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자’는 외래어 ‘콜레라’를 한자어를 빌려 옮긴 음역어이다. 음역어란 외래어 표기법이 없던 시절 외래 고유명사를 한자음을 갖고 나타내던 말이다.
2023년 8월, 정부는 120여 년 전에 간행된 콜레라 예방서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채택했다고 발표해 화제가 됐다. ‘호열자병예방주의서’가 그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에 보급된 책자로, 콜레라의 전염과 예방법 및 소독 방법 등을 적은 근대적 전염병 예방서다. 당시는 3년 4개월간에 걸친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하고 일상 회복의 첫발을 내디딘 직후라 더 주목을 끌었다.
Getty Images Bank
Getty Images Bank
‘섭씨, 화씨’는 대표적 음역어20세기 초 이 땅을 공포로 몰아넣은 치명적 질병 중 하나는 ‘콜레라’였다. ‘호열자병예방주의서’가 간행된 그 시절에도 콜레라가 전국을 강타했다. 책 이름에 쓰인 ‘호열자’는 외래어 ‘콜레라’를 한자어를 빌려 옮긴 음역어다. 음역어란 외래어 표기법이 없던 시절 외래 고유명사를 한자음을 갖고 나타내던 말이다. 지금은 외래어를 발음 그대로 한글로 옮겨 적는 방식이 자리 잡았지만, 지난 시절엔 음역어 표기가 널리 쓰였다.

가령 ‘나파륜(拿破崙), 피택고(皮宅高), 색사비아(索士比亞), 야소(耶蘇), 석호필(石虎弼)’ 같은 게 그런 예다. 모두 외국 인명을 한자로 옮기고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나파륜은 나폴레옹, 피택고는 피타고라스, 색사비아는 셰익스피어다. 지금은 이런 이름을 쓰지도 않고, 기억하는 이도 없겠지만, 지난날 우리말에서 실제로 쓰이던 이름이다. 국어사전에도 당당히 올라 있다. 야소는 예수(Jesus)를 음역한 말이다. 석호필의 정체는 일제강점기에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들어온 영국 출신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다. 한국에서 의료, 선교, 독립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펼친 그가 스스로 지은 이름이 ‘석호필’이었다.

음역어는 지난 시절 외래어를 적던 방식이지만, 우리말이 걸어온 길을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 할 조어법이다. 음역어 가운데 완전히 우리말 속에 뿌리내려 여간해 그 정체를 알기 어려운 말도 있다. ‘섭씨, 화씨’가 그것이다. 온도 단위의 하나인 ‘섭씨’는 고안자인 스웨덴 셀시우스의 중국 음역어인 ‘섭이사(攝爾思)’에서 온 말이다. 첫 글자 ‘섭’을 따고 거기에 ‘씨(氏)’를 붙여 만든 것이다. 또 다른 온도 단위인 ‘화씨’는 고안자인 독일의 파렌하이트의 중국 음역어 ‘화륜해(華倫海)’에서 유래했다. 역시 첫머리의 ‘화’에 씨를 붙여 화씨가 됐다. 오역으로 ‘호열랄’이 ‘호열자’로 굳어예전엔 콜레라가 장티푸스 못지않게 치사율이 높은 병이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범 호(虎)’ 자를 써서 ‘호역(虎疫)’이라 부르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라는 뜻에서 ‘괴질’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호열자병예방주의서’에는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표기상 특이점이 있다. 원래 이 책 표지에는 ‘虎列剌病豫防注意書’, 즉 ‘호열랄병예방주의서’로 쓰여 있는 게 그것이다. 한자로 ‘虎列剌(호열랄)’로 적힌 것을 한글로 ‘호열자’로 바꿔 등록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1900년대에는 콜레라를 칭할 때 호열‘랄(剌)’과 호열‘자(刺)’를 함께 사용했고 △당시 독립신문에 ‘호렬자’로 기재되었으며 △1930년대부터는 일반적으로 ‘호열자’로 칭했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호열자병예방주의서’로 등재했다고 밝혔다.

‘콜레라’와 ‘호열자’는 발음이 매우 다른데, 호열자가 콜레라의 음역어로 쓰인 데는 사연이 있다. 이 말이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글자가 잘못 전해졌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애초 일본에서 콜레라를 음역해 ‘虎列剌’로 적고 [코레라(コレラ)]로 읽었다. 이것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으면 ‘호열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랄(剌)’을 모양이 비슷한 ‘자(刺)’로 잘못 읽어 ‘호열자’로 전해진 것이다. 여기에다 의미적으로도 치명적 질병을 나타내기엔 ‘찌를 자(刺)’ 자가 더 적합한 데가 있다는 점에서 의도적으로 그리됐을 가능성도 있다.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어찌 됐든 최초의 국어사전인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38년)에는 ‘호렬자(虎列刺)’로 올라 있고 ‘호열랄’이나 ‘호렬랄’은 없다. 당시에 이미 ‘호렬자’ 또는 ‘호열자’로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957년에 완간된 <조선말 큰사전>(한글학회 간) 역시 ‘호열자(虎列刺)’를 콜레라를 뜻하는 말로 올렸다. 음역어를 통해 우리말이 지나온 뒤안길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