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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관점의 언어 : '주변국' vs '이웃나라'

    “‘트럼프 2기’와 함께 시작된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은 한 치 양보 없이 전개돼 세계경제를 뒤흔들었다. …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는 중국 제품을 떠안아야 하는 압박을 받으면서 신음했다. 수출의존도가 큰 한국 등 주변국이 특히 타격을 크게 받았다.” 지난 5월 미국과 중국이 ‘관세전쟁’을 벌인 지 약 한 달 만에 첫 공식 대화에 나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해설 및 분석 기사들이 잇따랐다. 위 인용문도 그중 한 대목이다. 문장 구성에선 크게 흠잡을 만한 곳이 없다. 하지만 ‘언어의 관점’ 측면에서 옥에 티가 숨어 있다. ‘이웃나라’가 주체적·중립적인 표현‘한국 등 주변국’이란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주변국’은 조심해 써야 한다. ‘관점’이 담긴 말이기 때문이다. 우선 사전적 풀이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주변’은 어떤 대상의 둘레를 말한다. ‘둘레’는 무엇일까? 사물의 테두리나 바깥 언저리다. 그러니 ‘주변국(周邊國)’이란 글자 그대로는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나라’ 정도가 될 것이다.하지만 말에는 늘 ‘가치’가 개입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를 얘기하면서 ‘주변국’이라고 하면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중심국’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은 ‘주변국’을 “국력이 약하여 강대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라고 풀었다. 국립국어원의 <우리말샘>에선 ‘주변국가’를 “국제 사회에서 정치, 경제 방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심 국가의 주변에 위치하거나 정치적·경제적으로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글자로 풀어본 '대통령'의 의미와 역할

    이재명 대통령이 6월 3일에 취임하면서 선서에서 강조한 한 대목이 ‘대통령’의 의미를 새삼 소환했다. 이 대통령은 선서식에서 “이번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했든 크게 통합하라는 대통령의 또 다른 의미에 따라 모든 국민을 아우르고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 말은 물론 대통령이란 말 중에 ‘통’ 자에 방점을 찍어 의미를 부여한 발언일 것이다. ‘대통령’이란 말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원래 우리말에 있던 게 아닌,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다.‘권위적 어감’이란 주장은 상투적일본은 19세기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외래어를 한자어로 번역해 썼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주주의’를 비롯해 ‘사회, 개인, 근대, 미학, 자유, 문학, 의사, 내과, 산부인과, 헌병, 경찰’ 등 단어들이 다 일본식 한자어다. ‘대통령’도 그중 하나다. 영어의 ‘president’에 해당하는 번역어로 ‘통령(統領)’을 찾았고, 여기에 한 나라의 우두머리, 통치자란 의미에서 ‘큰 대(大)’ 자를 붙였다.한자 문화권에서 전통적으로 통령(統領)은 군대의 지휘관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국어사전에서는 ‘통령’을 “일체를 통할하여 거느림. 또는 그런 사람”으로 풀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말에는 ‘거느리고 통솔하다’란 의미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오래전부터 ‘대통령’이란 용어에는 구시대적 권위와 지배 의식이 담겨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는 영어의 president가 대통령뿐 아니라 기업체의 대표이사, 협회 등 단체의 대표, 회의체 의장, 대학교 총장 등 조직의 우두머리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말 조어법 ④ '콜레라-호열자-호열랄-괴질'

    2023년 8월, 정부는 120여 년 전에 간행된 콜레라 예방서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채택했다고 발표해 화제가 됐다. ‘호열자병예방주의서’가 그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에 보급된 책자로, 콜레라의 전염과 예방법 및 소독 방법 등을 적은 근대적 전염병 예방서다. 당시는 3년 4개월간에 걸친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하고 일상 회복의 첫발을 내디딘 직후라 더 주목을 끌었다. ‘섭씨, 화씨’는 대표적 음역어20세기 초 이 땅을 공포로 몰아넣은 치명적 질병 중 하나는 ‘콜레라’였다. ‘호열자병예방주의서’가 간행된 그 시절에도 콜레라가 전국을 강타했다. 책 이름에 쓰인 ‘호열자’는 외래어 ‘콜레라’를 한자어를 빌려 옮긴 음역어다. 음역어란 외래어 표기법이 없던 시절 외래 고유명사를 한자음을 갖고 나타내던 말이다. 지금은 외래어를 발음 그대로 한글로 옮겨 적는 방식이 자리 잡았지만, 지난 시절엔 음역어 표기가 널리 쓰였다.가령 ‘나파륜(拿破崙), 피택고(皮宅高), 색사비아(索士比亞), 야소(耶蘇), 석호필(石虎弼)’ 같은 게 그런 예다. 모두 외국 인명을 한자로 옮기고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나파륜은 나폴레옹, 피택고는 피타고라스, 색사비아는 셰익스피어다. 지금은 이런 이름을 쓰지도 않고, 기억하는 이도 없겠지만, 지난날 우리말에서 실제로 쓰이던 이름이다. 국어사전에도 당당히 올라 있다. 야소는 예수(Jesus)를 음역한 말이다. 석호필의 정체는 일제강점기에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들어온 영국 출신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다. 한국에서 의료, 선교, 독립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펼친 그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 ‘석호필’이었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말 조어법 ③ '천연두-마마-두창-역질'

    1940년 새해 벽두부터 한반도에는 ‘천연두(天然痘)’가 창궐했다. 그해 조선일보는 1월 6일 자에서 “함흥에서 시작된 천연두가 방역 당국의 필사적 방어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새 환자가 생겨나고 있다”며 “현재 누계 532명에 3할에 해당하는 15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전했다. 지금은 낯선 질병인 천연두는 약 100년 전만 해도 이 땅에서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완곡어법으로 탄생한 이름 ‘천연두’‘천연두’는 당시만 해도 치사율이 30%에 이르던 급성 감염병이었다. 고열에 시달리며 온몸에 발진이 생겨 긁으면 얽게 되는 무서운 병이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백신을 인체에 접종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 ‘종두법’이다. 영국인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발명한 종두법 덕분에 세계보건기구(WHO)는 1980년 공식적으로 천연두 박멸을 선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석영에 의해 처음으로 종두가 시행됐다(그가 의학자이자 탁월한 국어학자였다는 점도 함께 알아둘 만하다. 지석영은 1905년에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했고,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깨달아 국문연구소를 설치해 우리말 발전과 보급에 노력했다. ‘신정국문’은 그가 지은 국문 연구론으로, 이를 통해 한글 전용과 병서의 폐지, 자체(字體)의 개혁 등을 주장했다).지난 시절에 천연두가 ‘전염병의 대명사’로 불린 만큼 이 질병은 다양한 이름과 함께 우리말에도 흔적을 깊게 남겼다. 천연두는 한자 번역어인데, 그중에서도 의역을 통해 우리말 체계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천연(天然)’이란 말은 사람의 힘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가리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말 조어법② '장티푸스-장질부사-염병'

    100여 년 전 이 땅을 해마다 공포에 떨게 한 전염병은 ‘장질부사’와 ‘두창’ 같은 질병이었다. 의료시설은 낙후돼 있고, 위생도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장질부사 발생이 165인 내에 사망한 자 25인이요, … 두창 발생이 2047인 내에 사망한 자 539명이요, 천연두 환자 제일 다수하다더라.” 1920년 조선일보는 7월 14일 자에서 6월 한 달간 경기도의 전염병 발생 현황을 자세히 전했다. ‘장질부사’는 음역어, ‘염병’은 환칭‘장질부사(腸窒扶斯)’는 ‘장티푸스(腸typhus)’를 가리키던 말이다. 지금은 외래어를 현지 발음에 맞춰 한글로 적으면 되지만, 당시만 해도 외래어 표기법이 따로 없었다. 인명·지명 등 고유명사는 주로 한자음을 빌려 썼다. 이른바 ‘음역어’인데,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름 붙인 것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었다.‘장티푸스’는 티푸스(typhus)균이 장(腸)에 들어가 일으키는 병이란 뜻으로, ‘장’과 ‘티푸스’를 합성한 말이다. 이를 중국에서 ‘腸窒扶斯’로 적고 [창즈푸쓰] 정도로 읽던 것을 우리 한자음, 즉 음역어로 읽은 것이 ‘장질부사’다. 로스앤젤레스를 ‘나성’이라 하고, 프랑스를 ‘불란서’라 말하는 게 음역어 방식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익히고 말하는 ‘미국, 영국, 독일, 태국’ 같은 게 다 그렇게 우리말 체계에 들어왔다.당시 ‘장질부사’가 얼마나 무서운 병이었는지 나중에 ‘염병’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염병(染病)’은 두 가지로 쓰인다. 하나는 글자 그대로 전염병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장티푸스를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홍역-제구실'로 엿보는 우리말 조어법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1일까지 신고된 홍역 환자는 모두 52명이다. 이는 지난해 1년간 발생한 환자 49명보다 많은 것으로, 2019년(연간 194명) 이후 6년 만에 최다다.”이달 4일 국내 홍역 환자가 다시 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한동안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는 2014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홍역 퇴치국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도 소규모 환자가 계속 생기는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해외에서 유입되어서다.‘제구실’은 환유 통해 탄생한 조어‘홍역(紅疫)’은 1~6세의 어린이에게 많이 발생하는 급성전염병이다. 온몸에 좁쌀 같은 붉은 발진이 돋는다고 해서 붉을 홍(紅) 자와 염병 역(疫) 자를 써서 이름 지었다. 이름에는 병에 대한 단서가 담겨 있다. ‘후진국형 질병’이라고 할 만큼, 의료시설과 후생이 열악하던 지난 시절엔 아주 흔한 병이었다.그런 만큼 우리말에도 그 존재감이 역력히 남아 있는데, ‘제구실’이 그것이다. ‘제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책임’을 뜻하는 말이다. “제구실도 못 하는 주제에 남의 걱정을 한다” 같은 게 전형적 용법이다. 여기에 더해 ‘어린아이들이 으레 치르는 홍역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아이가 홍역을 앓고 나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한다는, 그만큼 누구나 치러야 하는 역병이라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홍역을 치렀다”라는 관용구에도 이 질병에 대한 무서움이 담겨 있다. 이는 어떤 일에서 ‘몹시 애를 먹거나 어려움을 겪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큰아들의 가출로 온 집안이 홍역을 치렀다”처럼 쓴다. 그러니 홍역의 또 다른 이름인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관점의 언어 : '고객'과 '손님'의 차이

    “SK텔레콤은 최근 대규모 유심 정보 해킹 사태로 인해 예상치 못한 큰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 고객뿐 아니라 기업도 해킹의 피해자라는 측면에서 초기에 보다 빠르고 투명하게 대응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난달 터진 SK텔레콤의 유심 정보 해킹 사태가 일파만파의 후유증을 낳았다. 사태 배경과 향후 추이를 분석한 이 기사 한 대목에는 눈여겨봐야 할 말이 하나 있다. ‘고객’은 공급자 중심으로 쓰는 말힌트는 ‘관점의 언어’다. 글쓰기에서 ‘누구의 관점’에서 서술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관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누군가 “쓰레기 분리수거”라고 한다면 이는 쓰레기를 거둬가는 업체의 말이고, “분리배출”이라고 하면 주민의 관점에서 하는 말이다. 1953년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전기념일’이라고 한다. 남침으로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북한에서는 이를 미화해 스스로 ‘전승절’이라고 부른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누군가 이날을 두고 자칫 ‘전승절’ 운운한다면 이는 망발이 된다.예문에서는 ‘고객’이 눈에 띈다. ‘고객’은 어떤 때 쓰는 말일까? 누구나 아는 말 같지만, 의외로 이 말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 ‘고객’은 보통 두 가지로 쓰인다. ‘① 상점, 식당, 은행 따위에서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는 사람 ② 단골로 오는 손님’, 특히 ②의 의미로 이 말을 쓸 때 제격이다. 즉 ‘판매자 관점’의 말인 셈이다. SK텔레콤 입장에서는 ‘고객’이겠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고객’보다 ‘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말의 다양성 잡아먹는 '굉장히'

    ““얼마나 다쳤어?” “굉장히 다쳤어요.” “굉장히가 얼마만큼이지?” “글쎄, 굉장히 다쳤대요.” 아마 죽기 직전의 상처면 한 바늘 꿰맬 정도에서부터 모두 ‘굉장히’인지도 모른다.” 우리말에서 ‘굉장하다’가 무소불위의 힘으로 그 쓰임새를 넓혀간 지는 꽤 오래됐다. 1977년 12월 5일 자에서 한 신문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말끝마다 ‘굉장히’를 ‘굉장히’ 많이 쓰고 있다며 우리말 세태를 비판했다.토박이 정도부사 써야 우리말 살아‘굉장하다’의 오남용이 우리말에 끼치는 폐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난 호에서 살펴봤듯, 우리말의 ‘논리적·합리적 표현’에 역행한다는 점이다. 크고 대단한 기세를 나타내는 ‘굉장(宏壯)’을 좋고 슬프고 하는 감성어와 결합함으로써 ‘언어적 자연스러움’을 떨어뜨린다. 심지어 “굉장히 작다” 식으로 의미영역이 반대인 말과 함께 쓰기도 한다.다른 하나는 ‘굉장하다’의 남발이 수많은 토박이말 어휘를 잡아먹어 우리말의 다양함과 풍성함을 해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보통보다 훨씬 더’라는 강세 어감을 드러내는 말이 꽤 많다. ‘매우, 무척, 아주, 되게, 몹시, 엄청, 무지, 너무, 하도, 사뭇, 퍽, 꽤, 제법, 자못, 대단히, 정말, 참, 상당히, 진짜로, 많이….’ 이들은 모두 정도부사로, 영어의 ‘very’에 해당하는 어감을 전달할 수 있다.정도부사란 수식받는 말의 정도를 한정하는 부사로 강세 어감을 나타낸다. ‘철수는 매우 멋있다’에서 ‘매우’, ‘정상까지 너무 멀다’에서 ‘너무’가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