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갸날이란 이름이 '축일(祝日·경사를 축하하는 날)' '제일(祭日·제사를 지내는 날)' 같은 어려운 한자어보다, '데이' '시즌' 같은 낯선 외래말보다 읽기 좋고 알기 쉽다고도 했다.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100년을 앞서간 한용운의 '가갸날' 詩
가갸날에 對하야 - 한용운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 ‘씨슨’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중략)

‘데-’보다 읽기 좋고 ‘씨슨’보다 알기 쉬워요

(중략)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줄 수 있어요.”

지난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였다. 3월 3일은 삼겹살데이이고, 곧바로 14일 화이트데이, 4월 14일 블랙데이로 이어진다. 작명 배경도 재미있다. ‘삼’이 겹친다고 해서 삼겹살 먹는 날이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에 초콜릿을 못 받은, 연인 없는 사람끼리 ‘검은 옷’을 입고 ‘짜장면’ 먹는 날이라고 블랙데이란다. 오이데이도 있고 구이데이, 한우데이, 가래떡데이, 빼빼로데이 등 ‘데이’ 종류만 수십 가지다. 상술 논란에 휩싸인 거야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우리말 관점에서도 한번 살펴볼 만하다. ‘가갸날’이 ‘-데이’보다 읽기 좋고 알기 쉬워“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 ‘씨슨’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 / ‘데-’보다 읽기 좋고 ‘씨슨’보다 알기 쉬워요/ … /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줄 수 있어요.”

세월을 훌쩍 거슬러 올라 100여 년 전으로 가보자.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이별과 만남의 시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 그는 1926년 ‘가갸날’(한글날의 처음 이름)의 탄생 소식을 듣고 이날의 감격을 벅찬 심정으로 노래했다.

일제강점기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은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를 중심으로 ‘가갸날’을 제정했다.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일로 삼았다. 그때가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29일),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꼭 480년 되던 해였다. 당시만 해도 ‘한글’이라는 말이 보편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글을 배울 때 “가갸거겨…” 식으로 읊는 데서 착안해 이름을 지었다. 이후 2년 뒤인 1928년부터 ‘한글날’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가갸날의 탄생은 양양 의상대 아래 관음굴에서 면벽수행 중이던 만해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가갸날 행사가 열린 지 한 달여가 지난 그해 12월 7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글에서 그는 가갸날을 맞는 느낌을 진솔하게 밝혔다. ‘가갸날에 對(대)하야’란 제목의 글 끄트머리에 붙인 축시에서 만해는 한글의 소중함과 자랑스러움을 구체적 단어들을 제시하면서 절절히 토해냈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무릎을 치게 한다.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 ‘씨슨’ 같은 말 위에 가갸날이 났다”고 했다. ‘데-’는 데이(day), ‘씨슨’은 시즌(season)을 당시 표기로 적은 것이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조선어학회, 1933년)이 나오기 전이라 제대로 된 철자법도 없었다. 외래어 표기는 특히 더했다. 가래떡데이 등 애초 ‘~날’로 정했으면 더 좋아가갸날이란 이름이 ‘축일(祝日·경사를 축하하는 날)’ ‘제일(祭日·제사를 지내는 날)’ 같은 어려운 한자어보다, ‘데이’ ‘시즌’ 같은 낯선 외래말보다 읽기 좋고 알기 쉽다고도 했다. 요즘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우리말 실태를 100년 앞서 꿰뚫어 본 혜안이라 할 만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남자 누구나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만해의 가갸날 예찬은 요즘 글쓰기에도 시사점을 준다. ‘읽기 쉽고, 알기 쉽게’란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고 ‘-데이’ 같은 말이 뭐 그리 어려울까. 하지만 기왕 새로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좇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본래의 외래말은 있는 그대로 말하고 쓰면 될 일이다. 밸런타인데이나 할로윈데이, 허그데이 같은 게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오이데이니 사과데이, 한우데이, 가래떡데이 같은 수많은 ‘-날’들을 굳이 ‘-데이’로 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만해가 감탄했던 것처럼 ‘-날’로 했으면 더 자연스럽고 친근한 표현이 되지 않았을까?

‘부처님오신날’ 같은 게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예전에 석가탄신일, 줄여서 석탄일이라고 하던 말이다. 법정용어도 그랬다. 불교계에서는 1960년대부터 한자어인 불탄일·석탄일을 쉽게 풀어 쓰자는 취지로 ‘부처님오신날’로 바꿔 써왔다. 정부에서도 2017년 국무회의에서 ‘부처님오신날’ 명칭을 확정해 비로소 공식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쉽고 친근한 말, 대중에게 다가가는 말에 일찍 눈뜬 불교계의 ‘우리말 순화운동’ 사례라 할 만하다.