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막을 장식하다'는 어법에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원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다' 또는 '대미를 장식하다'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각각의 말에서 일부를 줄이고 다른 일부를 차용해 섞어 만든 변형인 셈이다.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대막을 장식하다"…규범과 일탈의 줄타기
“올 가을에는 유럽의 명문악단으로 꼽히는 영국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가 한국에서 열리는 ‘월드클래스 콘서트 시리즈’의 대막을 장식한다.” “KGC인삼공사가 DB와 접전 끝에 1점 차 승리를 거두며 2021년 프로농구 대막을 장식했다.” 대중매체의 보도언어는 늘 ‘규범’ 준수와 ‘일탈’의 유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규범어를 기반으로 하지만 딱히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는다. 서술어로 쓰인 ‘대막을 장식하다’도 그런 일탈 가운데 하나로 주목할 만하다. ‘대막(大幕)’은 사전에 없지만 현실에선 통용이 말은 분명 눈에 익은데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을 준다. ‘대막을 장식하다’가 정상적인 표현에서 살짝 ‘일탈’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기왕에 쓰던 몇 가지 표현이 뒤섞인 형태다.

우선 ‘대미(大尾)를 장식하다’란 말이 있다. 어떤 일의 맨 마지막을 의미 있게 마무리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다’도 흔히 쓴다. ‘대단원’은 연극이나 소설 등에서,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끝을 내는 마지막 장면을 나타내는 말이다. 대미나 대단원이나 비슷한 뜻인데, 서술어 결합에서 차이가 있다. 대미는 ‘장식하다’와 어울리고, 대단원은 ‘막을 내리다’와 호응한다.

‘대막’은 사전에 없는 말이다. 정체불명의 말이 통용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쓰임새를 통해 원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선 ‘대단원의 막’을 줄여서 ‘대막(大幕)’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술어로는 자연스럽게 ‘내리다’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비록 일탈했다곤 해도 ‘대막을 장식하다’라고 하지 ‘대막을 내리다’라고는 잘 쓰지 않는다. 그러니 ‘대막’을 받는 서술어는 ‘대미를 장식하다’에서 가져왔음을 유추할 수 있다.

‘대막을 장식하다’는 어법에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원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다’ 또는 ‘대미를 장식하다’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각각의 말에서 일부를 줄이고 다른 일부를 차용해 섞어 만든 변형인 셈이다. 하지만 전혀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보면, 아주 드물게나마 “‘유럽 공화국(共和國)’ 大幕 올랐다”(1991.12.11.), “大幕을 내리게 되었다”(1965.7.18.) 등 보도언어로 사용된 예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가 안위(安危)가 위태롭다”는 우스운 표현우리말에는 이처럼 규범에서 일탈한 표현들이 꽤 많다. 정상적 어법으로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방황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의 정확한 구조를 모르고 대충 들은 대로 쓰다 보면 ‘비논리적 표현’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정치권에서 흔히 “국가 안위가 위태롭다”라는 말을 한다. “국민의 안위를 위해 노력한다”고도 한다. 모두 온전한 표현이 아니다.

‘안위(安危)’는 ‘편안함과 위태함’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다” “가족의 안위를 돌보다/살피다”처럼 쓰는 게 전형적인 어법이다. 서술어에 주목해야 한다. 안위가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뜻하기 때문에 ‘안위가 위태롭다/흔들리다’라거나 ‘안위를 지키다’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국가/국민의 안위를 위해 노력한다” 같은 표현도 옳지 않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다/살피다” “국가 안위가 걸려 있다”처럼 쓰는 게 마땅하다. “가족의 안위를 돌보다/노모의 안위를 묻다”처럼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면 “개인의 안위에는 관심도 없다” 같은 말은 어떨까? 우리말에는 ‘안위(安危)’ 말고 또 다른 ‘안위(安慰)’가 있다. 이는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함’이란 뜻이다. 이 용법과 구별해야 한다. 이때는 “이 한 몸 안위를 위해~” “집안의 안위를 지키려고~”처럼 쓴다. ‘편안함과 위로’를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사사로운 것이라 ‘일신의 안위’ ‘일가의 안위’는 가능하지만 같
저자·前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저자·前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은 의미에서 ‘국가의 안위’라고 하면 어색하다. 국가와 결부해 ‘안위’를 쓸 때는 ‘安慰’가 아니라 ‘安危’로 써야 자연스럽다.

우리말의 속살을 깊이 들여다보는 까닭은 글쓰기에서 ‘표현의 자연스러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단어의 선택을 통해 그 자연스러움을 더할 수 있다. 반면에 이를 거스르면 문장의 흐름이 어색해지고 글의 세련된 맛을 떨어뜨리는 위험 요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