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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폭싹 속았수다'에 담긴 문법들

    지난 3월 선보인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며 연일 화제다. 드라마 주요 무대인 제주와, 제목으로 쓰인 제주 방언도 덩달아 주목받고 있다. ‘폭싹 속았수다’가 표준어를 쓰는 이들에겐 ‘완전히 속았네요’쯤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제주 방언에서 ‘폭싹’은 ‘매우, 몹시’란 뜻이다. ‘속았수다’의 기본형인 ‘속다’는 ‘수고하다’라는 의미다. 어미처럼 쓰인 ‘-수다’는 표준어 ‘-어요’에 해당한다. 이 말은 함남 지방 사투리로도 많이 알려졌다. 그러니 드라마 제목 ‘폭싹 속았수다’는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정도의 뜻이다. ‘ㄱ, ㅂ’ 받침 뒤에선 된소리로 적지 않아우리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폭싹’이란 표현이다. 우리말의 소리 적기, 그중에서도 된소리 적기에 관한 것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안 나오고,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는 ‘폭삭’의 비표준어로 나온다.그런데 표준어 ‘폭삭’을 우리는 “폭삭 망했다” “폭삭 늙었다” 식으로 어떤 상태가 아주 심한 것을 나타내는 말로 쓴다. 이는 ‘보통보다 훨씬 더, 더할 수 없이 심하게’란 뜻을 담은 ‘매우, 몹시, 아주’ 같은 부사와 의미 자질이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시중에서는 이 드라마의 제목에 쓰인 ‘폭싹’을 ‘폭삭’으로 바꿔 쓰는 경향이 있다.물론 표준어에선 ‘폭삭’만이 바른 표기다. ‘폭싹’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한글맞춤법의 된소리 표기 규정이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열에 아홉은 틀리는 '하여금'의 용법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전부터 ‘파나마운하 운영이 중국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면서 되찾아오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지난 4일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미국 블랙록으로 하여금 파나마운하 운영권을 보유한 홍콩계 허치슨포트홀딩스의 지분 90%를 인수하기로 했다.” 트럼프 2기가 시작되면서 미·중 패권 경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파나마운하를 둘러싼 운영권 갈등도 그중 하나다. 예문의 두 번째 문장에는 우리말 ‘~로 하여금’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오류가 있다.‘~로 하여금 ~하게 하다’로 짝을 이뤄우선 문장의 골격만 추려보면, “블랙록으로 하여금 지분 90%를 인수하기로 했다”이다. 일단 목적어와 서술어는 금세 눈에 띄는데 주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략됐다는 뜻인데, 문맥상 앞 문장에 나온 ‘트럼프’로 잡을 수 있다. 그러니 “(트럼프는) 블랙록으로 하여금 ~의 지분 90%를 인수하기로 했다”가 문장의 골격이다.결론부터 말하면 이 문장은 비문이다. 우리말을 정상적으로 구사하는 이들한테는 이 문장이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로 하여금’ 뒤에는 ‘~하게 하다’ 꼴이 와야 문장이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하여금’은 격조사 ‘-으로’ 뒤에 쓰여 ‘누구를 시키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으로 하여금’의 구성으로 쓰여 전체 문형은 ‘~으로 하여금 ~게 하다’, ‘~으로 하여금 ~도록 하다’로 이루어진다. 이때 앞부분은 ‘~를 시키어’, ‘~에게’, ‘~가’로 바꿔 쓸 수 있다.이처럼 의미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사즉생이 사즉생으로 와전된 까닭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얼마 전 임원들에게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 ‘사즉생’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할 때”라며 ‘독한 삼성인’으로 거듭날 것을 당부했다. 삼성 전 계열사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이달 말까지 진행하는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 자리에서다. 반도체를 비롯해 TV, 가전, 스마트폰 등 주력 사업 전 부문에서 시장점유율이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비상 선언인 셈이다. ‘死卽生’은 틀린 말…‘死則生’이 맞아그의 발언은 곧바로 언론의 대대적 보도로 이어지면서 ‘사즉생’도 함께 화두로 떠올랐다. 이 말은 ‘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해 각오가 아주 대단함을 이를 때 쓴다. 애초 이순신 장군이 임전무퇴의 각오를 다지며 쓴 말이다. 현대에 와서는 정치 지도자나 기업 CEO들이 눈앞에 닥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종종 인용한다.주목해야 할 것은 의외로 이 말의 정체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부분 ‘사즉생(死卽生)’으로 쓰지만, 이는 ‘사즉생(死則生)’을 잘못 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즉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라고 한 데서 따온 말이다. 이를 줄인 게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다. ‘필사(必死)’는 “죽을힘을 다함”이다. 그래서 ‘필사적’이라고 하면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원전이 있는 말이라 원전 그대로 써야 한다.이 표현은 이순신 장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불효자 방지법'에서 엿보는 우리말의 그늘

    “부모님 건강히 살아 계시는데 제사상을 준비하는 호래자식하고 똑같다.” 탄핵 정국 와중에 한 유명 인사 입에서 튀어나온 ‘호래자식’이 한동안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배운 데 없이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사전 풀이로 보면 욕은 아니지만 좋은 말도 아니다. 게다가 그 형태도 호래자식, 호로자식, 후레자식, 호노자식 등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이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말의 속살이자 그늘을 엿볼 수 있다.후레자식은 ‘홀의 자식’이 변한 말2018년 국회에 발의된 특이한 법안 가운데 ‘불효자 방지법’이란 게 있었다. 자녀가 부모한테서 재산을 상속받고도 부양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부모를 학대하는 패륜 행위를 할 경우 증여 재산을 반환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법을 따로 제정하는 것은 아니고 민법의 관련 조항을 바꾼 개정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효를 강제한다는 반론에 부닥쳐 아직 법으로 제정되지는 않았다.이 법안은 원래 ‘호로자식 방지법’이란 더 희한한 명칭으로 불렸다. 개정안을 발의한 민◇◇ 국회의원이 처음 제안한 2015년에 관련 정책 토론회를 열면서 쓴 용어가 통용됐다. ‘호로자식’이라는 어감이 너무 좋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자 명칭을 ‘불효자 방지법’으로 바꿨다. 일명 ‘불효자 먹튀 방지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독특하기는 마찬가지다.하지만 국어사전에 ‘호로자식’이란 말은 없다. 단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후레자식(후레아들)’, ‘호래자식(호래아들)’만 허용했다. &lsqu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방황하는 말 '가품', 선택받은 말 '짝퉁'

    지난해 말부터 이어지고 있는 ‘가품’ 논란이 패션·유통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작년 12월 국내 패션 플랫폼 1위 업체인 무신사에서 패딩 혼용률이 허위로 기재된 사실이 알려졌다. 올해 초엔 국내 1위 이커머스 쿠팡에서 ‘짝퉁’ 영양제 사건이 터졌다. 이들 업체는 소비자 신뢰 제고를 위한 ‘정책’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무신사 등은 입점 브랜드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섰다. 롯데온, SSG닷컴, 네이버 등 국내 대기업 이커머스사도 ‘위조품’으로 판명되면 대금 정산을 보류하는 ‘정책’을 펴기로 했다. 100년 역사 ‘가품’은 사전에 없어유통가에 ‘짝퉁’ 시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 관심은 이들 논란을 전하는 저널리즘 언어에 있다. 우리말의 의미·용법과 관련해 주목할 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가품’ ‘짝퉁’ ‘위조품’ 같은 말이 눈에 띈다.‘가품(假品)’이란 말이 요즘 많이 쓰인다. ‘거짓 가(假)’ 자를 썼으니 가짜 상품이란 뜻일 것이다. 하지만 국어사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단어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진품(眞品)’은 말 그대로 ‘진짜인 물품’을 가리킨다. ‘정품(正品)’이란 말도 쓴다. 진짜거나 온전한 물품이란 뜻이다. 이들은 사전에 올라 있다. ‘거짓 가(假)’를 쓴 ‘가품’이 ‘참 진(眞)’ 자를 쓴 진품에 상대하는 말이니 그럴듯한데, 아쉽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은 다루지 않았다. 그 대신 가짜 물품을 가리키는 말로 ‘모조품’이 있다. 다른 물건을 본떠 만든 물건이란 뜻이다. 그림이면 ‘모사품’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단어의 힘: '교각'은 '다리 기둥'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안성 고속도로 ‘교각 붕괴 사고’의 원인을 놓고 다양한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제 오전 경기 안성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교각 상판 구조물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경기도 안성의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교량이 무너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지난달 25일 경기 안성의 서울세종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교각 위 철근 구조물이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언론들은 이 사건을 속보로 앞다퉈 내보냈다.‘교각 붕괴’와 ‘교각 상판 구조물 붕괴’언론사마다 사고를 조금씩 다른 말로 전하고 있는 게 눈에 띈다. 무너진 것이 교각인지, 교각 상판 구조물인지, 교량인지 제각각이다. 교각은 다리를 받치는 기둥을 말한다. 교각 상판 구조물이라면 다리 기둥, 즉 교각 위에 얹어놓은 보의 일종이다. 교량은 보통 완성된 다리를 가리킨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표현은 교각 상판 구조물 정도일 것이다.‘교각’이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확히 쓰지 않아 정보전달에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통사고 기사에서 특히 그렇다. 지난해 12월 21일 충남 공주시 대전·당진고속도로에서 일어난 유조 차량 사고에서도 같은 오류가 반복됐다. 이 사건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던 탱크로리가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다리 난간에 부딪혀 4000L가량의 기름이 유출됐다. 많은 언론이 이를 “교각에 부딪혀…” 식으로 표현했다. 다리 위를 달리던 차량이 ‘교각’에 부딪힐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각 붕괴’와 ‘교각 상판 구조물 붕괴’는 전혀 다른 말이라 엄격히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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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처'는 '범정부'와 다른 말

    “정부는 18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로 제6차 수출전략회의를 열고 ‘범부처 비상 수출 대책’을 발표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월 보도자료를 내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범부처 비상 수출 대책’을 발표했다. 이틀 뒤인 20일엔 박성택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이 수출 동향 점검 회의에서 다시 “지난 18일 발표한 ‘범정부 비상 수출 대책’을 속도감 있게 이행하겠다”고 말했다.‘범부처’는 부처 내 각 부서를 아우름언론을 통해 전해진 정부 발표에는 주목할 만한 표현상 차이가 있다. 애초에 ‘범부처’ 대책으로 발표한 것을 나중엔 ‘범정부’ 대책이라고 했다. 맥락상 두 말은 같은 의미로 쓰였다.비상 수출 대책을 위해 정부의 한두 개 부처가 아니라 모든 부처가 함께 대응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범부처’와 ‘범정부’는 같은 말일까? 부처와 정부가 서로 다른 말인데, 범부처와 범정부가 같은 의미일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잘못 쓴 말이라고 봐야 한다.요즘 언론에서 ‘범부처’란 말을 자주 쓴다. ‘범정부’란 표현도 함께 나온다. “물가 안정을 위해 ‘범정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총리는 수해 대책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노력을 당부했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범정부’를 ‘정부의 전체를 아우름’으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서는 ‘정부의 각 부처들을 하나로 아우름’으로 풀이한다. 즉 정부의 특정 부처나 일부 부처가 아니라 정부 각 부처를 두루 아우른다는 뜻이다.“정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당선자-당선인'에 담긴 공과 과

    “앞으로 대통령 ‘당선자’가 아니라 ‘당선인’으로 써주기를 바랍니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이명박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언론사에 다소 이례적인 주문을 했다. ‘대통령직인수에관한법률’ ‘국회법’ 등에서 ‘당선인’이란 말을 쓴다는 점이 명분으로 제시됐다. 항간에선 그동안 별문제 없이 써오던 말을 바꿔달라는 인수위 요청에 다양한 해석과 함께 열띤 논란이 이어졌다. 그중에 ‘놈 자(者)’보다는 ‘사람 인(人)’을 쓰는 게 격이 좀 높아 보인다는 해석도 꽤 그럴듯하게 제시됐다. ‘-자’와 ‘-인’의 구별은 사회적 규정논란이 커지자 헌법재판소에서 의견을 제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헌재 결정과 관련해서는 ‘대통령 당선인’보다 헌법에서 규정하는 대로 ‘대통령 당선자’라는 표현을 써달라”고 언론에 요청했다. 당시 ‘이명박 특검법’ 헌법소원에 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입장을 덧붙인 것이다. 어찌 됐건 인수위의 요청에 언론사들은 대부분 ‘당선인’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당선자 대신 당선인을 쓰는 게 관행으로 굳어졌다.이보다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인에 대한 인권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그전에는 ‘장애자’로 불렸다. 서울올림픽 때만 해도 공식 표기가 ‘장애자올림픽’이었다. 장애자란 말 자체에 비하하는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이 말을 낮춰 부르는 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새로 제시된 말은 ‘장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