤곽’을 뜻하던 말에서 의미 이동그런데 이 ‘엉터리없다’에서 부정어가 생략되고 의미 이동이 이뤄지면서 지금은 ‘엉터리’란 말 자체가 ‘엉터리없다’란 뜻을 갖게 됐다. 따라서 “네 말은 순 엉터리야”라고 하든지, “네 말은 순 엉터리없어”라고 하든지 같은 뜻이다. 문법적으로도 모두 허용된다.‘안절부절못하다’는 경우가 또 다르다. 흔히 “안절부절한 모습”이라고 한다. 또는 “안절부절하지 못한다”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틀린 말이다. 우리말에 ‘안절부절하다’란 말이 없기 때문이다. ‘안절부절’은 ‘초조하고 불안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을 뜻한다. 이 말은 특이하게 부정어가 결합한 ‘안절부절못하다’가 하나의 단어다. 활용할 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안절부절못하고~’ 식으로 써야 한다.전혀 합당하지 않을 때 “얼토당토않다”라고 한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 ‘옳+도+당(當)+하+도’로 분석된다. 이 역시 ‘얼토당토않다’가 한 단어라 부정어를 생략해서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칠칠맞다"는 칭찬하는 말이에요~

    지난 4월 치러진 삼성그룹 직무적성검사(GSAT)에서는 언어논리가 특히 어려웠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칠칠하다’ ‘서슴다’ 같은 생소한(?) 단어 앞에서 ‘멘붕’을 느꼈다는 후기가 잇따랐다. 이런 말은 낯설다기보다 우리말 용법의 허를 찌르는 사례라 할 만하다. 이들은 단독으로는 잘 쓰이지 않고 주로 ‘못하다/않다/없다’ 등 부정어와 어울려 쓰인다. 그러다 보니 본래 의미를 간과하게 된, 그러기 십상인 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알차다’에서 ‘야무지다’로 의미 확대돼흔히 쓰는 용법을 토대로 원래 형태의 의미를 추리하고 응용하는 능력을 파악하기에 적절한 사례들이다. SNS 등의 ‘일탈적 언어’ 사용에 익숙한 세대일수록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언어 등 규범어를 꾸준히 접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였다. 생글 코너를 통해서도 몇 차례 다룬 내용이었다.‘칠칠하다, 서슴다, 탐탁하다, 심상하다, 아랑곳하다.’ 얼핏 보면 의미가 잘 안 떠오른다. 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부정어와 함께 쓰는 말이라는 점이다. ‘칠칠하지 못하다, 서슴지 않다, 탐탁지 않다, 심상치 않다, 아랑곳없다.’ 이렇게 하고 보면 이들이 일상에서 흔히 쓰는, 아주 익숙한 말이라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부정어를 떼어내고는 잘 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의미가 퇴색해 기억에서 멀어진 것일 뿐이다.‘칠칠하다’는 본래 나무나 풀, 머리털 따위가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검고 칠칠한 머리’ 같은 표현에 이 말의 본래 쓰임새가 살아 있다. 물론 지금도 쓰는 말이다. 이 말이 의미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금명간'은 한자어…'이른 시일 내'로 쓰면 쉽죠

    지난 4월 26일 새벽 국회에서 ‘패스트트랙’을 놓고 여야가 대치하는 과정에서 ‘빠루’가 등장했다. 곧이어 포털사이트엔 ‘빠루’가 실시간검색(실검)에 올랐다. 이에 앞서 14일 치러진 삼성그룹 대졸공채시험 뒤에도 ‘칠칠하다’ ‘서슴다’ 같은 단어가 화제가 됐다. 신문들은 문제로 나온 낯선 낱말 앞에서 수험생들이 당혹스러워하던 분위기를 전했다.‘빠루-노루발못뽑이’ 둘 다 실패그런 사례는 많다. 지난 3월엔 ‘금명간’이 실검에 떠 주목을 받았다. 경찰에서 한 연예인의 구속 영장을 ‘금명간 신청한다’는 보도가 나온 뒤였다. ‘금명간’이 뭐지? 네티즌에게 이 말이 생소했던 모양이다.우리말을 둘러싼 이런 관심은 두 가지 상반된 화두를 던진다. 하나는 우리말을 대하는 인식이 사회적 화제가 될 만큼 커졌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니, 이런 말을 잘 모르나?’ 하는 안타까움도 묻어난다. 이런 사례는 우리말을 살찌우기 위해 필요한 언어정책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시사한다.이들은 사실 오래전부터 써오던 익숙한 말이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든 지금은 덜 쓰는 말이 됐다. 왜 그렇게 됐을까? 지렛대 원리로 못을 뽑는 도구인 ‘빠루’는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영어로는 ‘크로 바(crow-bar)’다. 까마귀 발을 닮았다 해서 그런 말이 생겼다. 이걸 일본에서 뒤의 ‘바’만 따다 ‘바루(バ-ル)’라고 적었는데,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된소리 ‘빠루’가 됐다. 원어에서 멀어져 왜곡된 형태로 자리잡은 것이다.당연히 순화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국립국어원에서 ‘노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사십둘'은 어색한 수 읽기죠

    일상의 말을 가만 들여다보면 이상한 수 읽기가 하나 있다. 숫자를 “사십둘” 식으로 말하는 게 그것이다. ‘마흔둘’도 아니고 ‘사십이’도 아니다. 의외로 이런 경우가 흔하다. 나이를 말할 때도 ‘사십두 살’이라고 한다. ‘마흔두 살’ 또는 ‘42세’라고 해야 자연스럽다.10 이하 숫자는 고유어로 많이 읽어말 쓰임새의 이런 차이는 지난 호에서 살폈듯이 숫자를 익힌, 지난 시절의 학습경험 때문인 듯하다. 일제강점기 때 아라비아숫자가 보급되면서 한국인은 숫자 읽기에 처음 눈을 떴다. 당시 문자보급교재와 신문을 보면 지금의 수 읽기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①달걀 일곱 개 중에서 세 개가 깨졌으니 남은 것이 몇 개인가.(조선일보 <문자보급교재>, 1936년) ②시계가 네 시 치오.(동아일보 <한글공부>, 1933년) ③제일 회 성적으로 보면 연령으로는 일곱 살부터 사십구 세까지 있고…(조선일보 1929년 10월 4일자)10까지의 수에는 고유어 하나, 둘, 셋 등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10을 넘는 수는 한자어가 우세했다. 예문의 ‘세 개’ ‘네 시’ ‘일곱 살’과 ‘사십구 세’에서 이런 구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10 이하 숫자에서 고유어 수사의 쓰임새가 활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계를 볼 때 ‘두 시 삼십 분’ 식으로 고유어 수사와 한자어 수사가 따로 자리잡은 배경도 유추할 만하다. 12시까지인 시 개념은 고유어로, 60까지인 분/초 개념은 자연스레 한자어 수사로 읽었을 것이다.수 읽기에서 이 같은 경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령 1명, 2명이라 쓰고 이를 일 명, 이 명으로 읽기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