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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는 왜 '역스럽다'를 퇴출시켰나

    남북한 관계가 극도로 얼어붙었다. 우리 관심은 정치적 배경보다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막말’들에 있다. 북한의 폐쇄적 사회주의 체제가 언어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의 독특한 기사 형식인 <만평> 같은 것을 보면 상대방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주기 위해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번에 나온 ‘역스럽다’도 그런 대외용 표현 가운데 하나다.남에서는 ‘역겹다’를 훨씬 더 많이 써‘역스럽다’가 무슨 뜻인지 남한에서는 알 듯 말 듯할 것이다. ‘철면피한 감언이설을 듣자니 역스럽다.’ 북한에서 내놓은 담화문 제목인데, 문맥을 통해 보면 대충 짐작할 수도 있다. 우리는 ‘역겹다’라고 하는 말이다. ‘역겹다’는 한자말 ‘역(逆)’과 고유어 ‘겹다’가 결합한 합성어다. ‘역스럽다’는 접미사 ‘-스럽다’가 붙어 만들어진 파생어다. 두 말 다 한자어가 우리말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여러 방식 중 하나다.‘역스럽다’를 우리가 잘 모르는 까닭은 이 말을 남에서 버렸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은 그 배경을 “방언이었던 ‘역겹다’가 표준어였던 ‘역스럽다’보다 널리 쓰이므로 ‘역겹다’를 표준어로 삼고 ‘역스럽다’를 표준어에서 제외하였다”라고 설명한다.우리 표준어규정 제24항은 방언이었던 단어가 표준어로 인정받는 경우를 보여준다. “방언이던 단어가 널리 쓰이게 됨에 따라 표준어이던 단어가 안 쓰이게 된 것은, 방언이던 단어를 표준어로 삼는다”고 했다. 이때 보통은 기존의 표준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문장을 비트는 '서술어 3종 세트'

    “코로나19로 인한 한국 경제의 충격이 ‘심화되고’ 있다.” “A씨는 이천병원에서 검사를 ‘진행해’ 16일 확진 판정을 받았다.” “남구보건소에서는 희망자에게 코로나19 선별검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코로나19 기사에 투영된, 우리말답지 않은 표현들이다. ‘심화되다’ ‘진행하다’ ‘실시하다’는 서술어로 흔히 쓰인다. 하지만 잘못 쓰면 어색할 때가 많다.‘심화/실시/진행하다’ 등 어색한 표현 많아글쓰기에 왕도는 따로 없다. ‘간결하게, 일상적 언어로 쉽게 쓰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예문에서는 무거운 한자어를 가져다 썼다. 말할 때는 그리 하지 않는데 글로 쓸 때면 무의식적으로 나온다.우선 ‘심화하다(되다)’부터 보자. “반도체 쏠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스마트폰 사업 의존도가 심화된 탓이다.” “××의 ‘갑질’이 점점 심화되는 추세다.” 우리말답게 쓸 때 글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진다. 요령은 어울리는 본래 서술어를 찾아 쓰는 것이다. ‘심화’는 ‘정도가 깊어짐’이다. 그러니 반도체 쏠림 현상이 ‘심화되는’ 게 아니라 ‘깊어지는’ 것이다. 의존도 역시 ‘심화된’ 것이라기보다 ‘높아진(또는 커진)’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바꿔 ‘스마트폰 사업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식으로 쓰면 글의 리듬이 살아나 더 좋다. 갑질도 ‘심화된다’고 하면 어색하고 ‘심해진다’(정도가 지나치다는 뜻)라고 하면 그만이다.‘진행하다’는 좀 특이한 단어다. “캠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진한 안개'와 '짙은 안개'

    정부 조직에는 국립국어원 외에 우리말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이 또 한 군데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술표준원이 그곳이다. 여기서는 산업계에서 쓰이는 각종 용어를 다룬다. 이른바 ‘산업계의 표준어’인 산업표준(KS)을 정하는 곳이다. 지난해 이곳에서 그동안 써오던 색이름 몇 가지를 바꿨다.‘진하다’는 한자어…고유어로는 ‘짙다’이때 ‘진갈색’ ‘진보라’가 ‘밝은갈색’ ‘밝은보라’로 제시됐다. 색이름이 실제 색깔과 달라 문구류와 디자인업계, 교육계에 혼란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가령 ‘진갈색’이라고 하면 갈색보다 짙은 색을 떠올리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런데 색칠을 해보면 오히려 ‘밝은 갈색’을 띠었다. 그래서 이를 실제 색깔에 맞게 밝은갈색, 밝은보라로 바로잡았다.고유어 같기도 하고 한자어 같기도 한 이 ‘진-’은 무엇일까? “국물이 참 진하네.” “안개가 진하게 끼었다.” 이런 말을 일상에서 흔히 쓴다. “진갈색, 진노랑, 진빨강” 같은 단어도 자주 듣는다. 이때 ‘진’은 얼핏 보면 토박이말 같다. 하지만 한자어다. ‘津’이 그 정체다. 이 한자는 통상 ‘나루 진’(서울시 노량진, 충남 당진 등에 쓰인 ‘진’이다)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는 ‘진액 진’, 즉 엑기스란 뜻이다. 진물, 송진 같은 데 쓰인 ‘진’이 모두 이 의미다.이런 데 쓰인 ‘진’은 의미상 순우리말로 ‘짙다’에 가깝다. 그러니 진갈색, 진보라는 곧 짙은 갈색, 짙은 보라다. 이를 그동안 밝은 갈색, 밝은 보라에 잘못 붙여 써온 것이다. 국물이나 안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사회적 거리두기'에 담긴 우리말 속살

    코로나19는 우리말에도 이미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많은 외래어가 새로 유입됐고, 낯선 개념과 그에 따른 용어들도 어느새 우리 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됐다. 그중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우리말과 관련해 평소 간과해온 또는 잊혀가던 문제 몇 가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말의 핵심어인 ‘거리’를 제대로 알고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점에서 그렇다.‘공간적 간격’과 ‘차 다니는 길’ 구별해야코로나19가 어느 정도 잡혀가는 듯하던 지난 4월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가 열렸다. “4월 말부터 5월 초 황금연휴가 예정돼 있습니다. 그동안 잘 지켜주신 사회적 거리두기의 고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정 총리는 이날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면서 ‘거리’의 발음을 [거:리]라고 장음으로 했다. 그는 요즘 수시로 입에 오르내리는 이 말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몇 안 되는 이 중의 하나다. 방송 아나운서를 포함해 한국인의 대부분이 ‘거리’의 장·단음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우선 ‘거리’의 정체부터 알아보자. 한 시간 거리니, 거리가 머니 가까우니 하는 말을 흔히 쓴다. 또 “그 친구와는 왠지 거리가 느껴진다”고도 한다. 이때의 ‘거리’가 ‘사회적 거리두기’의 ‘거리’와 같은 말이다. 이는 공간적·심리적으로 떨어진 간격을 말한다. 이런 걸 누가 모를까? 그런데 이게 ‘비 내리는 명동 거리’라든지, ‘거리의 풍경’이라고 할 때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때의 ‘거리’는 다른 ‘거리’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라면'의 변신은 무죄?

    “지금껏 환자를 조기 발견하고 격리하는 방식의 방역 전략을 ‘취했다면’ 이제는 재택근무 등으로 사람 간 거리를 넓혀 코로나19의 확산 속도를 늦춰야 한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지난 2월 말. 감염병 전문가들 사이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방안이 제시됐다. 우리의 관심은 여기에 쓰인 ‘취했다면’에 있다. 이 말이 보는 이에 따라 문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또는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본래 ‘가정적 조건’문에 쓰던 연결어미어미 용법 가운데 최근 들어 ‘-라면/-다면’은 전통적 쓰임새와 좀 다른 양상을 보여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어떤 사실을 가정해 조건으로 삼는 뜻을 나타내는’ 연결어미다. “내가 너라면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 “네가 그 꼴을 보았다면 아마 기절했을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보이는 이들의 전형적인 용례다.그런데 앞의 ‘취했다면’ 문장과 다음 사례는 이들과 좀 다르다. ①그동안 우리 경제가 성장에 중점을 둬 왔다면 이제는 분배에 신경을 써야 할 때다. ②유럽 축구가 힘을 바탕으로 한다면 남미 축구는 기교를 중시한다. ③20세기 제조업 혁신 모델이 포드자동차의 컨베이어 시스템이라면 서비스 혁신은 맥도날드가 시발점이었다.모국어 화자들이 느끼는 이 문장의 자연스러움은 어느 정도일까? 누군가 어색하게 느낀다면 그들은 전통적 어법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면 이들은 현실언어에 길들어 있는 사람들이다.‘-라면/-다면’ 용법의 핵심은 ‘가정적 조건’을 나타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100년 만에 되살아난 호칭어 '~ 님'

    지난 18일 옛 전남도청 건물 앞.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이 자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5·18을 상징하는 이 노래는 한때 제목의 ‘임’을 ‘님’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원래 제목이 ‘님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임’으로 수렴돼 가는 모양새다. 현행 표준어법상의 표기를 따른 것이다.현행 어법상 ‘님’은 단독으로 못 써우리말에서 ‘님’과 ‘임’의 용법은 의외로 까다롭다. 우선 현행 표준어에서 ‘님’의 쓰임새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람의 성이나 이름 뒤에 쓰여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이는 의존명사이므로 앞말과 띄어 쓴다. 요즘 은행 등 접객업소에서 손님에게 “OOO 님” 하고 부르는 게 그것이다. 일부 대기업에서 수평적 사내문화를 촉진하기 위해 도입하고 있는 ‘~ 님’ 호칭도 같은 것이다.다른 하나는 접미사로서의 ‘님’이다. 이때는 높임의 뜻을 더하는 기능을 한다. ‘선생님, 사장님’ 할 때의 ‘님’을 말한다. 또는 대상을 인격화해서 높이기도 한다. ‘해님, 달님, 별님’ 하는 게 그것이다. 특히 이때 ‘해님’을 ‘햇님’으로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해님’은 파생어(단어와 접사의 결합)이기 때문에 사이시옷 규정(합성어에서 발생)과 관련이 없다. ‘님’이 의존명사이든 접미사이든 분명한 것은 현행 어법에서 ‘님’을 단독으로 쓰지 못한다는 점이다. 언제나 앞말에 의존하거나 접사로 붙어서 존재한다.단독으로 쓰이는 말은 따로 있다. ‘사모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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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률풍'에서 '스마트폰'까지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 우리말에도 이미 영향을 끼쳤다. 관련 외래어가 새로 선보이거나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언택트’도 그런 말 중의 하나다. ‘언택트 마케팅, 언택트 소비, 언택트 서비스, 언택트 쇼핑, 언택트 문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쓰인다는 점에서 이 말은 생산성이 꽤 높다.‘텔레폰’을 음역해 ‘덕률풍’으로 불러‘비대면’ ‘비접촉’ 정도로 번역되는 이 말은 사실 코로나19 이전부터 쓰였다. 금융업 등에서 ‘비대면(非對面) 계좌 개설’, ‘비대면 서비스’ 식으로 많이 소개됐다. 그러던 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우리말 ‘비대면’보다 ‘언택트’가 전면에 부각돼 더 활발하게 쓰인다는 점은 다소 역설적이다. 현실 언어에서 외래어에 밀리는 우리말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어찌됐든 ‘언택트’의 부상은 우리 커뮤니케이션의 행태와 질서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전조임에 틀림없다. 소통의 측면에서 보면 ‘언택트의 원조’로 전화를 꼽을 만하다.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끼리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전화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것은 1898년, 지금으로부터 122년 전이었다. 개화기 서양문물이 한창 밀려들어 오던 시절이었다. 당시 궁내부(宮內部) 주관으로 궁중에서 각 아문(衙門)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덕수궁에 전화 시설을 마련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텔레폰(telephone)’의 발음을 본떠 한자식으로 음역해 ‘덕률풍(德律風)’이라고 불렀다(정확히는 중국에서 ‘德律風’으로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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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래어 대 다듬은말', 언중의 선택은?

    공공언어가 어렵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수준의 말이면 독자들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일까? 지난 2월 20일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조사 결과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조사 대상 공공용어 140개 중에서 일반 국민이 ‘잘 모르겠다’고 응답한 용어가 97개(69%)에 달했다.신문에서 자주 쓰는 외래어…국민은 어려워해‘산은, 공적 개발 원조, 예타, 일몰제, 라운드 테이블, 싱크탱크, 핀테크, 엠바고, 통화 스와프, 테스트베드, 밸류체인, 컨센서스, 규제 샌드박스, MOU, MICE산업….’ 신문 지상에 수시로 등장하는 외래어 및 한자어, 약어들에 “어렵다”는 응답이 줄줄이 쏟아졌다.외래어·한자어 다듬기는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현실 언어와의 괴리는 여전하다. 그것은 ‘우리말 인식’ 수준이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론 어떤 말이 나와서 퍼지고 자리 잡는 과정이 인위적으로, 특히 하향식으로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도 새삼 일깨워준다.다듬은말이 언중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형태와 의미 면에서 그 자체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우리말 지키기나 살리기 식의 ‘명분론’ 또는 ‘당위론’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 ‘경쟁력’의 요체는 무엇일까? 10여 년 전 남기심 전 국립국어원장이 한 인터뷰에서 지적한 데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요즘 ‘(병)따개’라고 쓰는 말을 예전엔 ‘오프너’라고 했습니다. 애초 정부에서 순화 작업을 하면서 제시한 말은 ‘마개뽑이’였는데, 그리 호응받지 못했어요. 대신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